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8/2020

시칠리아 여행: 27: 체팔루: 아침



평소에도 귀마개를 종종 챙겨 다닌다. 공공 장소에서 도움이 될 때가 있다. 이번에도 짐을 싸며 습관적으로 챙기긴 했지만, 필요할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필요한 순간이 있었고, 어젯밤에도...

너무 피곤해서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파도 소리에 깼다. 물결이 밀려와 해안에 부딪히는 소리가 으르렁거리는 짐승 소리 같이 사납다. 파도 소리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생전 처음 아닐까? 열어 두었던 창문을 닫아봤지만 소용이 없다. 어제 숙소에서 썼던 귀마개는 버렸고 챙겨온 것은 어디다 두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귀찮아서 그냥 자볼까 참을 청하지만 소리는 더 사납게 들린다. 할 수 없이 일어나 짐을 뒤져 귀마개를 찾았다. 점성 있는 스폰지를 최대한 길고 단단하게 뭉쳐 귓속 깊숙이 찔러 넣었다. 뭉쳐졌던 스폰지가 부풀어 오르며 귓속 공간을 빈틈없이 메우며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파도 소리가 잦아들면 평화가 찾아올 줄 알았는데 이제 화장실 불이 문제다. 충전할 곳이 night stand 용 콘센트 밖에 없어 나이트 스탠드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불을 다 끄고 자기는 싫고, 침실 불을 환히 밝히고 잘 수도 없다. 그래서 화장실 불이라도 켜놓자 했던 건데, 깜빡거리기 시작한다. 너무 거슬리는데 꼼짝도 하기 싫어 그냥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섬광이 느껴지는 와중에 왠지 저 불빛이 어떤 배에게 등대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옛 항구porto vecchio로 인도하는... 그리고 잠이 들었다.


아침.

눈을 뜨니 어제 밤보다는 순하게 들리지만 파도 소리는 여전하다. 바닷가에 앉아 노을 지는 하늘을 보며 듣던 파도 소리는 그렇게 좋았는데, 밤새 창문 밑에서 철썩거리며 잠을 설치게 했던 소리가 눈에 보인다면 며칠 감지 않은 채 마구 헝클어지고 여기저기 뻗쳐있는 머리카락같이 생겼을 것 같다. 말이 곱게 나오지 않는 걸 보니 어제 잠을 방해한 것에 대한 원망이 남았나 보다.^^ 

창문을 열었다. 파란 하늘과 오렌지 색 지붕의 건물들, 바위에 부딪혀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을 보며 소리를 들으니 생각이 달라진다. 이렇게 적절한 효과음이 없다. 이런 호사가 황공하다. 사실 잠을 설친 이유가 파도소리라는 것 또한 층간소음으로 잠을 설쳐야하는 도시인에게는, 곧 그리워질, 너무 과분한 호사다.

체력이 많이 떨어지긴 한 것 같다. 어제는 중국집 조미료 탓인지 아니면 탄수화물 탓인지 오후 내내 너무 피곤하고 갈증이 났다. 500cc 물을 한 번에 마셨다. 여학생이 생맥주 500을 한 번에 들이키고 호기롭게 잔을 탁 내려 놓으면 박수와 환호성이 터지던 젊은 시절에도 나는 그래 본 적이 없다. 좀체로 할 수 없는 일이었던지라... 그런데 물 500이 단숨에 마셔지다니... 신기했다.

지금도 계속 파도가 철썩댄다. 나갈 준비를 끝냈다. 아침 먹고 카스텔부오노castelbuono에 다녀와서 성당 다시 보고, 골목길 걷고, 일찍 들어와서 테라스에서 노을 보고, 내일은 타운 안에서 빈둥거리며 그 동안 여행을 정리해보고 싶다.

체팔루는 너무 아름다운 마을이다. 이곳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 하지만 머무는 여행을 이해하지 못하면 별로 볼 것 없는 단조로운 작은 마을로 느껴질 수 있을 것 같다. 여행의 막바지에 쉬자는 생각으로 이곳에서 3일간 머물 계획을 했지만 기운이 있는데 굳이 쉴 필요는 없는 걸로... ^^ 생각 같아서는 카카모caccamo, 간지gangi, 바게리아bagheria 모두 가고 싶지만 자제해서 카스텔부오노만 다녀오기로 했다. 그곳 성에 세르포타giacomo serpotta가 장식한 아름다운 예배당이 있다.




카스텔부오노에 가는 첫 차는 7시 40분이라 너무 이르고, 다음 차는 11시. 아침 먹고 가면 될 것 같다. 나오기 전 숙소 옥상에 있는 테라스에 들렀다.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해변을 보고 싶었다. 햇빛이 소상히 모든 것을 비추니 테라스는 어제 밤과 느낌이 사뭇 달랐다. 햇빛에 바랜 낡은 테이블과 의자가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허름한 건물 옥상이었다. 하지만 옥상의 삭막함이 그곳에서 보이는 풍경의 아름다움을 훼손할 수는 없다. 때로 적당히 눈 감고, 못 본 척, 못 들은 척할 줄 아는 마음에 세상이 아름답게 비칠지도...






피끼디노, 피코디노, 피끼디니아, 피끼딘디아 등등 우리나라 백년초 같이 생긴 선인장 열매를 부르는 이름이 많은지, 아니면 정확한 이름을 다들 잘 모르는 건지, 아니면 내가 잘 못 알아 들은 건지... [정확한 이름은 피끼딘디아fichi d'india. 인도의 무화과라는 뜻] 아무튼... 기차역 방향으로 걷는데 생과일 주스 바가 있다. 신선한 과일과 채소가 고파서 반가운 마음에 메뉴를 읽어보니 피끼딘디아와 멜론을 섞은 주스가 있다. 피끼딘디아를 얼마나 먹고 싶었는데... large로 시켰다. 어렴풋이 풋내가 나서 멜론 말고 다른 것이 들었다는 것은 알겠는데 여전히 맛은 멜론이 지배한다. 맛 없다는 뜻은 아니다. 엄청 맛있다. 햇빛에 잘 익은 멜론은 꿀물처럼 달다. 재료 그대로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은 맛. 5유로가 전혀 아깝지 않다. 한국에서는 생과일 주스를 거의 마시지 않는다. 대부분 설탕으로 단맛을 보충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어떤 생과일 주스든 인공적으로 단맛을 보충하려 하지 않고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그대로 주는 것 같다. 음식을 입맛에 맞추려 하지 않고, 좋은 재료로 만들었으니 네 입맛을 음식에 맞추라는 당당한 요구. 그래서 때로 맛이 없지만 나쁘지 않다. 그래야 미묘하고 다양한 재료 본연의 맛을 익히고 또 그대로 즐길 수 있게 될 테니까...




체팔루의 평면 구조는 중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이 여행의 여정에서 카타니아가 1693년 대지진으로 파괴되어 다시 건설된 도시로는 마지막이었다. 타오르미나에서도 재건된 도시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있었다. 재건된 바로크 도시들도 지진으로 파괴되지 않았다면 이런 분위기였겠구나 생각하니 글쎄 뭔가 안타까움이 스친다. 이곳도 바로크 도시들과는 다른 분위기가 있다. 과거와 같은 공간을 공유한다는 것...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와도 삶의 공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많은 걸 공감하겠구나 싶고, 세대간 단절이 없어 보이는 풍경의 한 열쇠이기도 하겠다 싶다. 어제 해질 무렵에 본 빨래터도 다시 보고... 기웃기웃 어슬렁거리는 기분이 좋다. 




바다 전망을 선전하는 바에 들어왔다. 카페 라떼를 시키니 카페 마끼아또냐 라떼 마끼아또냐를 묻는다. 카페 라떼는 보편적인 커피 메뉴이고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xx-마키아또는 엄연히 다른 커피 음료인데 왜 묻나 싶지만, 그 정도는 알아들으니 대처가 된다. piu latte di cappuccino, meno latte di latte machiato. 우유를 카푸치노 보다는 많이 라떼 마키아또 보다는 적게... 겨우 길 묻고 음식 주문하고, 숙소나 레스토랑 예약하는 정도의 이태리어지만 덕분에 여행이 훨씬 수월하다. 몰랐어도 어떻게든 다녔을 거고, 그 나름대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았겠지만, 스트레스도 엄청났을 것 같다. 아무튼 한때 무턱대고 열심히 이탈리아어를 공부했던 보람을 이번 여행에서 다 찾고 있는 것 같다.

바다를 온전히 볼 수 있는 발코니 좌석은 이미 부지런한 사람들이 다 차지했다. 그렇지만 실내 테이블에서 보이는 창틀, 문틀 안에 가구와 사람들과 더불어 담긴 바다 풍경도 나쁘지 않다. 여행 중에 가장 사랑하는 순간... 분위기 좋은 바에 앉아 아침 먹고 커피 마시고 책 보고 글 쓰는 시간... 입장부터 떠들썩한 단체 관광객들이 일어날 시간임을 알려준다. 




바닷가를 따라 역으로 가는 길. 아프리카에서 인상 깊게 봤던 나무처럼 크게 자란 선인장이 이곳 바닷가에도 있다. 유포르비아 인젠스euphorbia ingens 또는 촛대 나무candelabra라고 한단다. 아프리카 사바나 들판에 홀로 서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볼 수록 더 좋아진다. 이 식물에도 정이 들고 있나 보다. 해변은 벌써 해수욕을 즐기는 부지런한 사람들로 분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