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1/2020

시칠리아 여행: 28: 체팔루: 점심 & 휴식



배가 고파 기절할 것 같다. 잠시 아침 산책하듯 다녀와야지 했는데, 제대로 하이킹을 했다. 복숭아 두 개 먹고 네 시간 동안 가파른 돌산을 오르내리고 나니 무엇이라도 맛있을 것 같다. 아무거나 빠르게 대충 먹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체팔루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좋은 곳에서 제대로 하고 싶어 신중히 레스토랑ristorante al porticciolo을 골랐다.


[체팔루. 오스테리오 마뇨osterio magno 궁전]


가는 길에 루제로 2세가 종종 거주했다던 오스테리오 마뇨osterio magno 궁전과 만드랄리스카 남작의 무덤이 있다는 연옥 교회chiesa di santo stefano protomartire del purgatorio가 있는데, 둘 다 오늘도 문이 닫혀있다. 그렇다면 안녕을 고하기로 ...




식당에 들어서니 안쪽 테라스에 있는 테이블로 안내해준다. 식당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니 바닷가 바위 해안 위에 세운 테라스가 있었다. 어제 노을을 봤던 곳에서 보이던, 바닷가 절벽 위에 서있던 테라스들 중 하나였다. 그러니까 벼랑 끝에 서있는 건물인 건데, 그 앞을 몇 번을 지나다니면서도, 건물에 가려 바다가 전혀 보이지 않으니 건물이 빽빽이 들어서있는 여느 도시의 골목으로 생각하고 다녔다. 심지어 뒤를 보고도 앞과 연결시키지 못했던 거다. 몇 걸음 옆에 절벽이 있는데 막연히 도시 한 복판이라고 생각했던 것... 트루먼쇼... 이렇게 쉽게 의식이 조작당할 수 있겠구나 싶기도 하고, 이렇듯이 사람들의 속사정도 겉으로만 봐서는 알 수 없는 거지 싶기도 하다.

배가 너무 고파 황소 한 마리도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해산물 리조토와 구운 황새치pesce spada, 샐러드가 포함된 코스 메뉴를 시켰다. 어딘가에서 먹어본 황새치 구이를 굳이 먹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시칠리아 대표 생선인데 한 번은 먹는 게 예의일 것 같았다. 집에 갈 날이 며칠 남지 않아 뭐든 미뤄둘 시간이 없다. 테이블 위에 히말라야 핑크솔트를 보니 트라파니에서 만났던 알레시오가 생각난다. 알레시오가 싫어할 텐데... 나도 의아하다. 시칠리아에서 트라파니 소금을 두고 희말라야 소금이라니...^^

꼬맹이의 당당한 재잘거림이 들리니 오늘 아침에 본 장면이 떠오른다. 수도원 밖에 경찰이 몇 명이 심각한 표정으로 웅성거리며 서있는데, 앞 건물 3층 창문에서 꼬맹이가 경찰들을 내려다보며 한참을 뭐라고 했고, 경찰들은 꼬맹이 말을 경청했다. 뭔가 자기 의견을 피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의 말이 끝나자 경찰들이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사들 전달했는지, 꼬맹이가 어깨를 으쓱하며 그렇다면 할 수 없다고 하더니 쿨하게 들어갔다. 그 꼬맹이는 일고여덟 살 밖에 안 돼 보였다. 우리는 그런 아이들을 당돌하다거나 버릇없다고 표현하는데, 나는 당돌한 꼬맹이들을 너무 좋아한다.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당당함이 너무 사랑스럽다. 그 꼬맹이가 으쓱 하던 순간 귀여워 죽을 뻔 했다. 그리고 낯설었다. 내게 익숙한 아이는 대체로 어른에게 요구하거나 부탁하고, 자신의 의사가 관철되지 않으면 삐쳐 입을 닫거나 떼를 쓰는 존재인데, 의견을 피력하고 다름을 인정하고 쿨하게 마무리 하는 모습... 게다가 경찰을 상대로... ^^

말만 할 수 있으면 저보다 두세 배 큰 어른에게 당당히 제 생각을 말하는 꼬맹이들이 이탈리아에서는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너무 바람직해 보인다. 덩치나 나이로 동등함이 결정되지 않는 것... 이곳 아이들은 이렇게 귀하게 자라는구나 싶다. 공주처럼, 왕자처럼 자라는 ‘귀하게’가 아니라 온전한 존재로 인정받고 존중받는 ‘귀하게’... 미완의 존재로 한걸음 뒤로 물러나 있어야 한다는 암묵적 분위기에서 성장한 나는 저렇게 자랐다면 어떤 사람이 됐을까 궁금하다. 다시 태어나고 싶은 이유가 또 하나 늘었다. 그런데 원하는 환경에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윤회에 들려면 도대체 얼마나 착하게 잘 살아야 할까. ^^ 이곳이라고 사람간의 경계가 없지야 않겠지만 내게 너무 당연하고 익숙한 경계가 없어 보이고, 그런 풍경이 부럽고 낯설다.

파스타든 요리든 접시 하나와 샐러드 정도가 알맞은 양임을 다시 확인한다. 거뜬히 먹을 줄 알았는데 황새치 구이가 넘어가지 않는다. 싱싱한 생선에 이것저것 조미를 한다는 걸 용납하지 못할 테니 이런 맛일 것이리라 예상은 했다. 황새치를 어떻게든 넘겨보려 뒤늦게 와인을 시켰는데, 직원이 다른 테이블로 가져갔고, 그랬더니 그 테이블 아주머니가 내가 시킨 것임을 직원에게 알려준다. 아까부터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내더니 내가 와인 시킨 것도 파악하고 있었다.^^ 시칠리아에서 마신 와인 중에 제일 좋다. 아마도 그릴로가 아닐까... 아주머니가 맛있게 먹으라고 인사를 하며 떠난다. 인품은 사소한 행동 하나에서도 보인다.

그러자 어제 옆 테이블의 젊은 여자가 생각났다. 남녀 커플이 피자를 한 판씩 시켰다. 이탈리아에서는 1인1피자가 기본이니 특별한 일은 아니다. 둘 다 반쯤 남겼고, 직원이 싸주냐고 물었더니, 싸달라고 하면서 하는 말이 귀에 박혔다. 혼자 다니다 보니 안테나가 세상으로 향해 있어 온 세상이 다 느껴진다.^^ 거만한 태도로 자신들은 유럽의 위를 가져서 많이 먹지 않는단다. 어이상실... 시칠리아는 유럽 아니야? 면전에서 상대를 모욕하는 저 태도는 용기야? 하마터면 where are you from?이라고 하며 끼어들 뻔...^^ 왜 자신이 유럽인을 대표하지? 그럴 때 필요한 말, 너 뭐 돼? 뭔가 꼬인 사람이고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피자 한 판으로 꼬인 속풀이를 할 권리를 살 수는 없다. 그야말로 말 한 마디였을 뿐인데, 인품이 투명하게 보였다.

아무튼... 와인 덕분에 황새치를 조금 더 먹긴 했지만 다 먹었다간 배불러 죽을 것 같아서 포크를 내려놓았다. 먹고 나니 잠이 온다. 들어가서 좀 자기로...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걸으면서도 잠이 오고 힘들어 죽을 것 같다. 안나가 입구를 지키며 안부를 묻는다. 로까 다녀오는 길이라니 로카에서 성당을 봤냐고 묻는다. 물론, 봤지요. 얼마나 아름답게요. 내 벅찬 감동에 맞장구를 쳐준다. 장장 4시간이나 걸었다고 stanca(tired), difficile(difficult), dura(hard) 등등 아는 모든 단어를 동원해 엄살을 떠니, 그렇게 오래 걸었냐고 힘들었겠다고 들어가서 좀 자라고 동작을 곁들여 말한다.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고 기도하듯 모은 손을 귀 옆에 붙이며... 귀엽다. 말만 안 통하지 아주 오래 전부터 알았던 사람처럼 편하다.

시칠리아 여행을 하려면 무엇보다 무릎을 준비해야 한다. 수많은 계단과 언덕들. 그 모두를 멀쩡히 오르내리고 있는 내가 대견한데, 이젠 한계가 왔는지 오늘 유난히 지친다. 로까는 생각보다 가파르고 길도 험하고 많이 걸어야 했다. 한두 시간이면 되겠지 하며 갔다 와서 아침을 먹을 거라고 복숭아만 먹고 물도 어제 마시다 남은 것만 가지고 갔는데, 만만하지 않았다. 기다린 시간도 있고, 공연한 헛걸음으로 힘을 빼긴 했어도 4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체팔루에 왔다면 꼭 가봐야 하는 곳이다. 체팔루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기도 하고 풍경도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성 쪽으로 가서 성곽을 따라 걸어 디아나 신전을 보고 내려오면 체팔루를 360도 돌며 다 보게 된다. 시간이 없거나 걷기를 즐기지 않는다 해도 디아나 신전 근처 성벽에서 보는 전경은 꼭 봐야 할 풍경이다. 그리고 체팔루 대성당 관람은 그곳에서 봐야 완성되는 것 같다. 산의 품에 안겨 있는 바닷가 마을의 모습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낮에 숙소에 들어와서 태평하게 누워 있어보기는 처음이다. 방문과 창문을 다 열어놓으니 바람도 살랑살랑 불고 파도 철썩이는 소리도 들리고 좋다. 오후 대성당 문을 열 시간이 됐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고 들어와서 빨래하고, 내일 팔레르모로 떠날 짐을 싸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