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8/2020

시칠리아 여행: 30: 팔레르모: 마시모 극장& 오페라



숙소로 들어와서 씻고 옷을 갈아 입었다. 옆 좌석에 혹시라도 땀 냄새를 풍기는 실례를 하고 싶지 않았다. 챙겨와서 한 번도 입지 않은 검은색 블라우스와 길고 풍성한 파란 꽃무늬 치마바지를 입었다. 당연히 오늘을 위해 가져온 건 아니고, 매일 배낭 메고 땀 뻘뻘 흘리며 다니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아 입지 않았을 뿐인데, 그 동안 메고 다닌 것이 아까워 챙겨 입어봤다. 신발은 운동화지만 누가 봐도 관광객이니 그 정도는 용서(?)받을 것 같고... 좀 갖춰 입고 오페라 극장에 가는 동네라 하더라도 눈에 띄게 무신경해 보이는 차림새는 아닐 것 같다. 클래식 공연장이라고 차려입고 가는 스타일은 아닌데, 오늘은 본의 아니게 신경 좀 쓴 게 됐다.^^

대부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했다는 이유 말고도 떼아뜨로 마씨모teatro massimo가 유명할 이유는 있을 것 같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크고, 유럽에서는 파리와 비엔나의 오페라 하우스 다음으로 큰, 그러니까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극장이란다. 19세기 말 유럽에 거대한 오페라 극장을 짓는 유행이 돌던 시절, 팔레르모 시장이 남부 제 2의 도시라는 위상에 걸맞는 오페라 극장이 있어야 하지 않겠냐며 시민들을 부추겨서 짓게 됐다고 한다. 극장 지을 땅(2,300여평)을 마련하느라 주변 유적, 거주지역 등을 싹 철거했단다. 19세기 말에 개관되어 1970년대 개보수 공사를 위해 문을 닫았다가 마피아와 관련된 부정부패 등 예기치 않는 난관에 부딪혀 방치되었다가, 1990년대 팔레르모 도시 재생 프로젝트로 1997년에 다시 문을 열었단다. 하마터면 건설 붐을 일으켜 부당이득을 취하던 마피아 휘하의 건설회사들에 의해 사라질 뻔 했다가 고향을 지키려는 시민운동으로 복구되었다는 글에 안도의 한숨이 쉬어진다. 마피아... 가족 사랑은 끔찍하다며 제 고향은 사랑하지 않는 건지... 아무튼 팔레르모 재탄생의 상징같은 존재란다.

내 삶의 추억에도 이 극장은 등장한다. 나도 대부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지만 어떤 대사도 어떤 장면도 인상 깊게 남지 않았었다. 내게 대부는 그저 어떤 범죄 조직을 다룬, 종종 눈을 감고 있어야 했을 만큼 잔혹한 영화일 뿐이었다. 보스턴에서 일하던 시절, 이런 우연이면 인연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어 만났던 친구를 통해 그 영화가 누군가에게는 엄청 의미 있는 영화라는 걸 알게 됐고, 더불어 영화의 비극적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이 극장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라는 오페라를 알게 되었었다. 그리고 내 기억에는 나도 보았을 장면 속 극장이 아니라, 그의 묘사를 바탕으로 한 상상의 마시모 극장이 자리 잡게 되었다. 그 후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는 시칠리아를 무대로 한다는 것, 학창 시절 합창 대회 때 알게 되어 좋아했던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라는 노래가 이 오페라에 등장하는 합창곡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는 꼭 마시모 극장에서 보면 좋겠다는 로망이 생겼었다. 이탈리아 여행 중 토리노 극장에서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공연이 있었고, 일단 여기에서라도 먼저 보자 하고 보러 갔는데, 말로만 듣던 박스석을 친구와 둘이서 차지하고 보게 돼 마냥 신나 했던 기억도 있다.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전주곡이 시작되면 다 같이 합창연습을 하던 고등학교 시절로, 보스턴 거리로, 팔레르모 마시모 극장으로, 토리노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다. 미약한 연결고리로 이어진 작은 기억 조각들이지만 어느 한 조각이 떠오르면 찻잔 속 향기가 코끝을 스치듯, 오렌지 향기가 바람에 날리듯 나머지 조각들이 희미하게 이어진다. 이제 팔레르모가 뒤를 이을 테고, 세빌리아의 이발사가 떠오를 테고, 로시니 고향 페사로 출신 파올라가 떠오르며 시칠리아 곳곳의 추억이 뒤를 잇겠지... ^^




넓은 베르디 광장 중앙에 자리잡은, 청록색 돔과 붉은 지붕이 인상적인 육중한 황토빛 건축물. 극장 정면은 세제스타, 셀리눈테, 아그리젠토 신전을 떠오르게 한다. 그 신전들에 쓰인 것과 같은 석재를 사용한 것으로 보이고, 그 신전들의 일부를 옮겨 놓은 것 같기도 하다. 계단을 오르면 극장이 있다. 계단 끝에는 바로크 양식의 교회가 있는 것을 하도 많이 봐서 교회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이곳엔 그리스 신전이 있다. 거대한 청동 사자상이 입구를 지키며 계단 양쪽에서 우뚝 솟아있고, 날카로운 창을 세워놓은 듯한 철제 울타리가 극장 주위를 에워싸고 있지만. 뭐 그리 대단한 권위를 자랑하려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이고, 그렇다 하더라도 그 권위에 휘둘리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극장 앞 넓은 광장 덕분인 것 같다. 만남의 장소이자 시간을 보내는 장소이기도 하고, 할 말 있는 사람들은 나와 시위도 하고, 보여 줄 것 있는 사람은 나와서 공연도 하고... 북적이고 자유롭다. 그리고 늘 경찰이 나와 있어 어두워도 안전하게 느껴진다. 광장 가장자리에 거목 가로수도 있고, 이탈리아에서는 리버티liberty 스타일이라고 불린다는 아르누보 스타일 키오스크가 두 개 서있다. 처음엔 설탕처럼 달아서 질린다 싶은데 문득 생각나는 디저트 같은 느낌의 스타일...
 



극장의 큰 틀은 웅장한 신고전주의 스타일이지만 세부 장식은 아르누보를 추구한 듯 섬세하다. 건축가의 흉상도 있고 시칠리아가 사랑하는 벨리니의 흉상도 있다. 오페라를 보면 극장 내부를 좀 돌아볼 수 있을 줄 알고 일찍 왔는데 아니었다. 하릴없이 로비를 서성이다 심심해서 괜한 팜플렛만 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내부 투어를 할 걸 그랬다. 다음 기회에...^^ 시칠리아에 다시 오지 않겠다 했는데, 자꾸 다시 올 이유가 쌓인다. 어쩌면 다시 올 핑계를 만들고 있는 것 같기도 한다. 입장이 개시되어 첫 번째 층 발코니 석으로 가는 입구에서 표를 보여주니, 계단으로 올라가라 손짓한다. 올라가 표를 보를 보여주니, 오른 계단을 다시 내려가란다. 내려가 아까 올라가라 했던 안내원에게 다시 표를 보여주니, 당황한 표정으로 미안하다며 좌석을 안내한다. 익숙한 일이다. 표에 쓰인 작은 숫자보다는 내 모습이 먼저 보였겠지... 사람을 재빨리 아래위로 훑은 뒤 어떤 태도를 취할지 결정하는 사람들... 한국 백화점에 가면 수두룩하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고정... 시선이 상하로 움직이지 않았던 것 만으로도 천박하다 평가하고 싶지 않다. 어쩌면 내게 이런 상황을 즐기는 삐딱한 취향이 있는 것 같다.




빛나는 금빛 천정, 발코니, 아치로 만든 공간을 가득 매운 버건디 색이라 부르는 붉은 벨벳 좌석과 휘장. 발코니마다 달려있는 전등 불빛이 휘황찬란한 공간을 더 휘황찬란하게 보이도록 만든다. 원형 천정에 그려진 그림은 음악의 승리를 표현하고 있단다. 황금빛 하늘에 알록달록한 파스텔톤 꽃이 활짝 피어 있는 모습이랄까. 지나다니며 보던 청록색 돔 아래에 이런 천장이 있었다.

박스 밖으로 보이는 것은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는데 박스 안 현실은 이거 실화임? 하는 예능 프로 자막이 떠오르는 상황이다. 의자 일곱 개가 다닥다닥 좁은 공간을 채우고 있다. 이곳에 사람이 꽉 차면 옆 사람과의 간격이 10센티미터를 넘지 않을 것 같다. 어떻게 봐도 성인 일곱이 편안히 앉아 공연을 감상할 공간은 아니다. 이것 또한 이유가 있을 것 같다. 더구나 내 좌석은 발코니 장식이 시야를 가린다. 삐딱하게 앉거나 고개를 빼야 무대가 다 보인다. 이런 좌석을 그 가격에 파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 싶다. 이탈리아 여자 둘이 들어와 내 앞에 앉는다. 곧 프랑스 부부가 들어온다. 부인은 심지어 이브닝 드레스를 입었다. 오늘 처음 본 사람들이 다른 곳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며 앉게 됐다. 1막이 끝나고 인사도 나누고 같이 웃고 하니, 그 좁은 공간을 채운 서먹한 기운이 조금 사라졌다. 프랑스 부인은 이탈리아어를 하는데 영어는 전혀 못한다. 누구에게나 제 2외국어가 영어는 아니라는 사실.^^ 이브닝 드레스의 부인이 빈 좌석 의자를 뒤로 빼서 좌석 간격도 조금 넓히고 내게 자기 쪽으로 옮겨 좀 더 잘 보이도록 앉으라고 권한다. 혹시 시야를 방해할까 싶어 사양해도, 괜찮다며 걱정하지 말란다. 프랑스 사람을 싸잡아 비판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두 번째 인물일까?^^ 어색함은 사라지고 존중과 배려가 충만(?)하니 좁은 공간이 덜 답답하게 느껴진다.

세빌리아의 이발사. 로망은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였으나, 내가 바라는 대로 세상이 돌아가는 것이 아님을 인정하고, 라 트라비아타를 원했었다. 하지만 그 분(?)은 세빌리아의 이발사를 보게 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그리하여 작곡가 죠아키노 로시니gioachino rossini의 고향 페사로pesaro 출신이며 그에 대한 책을 쓴 파올라를 만나게 했고, 라 트라비아타 표를 매진시켰다.^^ 예전에는 드라마 속 우연을 말도 안된다며 비웃었지만, 이제는 무턱대고 비웃지는 않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 하는 우연을 종종 경험하다보니 현실 속 드라마틱한 우연이 드라마가 되는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오페라는 오페라 부파opera buffa로 분류된다. 오페라 부파는 코미디를 위한 오페라로 보통 2막으로 구성된다. 오페라 배우의 의상이나 무대에 대한 기대가 있었는데, 내 기대와는 많이 빗나가는 무대였다. 무대 배경을 꽉 채우는 커다란 스크린이 설치되었고 입체적 무대 장치 대신 스크린에 애니메이션이 상연되었다. 애니메이션 속 등장 인물이 실제 배우와 자연스럽게 interaction을 하는 듯이 잘 연출되어 재미있기는 하지만 잘 꾸며진 전통적 무대를 기대했던 터라 아쉽다. 등장 인물들을 모두 과장된 뚱뚱보로 설정한 점은 신선하다.

고대하던 떼아뜨로 마씨모에서의 오페라 공연도 피날레를 맞았고, 관성을 거스르기 위해 큰 결단이 필요했던 내 여행의 피날레도 이제 하루를 남겨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