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4/2020

시칠리아 여행: 22: 카타니아: 카타니아 & 빌라 벨리니 공원



내 앞에 모두 굳게 닫혀있는 문... 상한 마음을 달랠 곳이 필요했다. 빌라 벨리니villa Bellini... 공원인데 한적하게 휴식을 취하기 좋은 곳이라 했다. 공원에서 한숨 돌리고, 근처에 숙소에서 알려준 아란치노 맛집pasticceria savia이 있으니, 아란치노나 먹자 했다.


[카타니아. 산토 에우플리오 사원 유적]


가는 길에 산토 에우플리오 사원 유적ruderi del tempio di sant'euplio이라는 곳이 나왔다. 교회가 있었던 곳인데 두 개의 벽과 터만 남았다. 로마시대 때 지하묘지로 사용된 곳인데, 4세기 카타니아 출신 순교자 에우플리오euplio의 감옥으로 사용됐던 곳이라서 그곳에 교회chiesa di sant’euplio를 지었는데, 1943년 연합군 폭격으로 무너졌다고 한다. 남아 있는 벽에는 열두 개의 조각이 붙어있는데, 12사도의 조각이라고 한다. 사도 조각 양쪽에 기둥이 서 있는데, 기둥 표면이 벗겨져 속에 든 벽돌이 드러나 있었다. 지금껏 봤던 아름드리(?) 기둥들이 모두 돌을 깎아 만든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어도 원기둥 속에 벽돌이 들어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벽돌도 충격적이지만 수많은 기둥을 보며 그 기둥이 무엇으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몰랐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는 무관심과 무심함의 자각... 지하 묘지 겸 예배당을 볼 수는 있다고 하는데 이곳도 역시 닫혀있다. 열렸다면 놀랐겠지... ^^




빌라 벨리니 공원은 유력 가문의 18세기 미로 정원을 확장해서 19세기 말에 공원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벨리니라는 이름은 그저 요절한 재능있는 예술가를 추모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생활 공간에 이런 공원이 있다면 엄청 감사하며 살겠지만, 한 도시를 반나절 만에 찍고 다니는 관광객에게 공원은 좀 심심하다. 유럽의 큰 도시에 하나쯤 있을 법한 평범한 공원이었다. 땅에 좌우대칭 도형을 그려 구역마다 꽃이든 나무든 각 잡고 줄 맞춰 심어 놓은 정원은 별로인데 이 공원은 적당히 자연도 느껴진다. 입구 계단을 오르면 분수도 있고 꽃 시계가 있다. 길을 따라 꼭대기까지 가면 테라스가 있는 작은 광장이 있고 광장 중앙에 리버티 스타일 (아르누보 스타일을 이곳에서는 그렇게 부른다) 키오스크가 있다. 키오스크가 이곳의 보물 같다. 주변 모든 것을 하늘하늘하게 보이도록 만든다. 머리를 올리고 잠자리 날개 같은 드레스를 입은 우아한 여인들이 담소를 나누는 장면이 떠오르지만 대신 관광객들이 삼삼오오 앉아있다.

광장 주변 벤치에 앉아 오전 일정을 핸드폰에 메모하다 성당 박물관과 로마 목욕탕을 보지 않았던 것이 생각났다. 그걸 보겠다고 굳이 오늘 아침에 갔건만 까맣게 잊고 성당 문을 나와 어시장으로 갔던 것이다. 나이 듦... 가장 절실히 느껴지는 증세가 건망증과 기억력인 것 같다. 부지기수로 냉장고 문을 열고 뭘 꺼내려 했지 하고 서있는 판에 놀랄 건 없는데, 속은 상한다. 목욕탕을 못 봐서인지 노화의 서글픔 때문인지... 누구나 늙는 것을, 호들갑 떨지 말자 하는데 늙는 서러움이 폭풍처럼 밀려와 흔들어대는 날이 있다. 뭐...

키오스크가 있는 광장이 이곳에 오는 이유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공원을 천천히 한 바퀴 걷자 싶어 길을 따라 가니 양쪽에 흉상이 늘어선 걷기 좋은 산책로가 있다. 그런데 그 길을 지나니 교양(?) 있는 분위기는 끝이다. 어수선하거나 공사가 한창이다. 공원의 방치됐던 반쪽을 정비하고 있는 것 같다. 오랜 기간 방치되어 있다 최근 정비를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 곳이 시칠리아 곳곳에 많이 있다. 몇 년 후 시칠리아는 정말 달라져 있을 것 같다.


공원을 나와 아란치노 맛집 사비아 쪽을 보니 사람들 무리가 있다. 유명하다더니 역시... 하며 가까이 갔더니 웬걸... 박물관도 아니면서 월요일에 문을 닫는다. 헛걸음한 사람들이 옆 가게로 몰린 것이었다. 너마저...




근처에 엄청 평이 좋은 햄버거 가게fud bottega sicula가 있다. 미국식 먹고 죽자 스타일 버거를 하는 집 같다. 햄버거 엄청 좋아하는데 잘 됐다. 닭도 좋아하면 꿩이 없다고 슬프지 않다. 힙하다는 표현에 딱 어울리는 식당이다.

야외 테이블에서 천사처럼 예쁘게 밥을 먹던 아기가 너무 화가 났다. 사단은 친구와 수다 삼매경이던 엄마가 아기는 아직 먹는 중인데 잘 살피지도 않고 접시를 무심하게 확 치운 것. 마지막 감자를 소스에 막 찍으려던 참이었는데... 아기가 울음으로 황당함을 표현하니, 엄마는 접시를 다시 돌려 줬고 아기는 울음을 그쳤다. 그런데 아기가 그 마지막 감자를 소스에 찍으려다 말고 그 자세 그대로 또 울음을 터뜨린 거다. 소스를 찍으려다 접시를 빼앗겼던 서러움이 다시 떠올랐나 보다.^^ 그러자 엄마가 냉정하게 접시를 치워버린다. 그러니 이제는 탁자를 두드리며 제대로 악을 쓰며 운다. 옆에 앉은 엄마 친구가 장난감을 주며 달래도 소용없다. 엄마가 아기 볼을 때리려 했지만 아기가 고개를 휘저어서 불발. 그러자 아기를 높은 의자에서 홀라당 꺼내 화장실로 데리고 들어간다. 헐... 서양 엄마들은 기운이 좋은지 아이를 참 가볍게도 든다. 아가야, 제발 무사하길 바라... 이탈리아에서 저렇게 험악하게 아기를 다루는 엄마는 처음이다 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빨리 화장실에서 나왔고, 분위기 대 반전. 아기가 해피 베이비가 되어 돌아왔다. 들어갈 때의 험악한 분위기로는 상상할 수 없는 아기의 표정이다. 엄마 매직...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른 테이블의 아기와 골목을 뛰어다니며 풍선을 가지고 논다. 다시 평화로운 천사가 되었다.

말 못하는 어린 조카를 데리고 요거트 집에 갔을 때 딱 저런 일이 있었다. 주문할 때 손가락으로 알록달록한 토핑을 넣어달라고 분명히 의사를 표현했건만 말 못하는 아기의 요구라고 무시하고 내 의지대로 건강한(?) 토핑을 골라 넣어 주었다. 말 못하는 아기 조카는 제가 좋아하는 요거트 볼을 앞에 뒀으면 신이 나야 하는데 영 기분이 별로다. 마지못해 먹는 것처럼 몇 숟가락 뜨더니 저 아기처럼 떠먹으려 상체를 숙인 자세 그대로 으앙~ 하며 서러운 울음을 폭발시켰다. 헐... 영문을 몰라 안고 달래니, 손으로 진열대를 가리켰다. 진열대로 가보니 아까 그 알록달록한 토핑을 넣어 달라는 것. 말 못한다 무시당한 서러움을 나름 참고 삭이려 했는데 그게 잘 안됐었나 보다. ^^ 토핑의 색소 보다 ‘다 너를 위해서’라는 당당한 무시가 더 해로웠던 거다. 존중하지 않아도 될 존재는 없다.

메뉴판을 보니 이곳 버거는 모두 시칠리아 산 소고기로 만드는 것을 자랑했다. 다른 주 재료도 어디 산인지 표시했다. 몇 번 먹어본 시칠리아 소고기가 맛있어서 그것만으로도 기대가 됐다. 블루치즈와 라구자 산 크림, 네브로디 산 베이컨이 들어간 버거와 시칠리아식 환타 aranciata를 시켰다. 버거의 크기도 크지만 들어간 재료가 너무 실하다. 그 많은 별점에 이유가 있었던 거다. 최선을 다해 먹었지만 삼분의 일이 남았다. 소고기 200g쯤 다 먹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 접시를 물리며 또 맛있는데 너무 커서 다 못 먹었다는 변명 아닌 변명을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