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0/2020

시칠리아 여행: 31: 몬레알레: 팔레르모 가는 길





389번 버스 정류장인 용의 분수fontana del drago로 왔다. 오늘도 용님은 출타 중...^^ 

성당의 오후 관람이 시작된 지 한 시간 밖에 안돼서, 이 시간대 버스가 한산하리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 이미 버스정류장에 사람들이 한 바닥 모여있다. 만원 버스를 피하기는 틀렸고, 제 시간에나 오면 좋겠다. 하지만 오늘도 역시 버스는 제시간에 오지 않는다.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다 오지 않는 버스에 초조해진 호주 부부와 이야기를 텄다. 지난 번에도 40분쯤 늦었다, 늦게라도 오긴 오는 것 같더라 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부인의 자매가 서울에서 3년을 살았는데, 그 때 열흘 동안 서울을 여행한 적이 있단다. 한국에 사는 가족 덕분인지 한국에 관한 이야기를 꽤 들었나 보다. 

팔레르모가 어땠냐고 묻는다. 글쎄...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선뜻 못하니, dirty? 라고 되묻는다. 거침없이 신랄한 것은 나라를 불문하는, 아주머니의 특성인가보다. 시원시원하시다. 엊그제 본 발라로 시장 뒷골목의 혼돈이 생생한데, 어떻게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시칠리아 사람은 아닌데, 변명의 여지가 없다. 웃을 수 밖에... 아주머니 성격을 진작에 알아보기는 했다. 아주머니가 내게 큐queue에 있냐고 물어서 시작된 대화였다. 미국 사람은 줄을 큐라고 하지 않으니, 미국 사람 아니지요? 라고 물으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절대 아니란다. 미국 사람이라면 누가 잡아가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강력하게 부인을 하다니... ^^ 물론 내가 누가 봐도 미국 사람이 아니라서 더 솔직했겠지만, 그렇게 노골적으로 그 나라에 대한 감정까지 실어 그 나라 국민이 아님을 표현하는 사람은 흔치않다. 나도 허구한 날 오해 받기 싫은 나라 출신으로 오해를 받다보니, 허구한 날 미국인으로 오해받았을 아주머니의 표현이 너무 공감된다. 그래도 나는 그렇게 까지 솔직하게 부인하지는 않는다. 나만의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 아주머니가 청소 캠페인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단다. 나도 제발 청소는 좀 하고 살자고 말하고 싶었던 적이 많았다. 서울은 어땠냐고 물으니 아주 좋았다고 말한다. 아름다운 도시라고, 그리고 very clean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생활 환경의 청결을 특히나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기본적으로 병에 걸리지 않을 정도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요즘 들어 차츰 더 중요하게 여기려 하고 있다. 절도 있는 생활이 좋아졌고, 절도의 첫 단계는 청결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

한 달 여행했고 내일 집에 간다 했더니, 아주머니가 이곳을 혼자 여행하겠다 생각한 것을 보면 굉장히 용감한가 보다 한다. 시칠리아에서 내내 들었던 말이라 준비된 답으로 대응했다. 오기 전에는 많이 걱정했는데 와서는 안전해서 맘 편히 다녔다고, 이 섬에 대한 호러 스토리가 많은데 왜 그렇게 말하는지 모르겠다고... 아저씨도 자신도 잘 모르겠다고 맞장구를 친다. 시칠리아 사람들이 굉장히 친절하고 뭐든 물으면 잘 알려주더라고 한다. 계속 대중교통으로 다녔냐고 묻는다. 그랬다고 하니까, 아주머니가 굉장히 영리하다고 말한다.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고, 다만 버스 정류장과 입구를 찾기가 좀 어려웠다고 했다. 어떨 때는 동네 사람들도 잘 몰라서 엉뚱하게 알려주더라고 했더니, 아저씨도 같은 경험을 했다며 일화를 말한다. 아주머니가 그래도 다 찾아 다니지 않았냐고, 그러니 영리한 거라고 한다. 아마도 길을 천 번은 물어봤을 거라고 했다.^^ 어제 마씨모 극장에서 오페라를 봤다고 하니까 아주머니는 그저께 라 트라비아타를 봤다고 한다. 호주에서 두 달 전에 미리 표를 예매해 두었단다.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어땠냐고 묻는다. 전통적 무대장치 없이 스크린 속 애니메이션과 배우들이 interaction하는 것처럼 꾸민 무대가 인상적이었다고 말을 했는데 뜻이 잘 전달됐을까 의문이 남는다. 이놈의 영어... 어디에 묵느냐고 묻는다. B&B에 묵는데 아주 좋다고 하니, 자신들은 호텔에 묵는데 들어보니 B&B가 더 평이 좋은 것 같다고 한다.

동문, 동향, 동포라는 것만으로 순간적 동질감을 느끼듯 같은 여행자라는 이유만으로 느끼는 동질감도 있는 것 같다. 그들과 잠깐 잠깐 나누는 수다가 재미있다. 아저씨는 세상 누구하고도 친구하는 유쾌한 사람 같고, 아주머니는 새침한 깍쟁이 분위기인데 마음이 좋은 것 같다. 버스 안에서 누군가 소매치기가 있으니 조심하라고 귀띔해줬다며 계속 내 소지품을 챙겨준다. 짧고 억센 반백의 머리카락에 콧수염이 있고, 메리야스로 보이는 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짙은 피부에 단단한 체구의 중년의 아저씨. 무엇을 보고 집시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집시라고 한다. 그 동안 봤던 집시는 마르고 길고 검은 머리에 눈이 깊은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이었는데... 버스 타고 오는 내내 수시로 그 아저씨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 쓰다 보니 어느새 팔레르모에 도착했다.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 잠깐 스치는 인연이지만 접시를 완성하는 좋은 양념같다.






엊그저께 괜한 객기와 구글 지도 앱의 말썽으로 팔레르모의 숨겨진, 아니 드러내놓고 자랑하지 않는 얼굴을 보았다. 빈민촌인지 아니면 보통사람들이 사는 지역인지 모르겠지만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꽂히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눈에 띄는 내 탓이지 어떤 의도가 있는 시선은 아닌 것 같았다. 험악하지만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분위기. 험악한데 위협적이지 않은 느낌... 그 길을 걸어봐야 알 수 있는 느낌일 것 같다. 그런데 길이 정말 더러웠다. 대체로 시칠리아의 거리가 지저분하지만 그곳은 냄새도 심하고 특히 더러웠다. 안전하게 발 디딜 곳을 찾으려 저절로 땅만 보고 걷게 됐다.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오래 전에 읽은 시칠리아 여행기의 제목이다. 작가의 명성에 기대가 컸는지 인상적이지 않은 것이 인상적이었던 여행기... 다른 건 기억이 안 나는데 제목만은 기억이 나서, 종종 무슨 이유로 그렇게 말했을까 궁금했었다. 그들은 과거에 연연하지 않으며 그냥 현재 주어진 삶을 나름대로 잘 살아 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 사회의 깊숙한 문제들이야 관광객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니 모르겠고, 내 눈에 비친 시칠리아는 열심히 살아보려는 여느 나라와 달라 보이지 않는데 왜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는 건지...

그런데 어제, 골목길을 걷다 그곳 사람들에게 그 말을 해주고 싶었었다. 몇 백 년의 역사가 까맣게 잊혀졌다 최근 알려지게 됐다는 이야기를 몇 번 들었다. 최근 20세기 들어 옛 건물을 복원하거나 개발하는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또는 어떤 외국 학자에 의해 발굴돼서 알려지게 됐다는 이야기... 문자가 없던 시절도 아니고 수세기의 역사가 기록도 하나 없이 한두 세대를 지나며 없었던 일처럼 잊혀졌다는 게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땅에서 사람들이 살기를 멈춘 적이 없었는데... 너무나 더러운 거리... 역사를 잊으며 수난도 영광도 모두 함께 망각의 강으로 흘러 들어갔나 싶었다. 삼가고 경계하며 살피지 않는 것 같은 삶... 자신을 귀하게 대하지 않고, 삶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뭔가 소중한 것을 잃은 결과로 보였다. 과거의 영광을 기억한다면, 자신들에게 어떤 피가 흐르는지 알고 있다면,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잃었는지 기억해 낸다면 이렇게 살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들의 기억을 일깨우고 싶었다...

그런데 어제 했던 생각을 떠올리다 뭔가 목에 콱 걸리는 것 같다. 영광의 주인공들이 이 땅에 거주했던 것은 맞지만 이들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시칠리아 사람들이 과거의 영광과 유산을 자신의 것이라 생각할 수 있을까? 이 땅에 남아있는 유산에 시칠리아 사람들이 자랑스러워할 만한 정신이 담겨 있을까? 시칠리아 사람들이 과거의 유산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며 스러지도록 방치한 데는, 무지와 궁핍을 넘는 어떤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