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0/2020

시칠리아 여행: 28: 체팔루: 라 로까 La Rocca 2



[체팔루 로까. 오른쪽 바위처럼 보이는 돌 위에 조각의 흔적이 있다]


드디어 입성. 말 그대로 성문 안으로 들어왔다. 가파른 계단이 있고 시각이 바뀔 때마다 풍경도 바뀐다. 돌 산 가장자리에 성곽이 부분부분 남아있다. 기대다 떨어질 수 있다고 경고하는 안전 표지판이 있다. 매우 적절한 위치의 표지판이다. 낮게 남은 성곽에서 보이는 풍경에 홀려 넋을 놓을 수 있을 것 같다. 지붕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오렌지색 계열의 붉은 색인 것 같은데, 터키 블루 바다와 함께 보면 산호색이나 진달래색 계열의 붉은 빛이 보인다. 아무리 봐도 무심해질 수 없을 것 같은 풍경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많은 것을 지나치지만, 일단 어딘가 발을 들여 놓으면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다. 제법 넓은 돌산에 난 길을 다 걸어보고 싶다. 이 산에는 디아나 신전의 유적, 교회와 부속 시설의 유적, 성터, 성곽 등이 있다. 계단이 이어지다 길이 돌 길로 변한다.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이 좋다. 파란 바다와 오렌지색 산호색, 살색, 벽돌 색 등의 도시와 산과 바위의 조화. 내가 아는 어떤 형용사도 상투적일 뿐, 이 감동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마라톤 출발시간이 가까워졌는지 마라톤 출발 지점에 더 많은 사람이 몰려있는 모습도 보인다. 더 높이 오르니 도시를 에워싼 산들의 모습이 가까이 보인다. 조금 올라가다 보면 길이 양쪽으로 갈라진다. must-see 장면을 빨리 보고 내려가려면 왼쪽 디아나 신전 방향으로 가면 되고, 크게 한 바퀴 돌고 싶으면 성 쪽으로 가면 된다. 당연히 성 쪽으로 가기로 했다. 




어떤 부부와 계속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게 돼서 눈인사라도 할라 치면 외면하듯 그냥 쌩 지나친다. 저들이 나를 앞서려는 의지가 있나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시칠리아에서 느끼는 뿌듯함 중 하나가 다리가 의지를 따라준다는 것이다. 앞장서서 속도를 내니, 그들이 더는 날 앞지르지 않는다. 

저 아래에서 마라톤 출발 신호가 울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중계하는 아나운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누군가 쓰러졌다고 한다. 그리고 곧 어딘가에서 출발한 구급차의 다급한 움직임이 소리로 느껴진다. 무사하길... 여기까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시시콜콜 다 들린다. TV나 라디오를 켜지 않고도 행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온 마을이 알 것 같다. 이 소리를 소음으로 생각하는 동네 사람은 한 명도 없는 걸까? 동네 축제 같았던 보스턴 마라톤 대회도 생각나고, 아나운서의 호들갑스러운 멘트도, 온 마을이 뭔가를 공유한다는 것도 정겹다. 







[체팔루. 로까 동쪽의 새 항구] 

[체팔루. 로까 동쪽 해변] 

[체팔루. 로까. 체팔루 성castello di cefalù의 유적]



가파른 돌산 사이사이 잡초와 나무, 이름 모를 꽃들, 어느새 누렇게 변해 가을 들판을 연상시키는 들풀, 건너편 첩첩 솟은 산들, 바다와 도시의 전경. 예상치 못한 제대로 등산이다. 돌 더미로 변한 성이 나왔다. 이곳이 꼭대기라고 하는데, 그 말에 걸맞게 전망이 너무 좋다. 성터 근처 성벽을 따라 한 명이 겨우 걸을 수 있는 좁은 공간이 있다.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을 만다면 아슬아슬하게 비껴야 한다. 하지만 아래로 보이는 풍경이 너무 좋아 포기할 수 없다. 로까가 마을의 동쪽 끝에 있나 했는데 로까 동쪽으로도 마을이 이어졌고 진짜 항구는 로까 너머 동쪽 해변에 있었다. 

계속 퀴퀴한 냄새가 난다 했었는데 냄새의 정체가 곧 드러났다. 산기슭을 오르내리는 산양이 몇 마리 있었는데 그 녀석들이 범인이었다. 그런 냄새를 사람이 풍겼다면 모두 그 사람을 피했을 텐데, 짐승이고 보니 누군가는 꾸리꾸리한 녀석이 바로 너희들이었구나 하며 다가가기도 하고, 다른 주변 사람들도 모두 그들의 존재를 반긴다. 모든 건 상대적임을 또 확인...^^
 





[체팔루 로까. 산타 안나 교회] 


[체팔루 로까. 비잔틴 시대 이슬람 세력을 피해 올라와서 살았다는 유적.] 


성 끝까지 돌고 내려 가는 길에 디아나 신전이 있다. 신전으로 가는 길에 비잔틴 시대에 이슬람 세력의 공격을 피해 이곳으로 피신했을 때 사용하던 시설이라는 유적이 나온다. 산타 안나에게 봉헌된 교회가 있고 곡식 등 식량을 저장했던 시설과 빵을 굽던 오븐이란다. 그런데 유적의 돌 벽에 테라코타 조각들이 박혀있는데, 박힌 모양이 달팽이가 지나간 자국 같은 불규칙한 모양의 도형이나 선이다. 그것들에 대한 설명은 없다. 창고와 빵 굽는 오븐이었다는 것은 아이들에게 이 유적의 용도를 추측해보라고 해도 나올만한 답이다. 추측가능 한 건 알려주고, 불가능한 건 안 알려주고... 고고학, 너무 쉽게 하시는 것 아닙니까? ^^ 


[체팔루 로까. 디아나 신전의 유적지. 오른쪽 아래는 우물. 제물을 바쳤던 증거라고...] 


피난처였던 곳을 지나 조금 더 가니 디아나 신전의 유적이 있다. 이 산에서 직접 돌을 채취해 지은 신전이라고 한다. 그냥 돌 더미다. 벽이 조금 남아있지만 원래 있는 것인지 나중에 조금 쌓아 올려둔 것인지 알 수는 없는데 원래부터 있던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원래부터 아그리젠토 등에서 보던 도리스 식 신전은 아니었을 것 같다. 지금 대성당에 있는 기둥이 이 신전에 있던 것이라 했다. 현재 모습으로 그런 기둥이 이곳에 서있었던 멀쩡한 신전을 상상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교도 신에게 제물을 바치던 곳이 기독교가 지배하던 그 오랜 세월을 버텨냈을 수는 없었을 것 같다. 표지판을 읽어보니 교회가 있었다고도 하고, 어딘가에 뭔가 새겨져 있다는 것 같기도 한데, 뭘 잘 알아볼 수 있는 상태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