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2018
리빙스턴 박사를 찾아서: 10: 우코논고의 음레라로 3
다음 날 아침 행군을 시작하려다 두 명이 도망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을 잡기 전에는 돌아오지 말라는 명령과 함께 즉시 바라카Baraka와 봄베이Bombay를 사라진 아스마니와 킨가루를 잡아오라고 우니아니엠베로 파견했다. 독자가 기억할 지 모르겠지만 이것으로 킨가루의 도주는 세 번째다. 추적이 계속되는 동안 우리는 이네수카의 마을에 머물렀다. 이것은 또한 쇼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저녁에 구제불능 도망자들이 잡혀 왔다. 그들은 실컷 채찍질을 당하고 쇠사슬에 묶였다. 앞으로 그러겠다는 위협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 이상의 유혹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봄베이와 바라카는 그들을 잡게 된 생생한 이야기를 전했다. 나는 매우 기분이 좋아, 좋은 천을 상으로 주었다.
다음날 아침 다른 짐꾼 한 명이 종적을 감추었다. 그는 임금으로 받은 새 천 15도티와 총 한 자루를 가지고 갔다. 그러나 우니아니엠베 근처에 조금이라도 더 머무는 것은 위험한 짓이었다. 이곳을 빨리 떠나 남쪽 밀림 지역으로 가면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독자들은 내 탐험대 안에 대단한 재봉사 압둘 카데르가 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는 위대한 아프리카 내륙에서 상아로 엄청난 부를 얻게 되리라는 희망찬 전망으로 바가모요에서 탐험대에 합류했다. 이날 아침 압둘 카데르는 우리 앞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소식에 겁을 먹고 탐험대에서 빼달라고 간청했다. 아파서 더는 갈 수 없다고 맹세했다. 나도 그가 지긋지긋했기 때문에 천으로 남은 임금을 청산해 주고 떠나라고 했다.
카세게라Kasegera를 향해 반쯤 갔을 때 마브루크 살레엠Mabruk Saleem이 갑자기 아팠다. 나는 감홍[하제나 살균제용 염화 제1수은] 1알과 브랜디를 조금 먹여 그를 치료했다. 그리고 그가 걷지 못해서 당나귀를 제공했다. 자이디Zaidi라는 대원은 류마티즘으로 열이 많이 났다. 쇼는 타고 가던 짐승의 등에서 두 번이나 굴러 떨어졌다. 다시 당나귀에 오르게 하는데 무한 번의 구슬림이 필요했다. 진정으로 내 탐험에 불운이 따라 붙었다. 운명의 신은 우리를 다시 돌려보내기로 작정이라도 한 것 같았다. 정말로 모든 일이 엉망진창이 될 것 같았다. 우니아니엠베 떠나 15일만 행군할 수 있어도 어떻게든 목적을 달성할 텐데!
우리가 도착한 날 오후와 저녁에 카세게라Kasegera에서는 크게 기뻐할 일이 벌어졌다. 떠났던 사람들이 해안에서 방금 돌아왔다. 돌아온 젊은이들은 화려한 장신구와 새 바르사티 천, 소하리 천, 번쩍거리고 긴 새 카니키 천 등으로 장식해서 눈부시게 빛났다. 그들은 화려한 차림으로 갑자기 등장하려 덤불 뒤에 숨어 덤불 뒤에서 치장을 한 것이었다. 여자들은 바쿠스 신의 여사제라도 되는 양 이성을 잃고 그들을 반겼고 그날 오후 내내 큰 소리로 열정적으로 노래를 불렀다. 요정 같은 계집아이들은 그들의 얼굴에 홀린 듯 탄복하며 젊음이 충만한 영웅들을 올려보았다. 나이 든 여자들은 그들을 어르고 어루만졌다. 지팡이를 짚은 등이 굽은 족장들은 그들을 축복했다. 이것은 우니암웨지에서 명예이다! 운이 좋은 이 젊은이들은 모두 다음날 동틀 무렵까지 큰 바다와 잔지바르 섬의 다른 이름인 ‘운구자Unguja’ 섬에서 보았던 진기한 것들을 전하기 위해 계속 입을 놀려야 했다. 그들은 어떻게 그들이 위대한 백인의 배와 많은 백인을 보았는지, 사나운 고고족의 땅을 지날 때 어떤 모험과 시련을 겪었는지, 그리고 지금쯤 독자들과 내가 잘 알고 있는 여러 사실을 이야기 했다.
[9월] 24일 우리는 캠프를 철거하고 남남서쪽에 있는 임비티imbiti의 숲을 통과해서 행군했고 약 세 시간 만에 키간두Kigandu에 도착했다.
음카시와의 딸이 통치하는 마을인데 우리는 입구에서 통행료를 내기 전에 들어올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우리는 통행료를 낼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키간두 왼쪽으로 1마일 떨어진, 폐허가 되어 쥐들이 들끓는 보마에 캠프를 칠 수 밖에 없었다. 비겁한 원주민들이 곤경에 처한 음카시와를 버렸다며 우리를 꾸짖었다. 우리는 전쟁에서 도망쳤다는 비난을 받았다.
우리 캠프 문턱에서 쇼는 당나귀에서 내려오려다 등자를 놓쳐서 얼굴을 바닥에 처박으며 떨어졌다. 이 멍청한 녀석은 뜨거운 땡볕 아래 꼬박 한 시간을 그대로 누워있었다. 그러다 내가 쌀쌀맞게 좀 불편하지 않냐고 묻자 일어나더니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쇼, 돌아가고 싶으냐?”
“보내주신다면, 가고 싶습니다. 저는 더 이상 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당신이 관대히 허락한다면 간절히 돌아가고 싶습니다.” “쇼, 그렇다면 나는 네가 돌아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내 인내심도 바닥이 났다. 나는 네가 그렇게 가슴에 품고 몰두하는 자잘한 불행들 위로 너를 들어 올리려 무지 애썼다. 너는 그저 건강 염려증일 뿐이다. 네가 스스로 아프다고 믿으면, 분명히 누구도 너를 아프지 않다고 설득하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을 명심해라. 우니아니엠베로 돌아가는 것은 곧 죽음이다! 네가 크위하라에서 앓아 눕게 된다면 누가 알아서 네게 투약하겠느냐? 네가 발작을 하거나 의식이 없다고 생각해봐라. 이 병사 중 누가 네가 원하는 것, 네게 유익한 것, 필요한 것을 알겠느냐?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너는 돌아가면 죽는다!”
“아, 어쩌면 좋습니까? 이곳에 오는 모험을 하지 않았더라면! 아프리카에서의 삶이 이것과는 무척 다를 줄 알았습니다. 그래도 당신이 허락한다면 돌아가고 싶습니다.”
다음날에는 행군하지 않고 쇼를 크위하라로 돌려보내기 위한 수송 계획을 세우고 필요한 것들을 준비했다. 튼튼한 들것을 만들었고, 키간두에서 들것을 운반할 건장한 짐꾼 네 명을 고용했다. 그리고 길을 가며 먹을 식량으로 빵을 구웠고 물통을 차가운 차로 채웠고 염소 새끼 다리 한 쪽을 구웠다.
떠나기 전날 밤을 쇼와 함께 보냈다. 쇼는 내가 잔지바르에서 사주었던 아코디언으로 몇 곡 연주했다. 비록 그것은 10달러짜리에 불과했지만, 나는 그날 밤 그 악기로 연주된 소박한 곡들은 천상의 선율들이었다고 생각했다. 자리를 파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연주한 음악은 ‘즐거운 우리집 Home, sweet Home’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