1/06/2018

리빙스턴 박사를 찾아서: 04: 바가모요에서의 생활 6



내가 여기에서나 책의 다른 곳에서 사소한 일에 대해 마음에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하더라도,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 했다고 생각하지 말고 너그럽게 들어주길 바란다. 한 말은 작은 것까지도 모두 사실이고, 모든 사실은 지식이 된다.

오자마자 이방인의 혼을 빼는 끔찍하고 자질구레한 일들에 휘말리지 않았다면 내가 이런 경험을 이야기해줄 수 있었을까? 정부 관료로 이곳에 왔다면 나는 손가락만 까딱거렸을 거고, 얼마를 원했던 원하는 만큼의 짐꾼이 일주일 안에 공급됐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으로, 공식적 직함이라는 은총 없이 이곳에 와서, 정부의 영향력이라는 무기 없이 인내심을 발휘하며 내 시간을 견디고, 초조함과 분노를 조용히 혼자 삭여야 했다. 하지만 내가 먹은 빵은 모두 그렇게 시큼하지는 않았다.

백인 대원 파쿼와 쇼는 꾸준히 캔버스 천을 이용해 방수 텐트 만들기에 열중했다. 마시카Masika가 곧 닥치리라 예고하는 소나기를 보니 가벼운 천으로 된 평범한 텐트로는 나도 젖을뿐더러 내 물건들에 곰팡이가 슬 것 같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몰랐거나 서두르다 잘못된 일을 바로잡을 시간이 있는 데도 모두 다 잘 되겠거니 낙관하며 방치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텐트를 다시 제작하게 했다. 13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무려 23번이나 열병을 앓았는데도 회복해서 지금 아무 문제 없이 건강하다. 첫째, 신의 자비 덕택이다. 신에게 목숨을 빚졌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둘째, 일에 대한 내 열정이 나를 살렸다. 열정은 시종일관 내게 생기를 주었다. 셋째, 악덕과 방종에 빠져서 내가 세운 원칙을 무너뜨리는 짓을 한 번도 하지 않은 덕택이다. 그래서 목숨을 지킬 수 있었다. 넷째, 타고난 에너지 덕분이었고, 다섯째, 절대 희망을 버리지 않는 천성 덕분이었다. 그리고 여섯째는 바로 넉넉한 물과 습기가 스며들지 않는 캔버스 천으로 만든 집을 마련한 덕분이었다. 이 시점에 내 경험에서 얻은 도움을 원한다면, 여행자가 더 잘 판단할 수 있는데도 텐트 제작자의 변덕에 밀려 물러나지는 말라고 말할 것이다. 텐트 제작자는 훌륭하기는 해도 모든 날씨에 적합하지는 않은 자기 천을 넘기려 할 테지만, 여행자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돈으로 살 수 있는 최상의 천을 구하는 것이 좋다. 결국, 그러는 편이 가장 비용을 적게 들이는 방법일 뿐 아니라, 아마도 자신의 목숨을 구하는 수단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실패했던 일이 하나 있다. 그로 인해 많은 즐거움을 놓쳤다. 젊은 풋내기 여행자들이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이 단락에 그에 관해 기술한다. 사냥용이든 방어용이든 무기를 선택하는데 매우 신중해야 한다. 여행자는 적어도 세 종류의 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첫째, 들새 사냥용 총이다. 둘째, 쌍총신의 10이나 12 게이지 소총이다. 세 번째는 방어용 연발 소총이다. 들 새 사냥용으로 나는 총신이 최소한 4피트는 되는 12 게이지 총을 권한다. 노련한 사냥꾼들에게는 당연히 죄송한 말이지만 더 큰 사냥감을 잡으려면 아프리카 사냥감에 최적이라고 하는 영국 랭커스터Lancaster나 라일리Reilly 소총이 좋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전투용으로 지금까지 발명된 최고의 물건은 미국 윈체스터Winchester 연발 소총이나 ‘16발 사격수sixteen- shooter’라는 별명을 가진 런던 일레이London Eley가 공급하는 총이라는 의견을 고수한다. 전투용 무기로 미국 윈체스터가 좋다고 말했다고, 여행자가 공격용으로 총을 반드시 지녀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공격받았을 때 강력하고 효과적인 방어 수단으로, 아프리카 노상강도로부터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총이 필요하다. 언제든 공격을 받을 수 있다.

나는 내륙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는 한 청년을 만났다. 그는 아프리카 사냥감을 잡는 용도로는 ‘엑스프레스’ 소총이 지금까지 발명된 가장 완벽한 무기라고 장담했다. 그 젊은이의 생각이 얼마든지 옳을 수 있고 엑스프레스 소총은 그의 말 그대로의 성능을 발휘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그 총을 아프리카 사냥감을 잡는데 사용해본 적이 없었다. 나 또한 한 번도 사용해본 적이 없어서 그의 주장에 강력히 반대할 수 없었지만 나는 무기에 관한 내 경험을 말해 줄 수 있었다. 비록 총알이 엑스프레스의 강력한 힘으로 동물을 관통했는지는 몰라도 첫발에 사냥감을 쓰러뜨리는 데는 거의 항상 실패했었다고 알려주었다. 오히려 리빙스턴 박사와 여행할 때, 박사가 빌려준 무거운 라일리 소총을 가지고 사냥을 나가서는 거의 매번 동물 한두 마리를 잡아서 캠프로 가져왔었고, 프레이저Fraser 총알은 충실히 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알려주었다. 그 젊은 사냥꾼의 손에 랭커스터나 라일리가 있다면 스피크 대위와 사무엘 베이커Samuel Baker 경의 솜씨가 더는 경탄의 대상이 아니다. 그가 손만 떨지 않는다면 단 몇 번의 시도로 그들의 솜씨를 능가하지는 못해도 흉내 낼 수는 있다. 그리고 이 단락은 궁극적으로 이 말을 전달하기 위해 쓰였다 할 만큼 중요한 점은 아프리카 사냥감은 소위 ‘뼈 분쇄기bone-crusher’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평범한 카빈총은 어떤 대상도 충분한 관통할 능력이 있지만, 아프리카 탐험가에게 필요한, 사냥감을 무력하게 만드는 능력은 갖추고 있지 않다.

바가모요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영국 영사가 1870년 11월 1일 리빙스턴을 구하려 파견한 ‘리빙스턴 카라반’을 방문하러 무쏘우디Mussoudi에 있는 그들의 캠프에 갔다. 그들의 짐은 35개였고, 우니아니엠베까지 짐을 운반할 짐꾼이 짐의 개수만큼 필요했다. 이 카라반의 호위병은 요하네스Johannese와 와히요우Wahiyow 부족원 일곱 명으로 구성되었다. 그 중에 네 명은 노예로 부렸다. 그들은 여기에서 호의호식하며 지냈다. 사명감이 투철하지 않았고 임무의 결과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었다. 이들이 바가모요에서 지금껏 한 일을 나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것은 그들의 내재된 악의적 성향을 마음껏 탐닉하는 짓에 불과했다. 짐꾼이 없다는 말은 말도 안 되는 뻔뻔한 핑계일 것이다. 라마단이 끝난 1870년 12월 15일부터 지금까지 내륙을 향해 출발한 카라반이 적어도 15개는 있었다. 그런데 ‘리빙스턴 카라반’은 이 작은 마을 바가모요에 11월 2일에 도착한 후 2월 10일까지 100일 동안이나 35명의 짐꾼이 없다고 퍼질러 있다. 영사의 영향력이라면 그 정도는 이틀 안에 구할 수 있었다.

바가모요 날씨는 정말 즐길 만했다. 잔지바르 날씨와 비교하면 모든 면에서 훨씬 더 좋았다. 우리는 야외에서 잘 수 있었고 매일 피로에서 회복하고 상쾌하게 일어나 이른 해수욕을 즐겼다. 그러는 사이 이미 해는 떠올랐고, 우리는 내륙으로 떠날 준비에 전념했다. 여러 사건으로 캠프는 조용할 날이 없었다. 우니아니엠베로 떠나는 아랍인들이 방문했고, 우스꽝스러운 소동이 벌어졌고, 때때로 순종하지 않는 대원 때문에 군법회의가 열렸고, 파쿼와 쇼가 권투시합을 하다 너무 과열돼 신중히 중재해야 했고, 킨가니Kingani 평원과 강으로 사냥을 나갔다. 늙은 제마다르와 그를 따르는 발루치Baluch 족 한 무리와 사교적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는데, 그들은 끈질기게 마시카가 곧 닥칠 것이라고 내게 경고했고, 최상의 방책은 여행에 적합한 계절이 끝나기 전에 서둘러 떠나는 것이라고 충고했다.

탐험대에 고용된 대원 중에 힌디 두 명과 고아[인도 남서 해안에 있는 옛 포르투갈 영토] 사람 두 명이 있었다. 그들은 아프리카 내륙이 온통 코끼리 상아로 뒤덮여 있는 엘도라도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상상력이 극에 달하자 자신들만의 작은 사업을 착수하려 뭉쳤다. 그들의 이름은 자코Jako, 압둘 카데르Abdul Kader, 분데르 살람Bunder Salaam, 아란셀라르Aranselar였다. 자코는 목수와 조수로 내 시중을 드는 일에 고용되었다. 압둘 카데르는 재봉사로 분데르 살람은 요리사로, 그리고 아란셀라르는 우두머리 집사로 고용되었다.

그러나 직관력이 있는 아란셀라르는 내가 엄격한 고용주일 것을 예감하고 시간이 있을 때면 어떻게 고용 관계를 벗어날지 궁리하는데 몰두하는데 시간 대부분을 바쳤다. 그는 잔지바르에 있는 친구들을 만나러 가겠다며 허가를 요청해서 받아냈다. 이틀 후 나는 그가 오른쪽 눈을 맞았다는 연락과 그것이 사실이라는 진단서를 받았다. 세이드 부르그하쉬 술탄의 주치의인 크리스티Christie박사가 발행한 진단서에는 그가 부상했다는 사실과 부상의 정도가 쓰여있었다. 그의 친구들도 같은 짓을 하려 계획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사악한 흉계를 꾸며왔는지 확인하지 않았다. 그들이 임금을 선불로 다 받은 상태라, 그런 멍청한 짓을 삼가라고 엄중히 명령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어떤 날 밤에는 마부 한 명이 짐 꾸러미에서 뭔가를 훔치다 들켜서 도망쳤고, 나는 그가 정글로 들어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들판에서 추격을 벌였다. 그 일은 행군을 준비해야 하는 기간에 일어난 일 중 손꼽히게 재미있는 사건이었다.

지금까지 4차에 걸쳐 카라반을 내륙으로 파견했다. 이제 보트, 상자, 개인 화물, 약간의 천과 구슬을 운반해야 할 다섯 번째 카라반이 준비를 끝내고 내 지휘를 기다렸다. 다음과 같은 순서로 카라반이 출발했다.

1871년 2월 6일 – 바가모요에 탐험대 도착.
1871년 2월 18일 – 첫 번째 카라반 출발. 짐꾼 24명과 병사 3명.
1871년 2월 21일 – 두 번째 카라반 출발. 짐꾼 28명, 추장 2명, 병사 2명.
1871년 2월 25일 – 세 번째 카라반 출발. 짐꾼 22명, 당나귀 10마리, 백인 1명, 요리사 1명, 병사 3명.
1871년 3월 11일 – 네 번째 카라반 출발. 짐꾼 55명, 추장 2명, 병사 3명.
1871년 3월 21일 – 다섯 번째 카라반 출발. 짐꾼 28명, 병사 12명, 백인 2명, 재봉사 1명, 요리사 1명, 통역사 1명, 사냥할 때 총을 드는 하인 1명, 당나귀 17마리, 말 2마리, 개 1마리.

‘뉴욕 헤럴드의 탐험’과 관련된 카라반의, 모든 영혼을 포함한 구성원의 수는 192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