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오늘도 방 벽을 뚫고 온 거친 목소리에 잠이 깼다. 이 새벽에 통화를 하는 곳은 어디며 무슨 사무이길래 저렇게 열띤 대화가 오가야 하는지... 왠지 러시아어일 것 같은 느낌이다. 반짝반짝 빛나는 빡빡머리와 손에 끼워진, 유사시에 무기로 사용될 것같은, 거대한 반지와 굵은 금 목걸이. 시칠리아 마피아와의 업무 협의차 출장 온 러시아 마피아라는 것이 창의성 없는 내 상상력이 내린 결론이다. 시칠리아도 역시 소박하고 따뜻하고 친절한 사람들이 사는 곳임을 한 달 내내 두 눈으로 확인했어도, 마피아라는 단어는 까맣게 잊혀진 듯하다가도 기회만 있으면 불쑥 떠오른다. 한번 드리워진 의심을 거두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것이구나 싶다.
내 방 창으로는 밖이 보이지 않는다. 나오며 식당에 들러 창을 열고 아침 해를 등진 마시모 극장을 카메라에 담았다.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고, 이 순간에 미련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몬레알레에 가는 길이다. 시칠리아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을 고민 끝에 몬레알레에서 보내기로 했다. 덥기는 해도 바람은 시원하다. 며칠 사이 거짓말처럼 날씨가 변했다. 아그리젠토에서 만났던 토니가 9월 말부터 날씨가 좋아진다 했었는데... 다음에 또 팔레르모에 온다면 오늘 9월24일에 도착하기로 한다.^^ 하지만 다시 온다면 이런 결심을 까맣게 잊고 아무 때나 상황에 맞는 날에 오게 될 것이다. 얼마나 쉽게 약속과 결심을 하고, 했던 약속과 결심을 얼마나 쉽게 잊고 살아 가는지...
몬레알레 가는 버스는 두 종류가 있다. 중앙역 앞(Fermata AST - Stazione Centrale, Piazza Giulio Cesare)에서 타는 AST 버스와 인디펜덴자 광장에서 타는 AMAT 버스의 389번. AST버스는 일종의 좌석/고속 버스이고, AMAT 버스는 팔레르모 시내 버스. AST 버스가 좌석/고속 버스라지만 중간중간 서는 것도 마찬가지고 걸리는 시간도 비슷하고 정류장도 성당에서 조금 더 멀다. 어딘가에서는 안전을 이유로 AST 버스를 권하던데, 지난 번에는 동선 상 시내버스 정류장이 가까워 시내버스를 탔고, 오늘은 익숙해서 시내버스를 타기로 했다. [몬레알레 가는 길 참고]
여유 있게 나왔더니 20분은 충분히 낼 수 있을 것 같다. 가다가 카페가 나오면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가자 했다. 마침 포르타 누오바porta nuova 바로 밖에 카페가 하나 있다. 아란치나와 카페라떼를 시켰다. 이곳 아란치나는 아란치나에 대해 안 좋은 편견을 갖게 할, 잘 못 만든 아란치나의 전형이다. 기름이 줄줄 배어 나온다. 잘 튀겨진 아란치나는 보송보송하다. 그런데 커피는 의외로 너무 맛있다. 카페 라떼를 시켰는데 우유와 커피를 따로 주길래 뭘 그렇게 유난을 떠나 했는데, 맛있다. 향도 좋고 시칠리아에서 마신 카페 라떼 중에 간이 제일 잘 맞는다.
뒤에서 중국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직원과 어떤 여자가 이야기를 한다. 나를 두고 하는 이야기 같은데 무슨 이야기인지는 모르겠고 왠지 기분이 나쁘다. 중국사람 아니거든, 그 입을 좀 다물지 라는 뜻을 담아 힘껏 노려봤다. 그랬더니, 봐라, 쳐다본다 라고 까지 한다. 저것들이... 자신들의 말을 얼추라도 알아듣는 중국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에서 나온 행실이겠지... 테이블에 냅킨이 없다. 일어나 옆 테이블에 놓인 냅킨통에서 몇 장을 꺼내 오니, 뒷담화를 즐기던 직원이 친절한 척 웃는 얼굴로 그 냅킨 통을 재빨리 내 탁자로 옮겨준다. 고맙다고 인사를 했지만 훈련된 예의범절일 뿐 하나도 고맙지 않다. 그런데 사실 나도 소싯적에 우리말을 못 알아듣는 점을 누군가를 흉보는 것에 많이 활용했다.^^ 그래 즐겨라... 기꺼이 모닝 커피에 곁들이는 비스킷이 되어주마...
버스 정류장에 왔더니 벌써 몬레알레행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한 바닥 서 있다. 버스에 오르기 전 만반의 준비를 했다. 가방에 자물쇠도 채우고 카메라도 고리에 걸어 가방과 연결했다. 관광객이 많이 타는데, 시내버스라 차비도 싸서 소매치기들이 많이 활동한다고 하는 버스다. 그리고 경악~ 믿거나 말거나 하는 상황이다. 지난 번 몬레알레 가는 길에 불량한 인상을 풍기며 나를 긴장시켰던 사람이 내 앞에 서 있다. 그날과 같은 차림새다. 기지 바지에 허름한 드레스 셔츠, 그리고 한 손엔 비닐 봉지, 다른 손엔 폼으로 들고 있는 발 네 개 달린 환자용 지팡이. 그는 보행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난 또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지난 번에는 오후였고 오늘은 아침인데, 그렇다면 이곳에 상주한다는 뜻??? 수시로 적당한 사람을 물색하는 것은 아닐까?
이 정류장은 몬레알레 행 버스의 종점이 아니라 두 번째 정류장이다. 그런데 매표소에 붙은 시간표는 종점 시간표다. 그러니 버스는 늘 시간표대로 오지 않는다. 하지만 관계자들은 외국인 여행자에게 그런 디테일을 설명해 주는 수고를 하지 않는다. 몇 분쯤 기다린다고 큰 일이 나는 것도 아닌데, 먼저 출발할 일은 없으니 됐지 뭐 하는 것 같다. 지난번엔 이런 상황을 몰라 초조히 기다렸지만, 이제는 느긋하다. 아침 출근 길이라 교통량이 엄청나다. 이 정류장에 도착해야 할 시간 보다 5분이 늦었는데 버스는 아직 안 온다. 작은 미니 버스가 선다. 시내 역사적 장소를 돈다는 무료버스다. Free Express와 Free Centro Storico라는 관광객을 위한 무료 버스가 있다는 말을 들어보긴 했지만 보기는 처음이다. 그런데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은 한 명도 그 버스를 타지 않고, 연세 든 동네 아주머니 아저씨만 잔뜩 탄다. 아마도 까포나 발라로로 장보러 가시는 길이 아닐까...
좀 전에 대 활약을 펼치며 나를 긴장시켰던 마음 속 악마는 오늘도 석고대죄를 드려야 할 듯 하다. 그 아저씨는 오늘도 다른 버스를 타고 먼저 출발한다. 그렇다면 무슨 인연이라 이 버스 정류장에 올 때마다 보이는 거지?
버스는 거의 20분이나 늦게 도착했다. 버스가 오는 게 보이자 사람들의 행동이 볼 만 하다. 정류장 근처에 적당히 서있던 사람들이 길가에 길게 자리잡더니 버스 기사에게 제 앞에 멈추라고 손짓을 한다. 버스 처음 타보는 것? 세상 자기중심적인 사람들 여기 또 있네 싶다. 버스 기사는 서라는 곳에 서지 않는다. 서고 싶은 곳에 선다. 나도 오늘은 빨리 타서 자리를 잡고 싶다. 세상이 제 뜻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밀려 서서 가면서, 사람들의 생각 속에만 존재할 지도 모르는, 소매치기로 추정되는 사람들과 눈치작전을 벌이기 싫다. 버스 좀 타 본 사람이면 버스가 어디쯤 정차할 지 감이 온다. 내가 그런 능력을 아무데서나 보여주지는 않는데 오늘은 좀 발휘를 해야겠다. 자리를 잡았다. 그렇지... 버스가 내 앞에서 선다. 기사에게 당당히 손가락질로 명령을 내리던 사람들이 허둥지둥 내 뒤로 몰린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