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드랄리스카 박물관museo mandralisca
[체팔루. 만드랄리스카 박물관. 안토넬로 다 메시나의 초상화]
대성당을 나와 만드랄리스카 박물관으로 갔다. 만드랄리스카 남작baron di mandralisca인 엔리코 피라뇨enrico pirajno라는 체팔루 출신 이탈리아 정치인의 소장품을 전시한다고 하는데, 이곳에 안토넬로 다 메시나의 유명한 초상화가 있다.
입구에 소장품 주인의 흉상이 있다. 그림, 조각, 그리스 도자기, 고대 유물, 책, 가구 등 집기, 조개 껍질, 화석, 동물의 박제, 동전 등 온갖 수집품이 다 있지만, 글쎄 뭐라 해야 할지... 남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안토넬로 다 메시나의 초상화 때문에 왔다. 작품의 제목은 ritratto d'ignoto marinajo, 무명 선원의 초상이라는 뜻... 이 작품의 미술사적 미학적 의미는 모르겠지만 수수께끼 같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표정이다 싶다. 가늘게 뜬 눈으로 곁눈질을 하며 엷은 미소를 짓고 있다. 의도가 있음을 숨기는 표정인지 드러내는 표정인지... 음흉한 느낌, 정체 모를 불안감을 일으킨다. 초상화를 의뢰한 모델이 화가에게 저런 표정을 지으며 그리라 지시했을 것 같지는 않고, 화가의 상상력이 동원된 표정이 아닐까 싶다. 그림을 가구와 출입문의 문짝 등에 붙여 리폼한 가구들이 보인다. 이 초상화 또한 그런 용도로 사들인 그림이었고, 나이트 스탠드 상판에 붙어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이 박물관에 전시된 모두가 개인 소장품이라는데, 취향이 느껴지지 않는다. 세상 모든 것을 다 모아 둔 것 같다. 사람들이 물건을 들고 와서 딱한 사정을 호소하며 사달라고 사정해서 인정에 못 이겨 사주고 그러다 보니 이렇게 됐다면 이 컬렉션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시칠리아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에서 흔한 장면. 아기가 그냥 지나가게 두지를 못한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는 있을 수 없는 장면이 아닐까... ㅠㅠ]
도시 골목골목에 밤이 내리고 있다. 영화 속 중세의 분위기가 스멀스멀 피어난다. 결혼식이 끝났나 보다. 신랑 신부가 친구들과 무리 지어 이 골목 저 골목 다니며 사진을 찍는다. 신부의 드레스 자락이 온 골목을 쓸고 다녀도 그것을 추슬러주는 사람이 없다. 드레스 자락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우아하게 보란 듯이 걸어 다닌다. 다른 곳에 비해 깨끗해 보여도, 담배 꽁초도 많고 떨어져 있을 것은 다 떨어져 있는데... 그러고 보니 시칠리아에서 지금까지 거의 매일이라고 할 만큼 많은 신부를 보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신부 드레스 자락 전담 도우미를 본 기억이 없다. 엊그제 타오르미나 거리에서도 드레스를 끌고 거리를 걷는 신부가 있어 그러려니 했는데, 얼핏 드레스 자락에 얽힌 어떤 속설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거리를 걸어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려서 뭘까 보니 좁은 골목 사이로 바다가 보이고, 바다 위로 석양이 비친다. 와... 체팔루는 이런 장면을 보여주는 곳이었구나. 이런 풍경 앞에서 어떻게 나쁜 마음을 품을 수 있을까, 어떻게 맺힌 마음을 풀지 않을 수 있을까... 자, 잠시 석양 보고 가실게요...
중세 빨래터lavatoio medievale
조금 걸으니 또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곳이 있다. 중세 빨래터다. 바닷가에 민물이 솟아나는 샘이란다. 빨래터가 있고 나중에 주변과 그 위에 건물을 지었는지, 건물을 짓고 나중에 샘을 발견해서 빨래터로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재미있는 공간이다. 얼마 전 까지 사용됐다고 하고 지금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관광객들의 시선 때문에 빨래를 하기는 좀 어려울 것 같다. 아주 어린 시절 할머니 댁에서 우물가로 시냇가로 빨래 하러 가는 고모와 작은 엄마를 재미 삼아 따라 다녔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옆에 쪼그리고 앉아 동네 아주머니들이 빨래하며 주고 받는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했었다. 이곳 풍경도 그리 다르지는 않았으리라... 노동의 현장이지만 애환을 나누고 위안을 주고 받고 기쁨을 공유하는 공간...
옛 항구 porto vecchio
체팔루가 특별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시네마천국 때문이다. 오기 전부터 이미 이곳을 좋아할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이 영화를 특별히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처럼 내게도 이 영화는 특별하다. 너무 오래 전에 본 영화라 스토리와 장면이 선명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떤 특별한 마음이 있다. 시네마 천국의 사랑의 테마가 흐르기 시작하면 언제 어디서든 그 마음이 떠오르는데, 세월이 흘러도 바래지 않는다. 희미하게 피어 오른 연기가 뭉쳐 형체를 이루듯, 그 마음이 가슴에 고이고 찡해진다. 그 마음은 다른 어떤 마음과 다르고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시네마천국 마음이라고 이름을 붙여 주어야 할지도... 그 영화의 촬영지로 잘 알려진 곳이 체팔루와 팔라쪼 아드리아노palazzo adriano. 팔라쪼 아드리아노에는 시네마 천국 박물관도 있다고 한다. 그곳을 갈까 말까 아직도 고민 중이다. 조금 무리하면 팔레르모에서 당일치기가 가능하긴 한데, 여행 막바지에 다다르니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한다는 말년 병장의 마음이 되어 망설이고 있다. 아무튼 체팔루에서는 여름 야외 영화 상영 장면 한 장면을 찍었다고 한다. 바닷가에 설치된 커다란 스크린에 영화가 상영되고 스크린 앞에 앉아 또는 바다에 배를 띄워놓고 박장대소하며 영화를 보는 장면이다. 작은 부두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아, 그곳이 여기구나' 딱 떠오른다.
숙소 왼쪽으로 부두porto vecchio가 있고 부두 앞 작은 모래사장에 배가 몇 척 있다. 그저 정취를 살리기 위한 소품인 것 같은데 역할을 다하고 있는 듯 하다. 룽고마레lungomare 해변이 한 눈에 들어오는 작은 부두는 더는 배를 타고 내리는 곳은 아닌 것 같다. 부두 곳곳에 있는 벤치마다 사람들이 앉아 시간을, 풍경을. 대화를 즐긴다. 부두 앞 모래사장 뒤로 집들이 성벽처럼 이어져 해안을 감싸고 그 뒤로 라 로까la rocca가 버티고 서있다. 하늘의 구름 사이로 비치는 노을, 물에 반사된 노을, 다른 모든 풍경 위에 내려 앉은 노을. 늘 사랑하는 영화지만 시네마 천국이 시칠리아 여행을 결정하는데 작용하진 않았다. 그런데 체팔루를 어떻게 기억할 지에 대해서는 크게 작용할 것 같고, 체팔루는 시칠리아를 어떻게 기억할 지에 대해 결정적으로 작용할 것 같다.
숙소 테라스
들어오는 길에 안나를 만났는데 테라스에 올라가 봤냐고 묻는다. 안 가봤다고 하니 따라오라며 안내해 준다. 룽고마레 해변의 야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안나가 두 팔을 벌려 해변을 가리키며 이것이 체팔루라고 한다. 와... 조금 전까지 배회하던 시네마 천국을 찍은 옛 항구도 바로 발 밑에 있다. 도시는 여름을 해변에서 휴가를 즐기는 사람으로 북적대지만 이곳은 다른 세상이다. 어떤 인연으로 나는 이 숙소에 머물게 됐을까? 제발 이곳이 돈 많은 체인 호텔에 팔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된다. 언젠가 와서 일주일이든 열흘이든 여름을 보낼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