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를 기억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 매번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데도 틀린다. 날짜도 기억하지 못할 만큼 정신은 없지만 바람직하게 생활하고 있다. 아니, 원하던 생활을 하고 있다, 저녁에 일찍 자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너무 피곤해서 절로 잠이 든다. 일기도 제대로 못 쓰고, 다음날 일정도 꼼꼼하게 확인하고 공부해야 하는데 못 버티고 기절하기 부지기수다.
언젠가부터 매년 신년계획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인데 그것을 못 지킨다. 갱년기 핑계를 대왔던 가벼운 불면증의 원인은 하루를 충실히 보내지 않았다는 자책감이었기도 하지만, 진짜 이유는 소진하지 못한 그날의 에너지였던 것 같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서 나는 새삼스레 발견한 이 당연한 답을 실천하며 살 수 있을까?
오늘 에트나에 간다. 그 에트나에 내가 간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시칠리아에 오고 싶었던 이유 몇 개를 꼽더라도 에트나는 빼놓기 쉽지 않은 곳...
이곳 사람들에게 에트나는 애증의 대상이라고 한다. 이름을 잘 부르지도 않고 아 문타냐a muntagna라고 한단다. 'a' 가 시칠리아 방언에서는 여성 정관사이고 muntagna는 산montagna의 시칠리아 방언... 그러니까 '그 산'이라고 부른다는 거다. 1669년의 대폭발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she who must not be named의 의미도 담겨있을 것 같다. 에트나는 여성이니까 she... 에트나는 유럽에서 가장 큰 활화산이고 세계적으로도 활동성이 높은 화산이고, 알프스 산맥 이남에 있는 이탈리아의 산 중에 가장 높은 산이라고 한다.
내게 에트나는 꿈처럼 들리는 단어이기도 했지만 시간여행 장치의 열쇠 같은 것이었다, 학창시절의 한 순간으로 돌아가게 되는... 학교 근처 지하철역 앞 건물 1층에 에트나라는 카페가 생겼다는 소식이 들렸다. 뭐든 흔한 지금과는 달리 당시에는 새로운 카페, 주점, 식당은 언제나 뉴스거리였고 관심과 순례의 대상이었다. 에트나라는 이름은 발음도 예쁘지만 알파벳의 구성도 특이하다 싶어 카페 사장님께 뜻을 물으니, 벽에 걸린 지도를 가리키며 이탈리아 시칠리아라는 섬에 있는 활화산이라 했다. 여행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하던 시절... 그 순간 에트나는 실존하는 존재임에도 환상이 되었던 것 같다. 아마도 그 환상이 한동안 그곳을 뻔질나게 드나들게 하는 데 한몫 했을 거다. 시간이 지나며 그 산은 신화 속 존재처럼 희미해졌고, 젊은 날 한 시절을 떠올리는 단어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그게 시칠리아에 관한 첫 기억이기도 하다. 나는 시칠리아를 에트나 화산이 있는 섬으로 처음 알게 되었구나 생각하니, 시칠리아 하면 마피아를 제일 먼저 떠올렸던 과거에 대해 왠지 덜 미안해 해도 될 것 같다.^^
투어 약속시간보다 일찍 숙소 1층에 있는 바로 내려와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바에서 아침을 먹고 가려고... 숙소의 아침 식사 시간 보다 일찍 나가야 하는 사람에게는 1층 바에서 아침을 먹을 수 있는 쿠폰을 제공한다. 서로 부담스럽지 않고, 합리적인 방식이다. 투어 가이드도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거리 길가. 서울로 치면 강남 대로에 앉아 있는 격이지 않을까. 자동차 소음이 엄청나다. 관광객이 활동하기에는 이른 시간. 카타네제catanese들의 모습이 보인다. 길 건너편 큰 건물convitto nazionale mario cutelli이 학교였나 보다. 어린애들은 어른이 데려다 주고, 조금 큰아이들은 혼자 온다. 그들이 벨을 누르니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 같이 굳게 닫힌 문이 열린다. 구글지도에 연결된 홈페이지를 보니 국립 기숙학교mario cutelli national boarding school란다. 홈페이지의 ‘the future has an ancient heart’라는 문구가 감동적이다. 미래는 오래 된 심장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미래의 심장은 과거다 쯤으로 번역되지 않을까... 요즘처럼 인류가 수천 년 동안 쌓아온 지식과 지혜를 구닥다리라고 폄하하고, 구세대를 싸잡아 꼰대라며 조롱하는 시대는 전례가 없는 현상이 아닐까 싶은데, 아무리 엉망이라는 오명이 있어도 오랜 역사의 지혜가 쌓인 사회는 다른 구석이 있구나 싶다. 부온 죠르니시모buon giornissimo! 어떤 아주머니가 누군가에게 그렇게 인사한다. 이탈리아어에서 '-issimo'를 형용사에 붙이면 최상급이 된다. 그러니 buonissimo giorno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아주머니는 명사를 최상급으로 만들어 버리셨다.^^
햄과 치즈가 든 크루아상과 이리스iris. 아란치노인가 했더니 이리스란다. 생긴 게 아란치노랑 똑같다. 안내서에서 카타니아 사람들이 아침으로 많이 먹는다고 보긴 했는데 실제로 보기는 처음이다. 새로운 것인데 먹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초코와 크림 두 가지가 있다는데, 내 선택은 웬만하면 초코. 짠·단의 순서를 지켜야 하니 일단 크루아상을 먹고, 이리스를 먹었다. 음... 초코 크림이 들어간, 빵이 두꺼운, 공 모양 시장 표 도너츠... 그런데 크기도 크고 듬뿍 넣은 초코 크림이 흘러 넘쳐 먹기도 불편하고 빵 부분이 두껍고 퍽퍽하다. 썩 인상적이지는 않다. 단팥 소의 존재를 알려주고 싶다. 이것도 잘 하는 데서 먹어야 맛있는 건가? 크루아상의 상태로 볼 때, 정성껏 만든 것을 파는 집은 아니다.^^ 삼분의 일은 남겼는데 그래도 칼로리가 도대체 얼마일지... 이 정도 먹었으면 에트나에서 조난을 당해도 24시간은 끄떡없을 거다. 어제 여행사 직원들의 태도로 봤을 때,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것 같지만...
흘리지 않으려 애쓰며 먹었는데도 크루아상 부스러기와 빵 가루가 테이블 여기저기에 떨어졌다. 심지어는 의자 위에도. 미국에서 지내던 시절, 햄버거를 얼마나 깔끔하게 먹느냐를 보면 미국 생활 구력이 보인다는 말을 했었는데, 유럽, 적어도 이탈리아에서는 크루아상 먹을 때 부스러기를 얼마나 안 흘리느냐로 구력을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