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에 누워 친구들과 메시지 몇 번 주고 받고 일어나서 짐을 챙기기로 한다. 창문을 열고 바닷바람을 들였다. 새벽 바람인데도 신선하고 부드럽다. 빗소리 같던 파도소리가 정체를 분명히 한다. 하지만 부드럽고 편안하게 들린다. 엊그제였던 것 같은데, 파도소리가 눈에 보인다면 헝클어진 머리카락처럼 보일 것 같다고 했던 것이... 거칠고 심란하게 들렸던 파도 소리가 이렇게 부드럽고 편안하게 들리다니. 내 귀인가 아니면 바람인가... 창으로 날아들 듯 가까이 갈매기 한 마리가 날아간다. 내 인생에 이런 호사가 몇 번이나 더 있을까? 앞으로 한 번도 더 없다 해도 슬프거나 억울하거나 아쉬워하지 않기로 한다. 지금까지 주어진 것만으로도 감사하기로...
9시쯤 출발해서 9시 대 기차를 타면 적당할 것 같다. 1시간에 한두 대 있는 기차가 엄청 자주 있는 것으로 느껴지고, 놓치면 망한다는 절박함이 없으니 마냥 여유롭다. 여행자에게 한두 시간이 뭐가 대수랴, 안전하게 도착하면 됐지. 어떤 상황이든 적응하기 마련이지만 한 달 밖에 안됐는데 너무 빠르다 싶기도 하고, 그동안 강박 있는 사람처럼 긴장과 조급증에 시달렸던 건 어쩌면 잦은 이동과 절대 놓칠 수 없는 교통편 탓이기도 했다 싶다. 천성은 느리고 되도록 미루기 좋아하고 그런데... ^^
다른 빨래는 좀 꿉꿉해도 말랐다 할 수 있는 상태인데 양말은 아직 멀었다. 양말이 제일 말리기 어렵긴 하다. 산티아고 길 걸을 때도 양말을 잘 말려 신는 건 도전이었다. 이번 양말이 잘 마르지 않는 건 품질을 고려하지 않은 탓인 것 같기도 하다. 엄청났던 물집도 저급한 양말이 한 몫 하지 않았을까 싶고... 아무튼 또 장기 여행을 한다면 옷이든 양말이든 빨기 쉽고 잘 마르는 것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서 선택하겠다고 결심한다.
방문을 활짝 열었다. 복도 끝 방이라서 내 집처럼 문을 활짝 열고 지냈다. 사실 내 집에서도 미세먼지 때문에 문을 마음껏 열고 지내지는 못하는 형편인데... 소박하고 사람에 따라서는 궁색하다고 느낄 수도 있는 공간이었지만 나한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아무리 근엄한 척 해봐야 천진함을 숨길 수 없는 수녀님도 좋았고 밝고 명랑한 안나도 좋았다. 잘 지내다 간다, 체팔루.
어제 저녁으로 먹다 남긴 샌드위치를 들고 바로 방 밖에 있는 발코니로 나갔다. 비에 햇볕에 소금기 머금은 바람에 낡고 바래고 녹슨 테이블과 의자가 몇 개 있는데, 난 오늘도 그것들을 피해 발코니 난간에 서서 바다를 보며 샌드위치를 먹는다. 아프리카 여행에서 만나 좋아하게 된 언니 생각이 났다. 언니라면 하루를 있더라도 어떻게든 물걸레를 구해 쌓인 먼지를 깨끗이 닦고 편안히 이 공간을 즐겼을 것 같다. 난 3박4일을 있으면서 테이블과 의자들 사이로 비껴 다니며 발코니 난간에 잠깐씩 서있을 뿐이다. 언니가 공간을 아니 세상을 자신에게 맞추는 사람이라면 나는 나를 세상에 맞추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또 하게 된다.
수도원 입구에 처음 보는 청년이 앉아있다. 안나와 수녀님에게 인사를 못하고 떠나는 것이 아쉽다. 하지만 우리가 형식 없이도 마음을 알아 보고 주고 받을 수 있으며, 회자정리 정도는 이해할 만큼의 내공은 있는 사람들이지...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날 거고, 그때는 친구로 만나겠지...
[체팔루. 오른쪽은 시칠리아에서 가본 아이스크림 가게 중 유일하게 초코 그라니타가 있던 가게. 빠삐코 맛...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