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날... 마음은 담담한데 머리가 자꾸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시칠리아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좋은 곳에서 잘 먹고 싶다. 안내서와 구글 평을 참고해 신중히 식당ciambra restaurant을 골랐는데 분위기가 좋다. 보기 드물게 깔끔하고 모던한 레스토랑이다. 벽에 흑백 건축물 사진이 걸려있다. 멋있다. 사진 자체가 멋있다기 보다는 사진에서 느껴지는 생각이 멋있다. 사진이 또 다른 예술의 도구이지 실상을 복사하듯 모두 담는 기록의 도구가 아니라고, 자신의 철학과 미학에 부합하는 장면을 과감히 잘라내서 담으라고 말하는 것 같다. 자동 카메라로 그저 좋아서 좋아 보이는 대로 찍는 내 사진에는 철저한 기록 내지는 기억을 보조하는 수단이라는 철학이 있다고 해두자.^^
오뜨퀴진을 추구하는 식당이었다. 쟁반만한 흰 접시 중앙에 안티파스토antipasto로 시킨 해물 샐러드가 주먹만큼 담겨있다. 나머지 넓은 공간이 무안한지 노란색 소스로 휙 한 줄을 그었다. 그 접시를 받을 때부터 어떤 식당인지 알아보기는 했다. 프리모primo로는 감베로 로소gambero rosso로 채웠다는 토르뗄로니tortelloni였는데, 딱 다섯 개를 붉은 소스 위에 활짝 핀 꽃 모양으로 담고 그 위 중앙에 흰 거품을 꽃술처럼 올렸고, 어딘가에 민트 향이 들어갔다는 뜻의 민트 잎이 거품 위에 놓여 있다. 쟁반만한 접시에 손바닥만한 꽃 한 송이가 피었다. 역시 빈 광활한 공간에는 노란 줄이 한 줄 휙 그어져 있다. 아, 진짜... 여백의 미는 우리 거라고...^^ 빨간 소스의 정체는 새우로 만들었는지 랍스터로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비스끄였고, 거품에서는 민트향이 살짝 났다. 약간의 당황한 마음을 감추고 토르텔로니에 비스끄를 잔뜩 묻히고 거품을 얹어 먹으니, 오뜨퀴진다운 맛이다 싶다. 맛있다. 열다섯 개도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조금 큰 물만두만한 토르텔로니 한 개당 3유로, 회전 초밥 집 참치 뱃살 한 조각 정도는 되는 건가? 게눈 감추듯 먹었다. 포크질 다섯 번으로 한 접시를 끝내보기는 처음 아닌가 싶다. 남들이 몇 젓가락에 라면을 먹었느니 자장면을 먹었느니 할 때 한 번도 끼어보지 못했는데, 이제 나도 야, 나는 포크질 다섯 번에 파스타 한 접시 먹어봤다고 진실만을 말하며 한 자락 끼어들 수 있을 듯... 서빙하는 아가씨가 접시를 가져가려 한다. 소스에 마저 빵 찍어 먹을 것이라며 접시 사수. 빵으로 접시를 설거지하듯 닦아낸 후 돌려보냈다. 많이 서운해 보이는 양이었는데 막상 먹어보니 그렇게 서운하지 않고, 디저트를 위한 배가 남아서 오히려 좋다.
자르면 안에서 초콜릿이 주르륵 흐르는 초코케이크를 먹을까 티라미수를 먹을까 고민하다 홈메이드 티라미수를 시켰다. 달기가 적당하고 정말 맛있다. 후식의 달기가 내 입맛에 맞는 정도라면 이건 시칠리아에서 일종의 배신 아닐까... 파스타 한 판 접시에 퍽 쏟아주지 않고 예쁘게 담아 허브로 장식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양도 풀코스를 먹는다는 전제로 정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쁘지 않았다. 오뜨퀴진에 관심이 있었을 때였다면 감동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제 이런 음식에 그다지 감동하지 않는다. sophisticated 보다는 hearty가 좋고, 손 많이 들고 복잡한 소스로 맛을 내고 예쁘게 꾸민 음식 보다는 신선한 재료로 단순하게 만든 소박하고 건강하며 맛있는 음식에 감동한다. 좋은 재료로 만든 음식이라면 맛이 부족해도 마음으로 얼마든지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어느새 2시 18분. 아무래도 그냥 팔레르모로 돌아가기는 서운하다. 팔레르모에서 노르만 궁전의 왕실 정원과 산 프란체스코 성당을 보고 만찬을 할 생각이었으나 이곳에서 이른 만찬을 했으니 3시 40분 버스를 타도 될 것 같다. 계산하고 성당으로 가면 오후 관람이 시작됐을 것 같다. 한 시간만 열심히 보고 가기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