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7/2020

시칠리아 여행: 23: 카타니아: 에트나 투어 2



별 모양 네트워크의 중심에 있던 가이드 파올로가 사라지자 남은 넷은 굉장히 어정쩡하고 어색한 무리가 됐다. 리더십을 발휘하는 게 기질과 맞지 않는 내가 몇 시간 동안 편안한 관계를 위해 나서서 상황을 정리할 리는 만무한데, 다른 누구도 그럴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목적지가 같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무리 지어 가고 있는데, 처음 인사성으로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헝가리에서 온 친구 커플이 의외로 나서며 같은 그룹이니 함께 다녀야 한다며 공동체임을 주지시킨다. 엉? 적당한 거리 있어야 편한 사람으로서 어디까지 함께 다니자는 것인지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인사성을 너무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하다 보니 좀 무뚝뚝한 사람들을 무례하다 속단했구나 싶다. 언어 장벽으로 의사소통이 원활하지는 않아도 오해가 풀리니 마음이 편해졌다.


[케이블카 유리창 너머 에트나. 어딘가에서 용암이 뿜어져 나오기라도 하는 줄...]



넷이 함께 케이블 카를 탔다. 경치가 너무 좋은데 케이블카 유리창이 투명하고 깨끗하지 않은 것이 유감스럽다. 화산토의 색도 조금씩 다르다. 이렇게 오묘한 색의 조화는 자연에 밖에 없지 싶다. 아이섀도우 팔렛트를 이런 색으로 구성하면 너무 예쁠 것 같다. 곳곳에 확대한 곰팡이 무리처럼 예쁘게 피어난 식물들도 있고, 제법 큰 관목 무더기들도 있고... 멀리 걸어 올라 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왠지 삭막한 검붉은 모래 언덕을 한걸음 한걸음 걸어 오르는 모습이 전혀 부럽지 않다. 머리가 약간 어지럽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물으니 모두 괜찮다고 한다. 폐활량이 떨어진다는 것이 확인되는 순간인가? 수십 년 살고 나서 알게 된, 운동도 잘 못하고 등산 가면 항상 뒤쳐졌던 이유...

에트나 2,500미터


[에트나 2,500미터 풍경]

[에트나 버스 타고 3천 미터로]

[에트나 3천미터까지 걸어 올라가는 사람들]



2천5백 미터에서 내리니 거대한 덤프트럭을 개조한 듯한 4X4 버스가 기다린다.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창 밖으로 걸어 올라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트레킹이 너무 하고 싶었었는데, 왠지 그들이 하나도 부럽지 않다. 산 꼭대기 연기를 뿜고 있는 분화구가 점점 더 가까워진다. 거대한 바위 덩이로 보이는 봉우리가 왠지 곧 꿈틀 할 것 같다. 신화 작가가 이곳에 생명력을 부여한 것에 공감. 그런데 다른 생명체의 존재는 느껴지지 않는다. 자신 이외의 어떤 다른 생명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작용하는 게 아닐까 싶다. 정상 분화구 주변은 아직 녹지 않은 눈 위로 황금색 촛농이 흘러내린 모양이다. 유황이 내는 빛깔이다.

에트나 2,900미터


[에트나 2,900미터. 토레 델 필로소포torre del filosofo]


버스에서 내리니 누군가 우리에게 어떤 사람을 따라가라고 한다. 경계가 어딘지 모르겠는 무리가 여기저기 있는데, 어떤 무리를 따라가라는지 모르겠다. 아무나 마음에 드는 쪽으로 따라가니 헝가리 커플이 다른 쪽이라고 잡아 끈다. 분위기가 그냥 유원지 같다. 어수선함이 신비한 분위기를 흐트러뜨린다. 우리를 안내하는 가이드는 삼사십 명쯤 되는 무리를 이끌고 근처의 분화구로 가며 기계적으로 풍경을 설명하고 있다. 매일 똑같은 말을 얼마나 많이 할까...




신경은 온통 비현실적인 풍경에 가있다. 사고가 멈춘 듯 그저 와... 소리 밖에 나오지 않는다. 재킷 휘날리는 소리가 깃발 펄럭이는 소리 같다. 가이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데 꼭 듣겠다는 의지도 없다. 상상력이 좀 있었다면 거대한 짐승이 거친 콧김을 내뿜으며 웅크리고 자면서 가끔 꿈틀거리기도 하는 것으로 보였을 것 같다. 적당히 따라다니며 사진 찍으며 멍 때리듯 풍경을 담았다.






달의 풍경이 이렇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제 달에는 안 가봐도 되는 걸로. ^^ 이 투어는 가장 최근 대형 폭발, 그러니까 2002년 분화로 생긴 봉우리를 돌아 본다. 이곳에 세 개의 분화구가 있다. 그것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트레킹은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막처럼 발이 푹푹 빠지지는 않지만 다져지지 않은 자잘한 화산석 언덕을 오르내리는 일이라 불안정하게 발을 디뎌야 한다. 이것도 이렇게 버거운데 정상까지 트레킹을 하는 투어였다면 어쩔 뻔했어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만일 그랬다면 한걸음 한걸음 내디디며 그렇게 말했던 입을 쫑쫑 꿰매고 싶었을 것 같다. 어떤 상황에서도 불타오르던 모든 의지가 사라지고 잠깐 가이드를 따라다니는 것인데도 꾀를 부리고 싶다. [일행이 있어 몇 장 남은 인증샷을 보니 얼굴이 티 나게 부었다. 고산 지대의 영향이었던 것 같다.] 토레 델 필로소포에서 정상까지 두 시간은 올라가야 한다는데, 보통 두 시간이라면 나는 세 시간쯤은 걸렸을 거고, 로베르타가 내가 원하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예약을 해줬다면 고생도 고생이지만 민폐를 끼쳤을 수도 있었겠다.





그래도 푸푸 콧김을 내뿜는 주 분화구들을 지척에 두고 못 보는 심정은 안타깝다. 멀리서 본 분화구 주변은 유황이 촛농이 흘러내린 모양으로 노랗게 물들어 있다. 너무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자연의 색보다 아름다운 색은 없고, 자연만큼 아무런 구애 없이 자유롭게 색을 쓰는 예술가도 없을 것 같다.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 ㅠ.ㅠ





가이드가 땅을 파내니 연기가 희미하게 올라온다. 바람이 세고 온도가 낮아 열기를 느끼지 못했는데 이렇게 몇 십 센티 아래도 뜨끈뜨끈하다는 게 신기했다. 어디서 왔는지 무당벌레 한 마리가 있다. 모두 신기해하며 카메라를 들이댄다. 이 커다란 산에서 식물을 제외하고 발견한 유일한 생명체다. 실루엣만 보이는 언덕 능선을 따라 줄지어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개미 크기로 보인다. 색은 다르지만 나미비아 붉은 사막이 떠오른다. 언덕 저 아래로 들판에 버스가 다니는 길이 뱀처럼 구불구불 나있고, 여기 저기서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다. 트럭이 내는 먼지인지 아니면 땅에서 피어 오르는 김인지 알 수가 없다. 날이 맑으면 바다까지 보인다는데 하늘 위를 보면 파래도 가장자리는 뿌옇고 바다가 보일 기미가 없다. 이번 여행은 전망과는 인연이 없다. 저녁노을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 트라파니 염전 여행에서도, 에리체에서도, 엔나에서도 선명한, 속이 뻥 뚫릴 것 같은 시원한 경관을 보여주지 않았었다.

문득 제주도 생각이 난다. 제주도 전체가 화산 폭발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이제와 보니 엄청 신비로운 일이었다. 어느 해안에서도 현무암을 볼 수 있다는 것... 제주도에 갈 때마다 탐라국이었던 제주도와 한 나라가 돼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새삼 자연이 더욱 신비롭고 그런 곳이 가까이 있는 게 고맙고 잘 지켜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가운데 잿빛 연기가 폭발로 일어난 연기]


안내가 끝나고 내려가기 아쉬워하며 근처를 서성이며 풍경을 즐기는데 엄청나게 큰 총성 같은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니 다른 곳보다 짙은 잿빛 연기가 버섯 모양으로 폭 솟아올랐다 흩어지고 있다. 밤이었다면 붉은 빛도 볼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에트나 화산의 폭발이 일상적이라는 말을 의심한 적도 없지만, 철썩 같이 믿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