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에서 우리 기아가 만든 택시를 무심히 탈 수는 없다. 과묵해 보이는 기사 아저씨에게 차가 마음에 드냐 물었더니 좋단다. 그래서 한국 차인 걸 아느냐 물었더니, 안단다. 그래서 내가 한국 사람이라고 했더니 그러냐는 단답으로 대화할 의사 없음을 표현한다. 나도 저혈압이라 아침 컨디션은 별로다. 아저씨도 컨디션 좋을 시간이 아닌 걸로... ^^
기차역 매표소. 체팔루에 간다고 했더니 인터넷으로 검색할 때는 못 봤던 8시 49분 표를 준다. 10시 반에 메시나에서 체팔루 행으로 갈아타야 한단다. 검색할 때 봤던 9시 18분 기차는 빠른 기차라 요금이 거의 20유로인데, 이 기차는 12 유로밖에 안 한다. 배가 고픈데 아침 먹을 시간이 없기는 한데, 나쁘지 않다. 빨리 체팔루에 가서 맛있는 것을 먹으리라... 기차가 제 시간에 한대 들어 와서 열심히 달려갔더니 메시나 행이 아니란다. 전광판을 보니 메시나 행은 5분이 늦는다고 되어 있다. 또 조금 지나니 10분 연착으로 바뀌어 있다. 메시나 역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뜻이라 나쁘지 않다. 마음 한 구석에서 어쩌면 오래 기다릴 걱정이 아니라 환승 시간이 충분할까 걱정해야 할 걸 하는 소리가 들린다.
[타오르미나-쟈르디니tormina-giardini 기차역]
타오르미나 기차역taormina-giardini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기차역이라고 어딘가에서 들었다. 와 보니 왜 그렇게 말하는지 알겠다. 기차역이라는 것이 기능이 중요한 시설이지만, 멋도 포기하지 않은 곳이 많다. 이 역은 외관은 평범한데 실내 장식이 고풍스럽고도 예쁘고 사랑스럽다. 좀 생뚱맞아 보이는데, 심지어 홀 중앙에 유물도 전시하고 있다. 플랫폼 곳곳의 철제 시설물은 아르누보 스타일이다. 등도 아름답고, 기둥도 아름답고, 지붕도 예쁘고... 지금 흔해빠진 철도를 이용한 온갖 운송수단을 생각하면 기차역을 이렇게 까지 장식할 일이야 라고 할 수 있을 거다. 그런데 처음 생겼을 때 철도는 얼마나 신기하고 귀한 신문물이었을까... 그 시절의 경이와 감사가 철도 등장 초기에 만들어진 역들에 담겨있지 싶다. 이 역의 압권은 절경이 보이는 위치다. 경치 보러 올 수도 있겠다 싶게 좋다. 목적지까지 가는데 문제만 없다면 연착되어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해도 불만이 없을 것 같다.
기차는 바닷가로 간다. 안내 스크린에 1번 플랫폼이라 한다. 그 방향이면 남쪽으로 가는 건데 뭔가 이상하다. 그런데 곧 안내 방송이 나온다. ‘인베체’ 가 ‘대신에’ 라는 뜻인데 어찌나 잘 들리는지, 1번 대신 2번이라고... 그럼 이제 방향이 맞는다. 뒤 이어 영어 안내방송도 나온다. 그러게, 이제 영어로도 안내를 한다. 처음 이탈리아에 왔을 때는 이탈리아어를 한마디도 못했는데, 로마 테르미니 역에서조차 이탈리아어로만 플랫폼 변경 안내 방송을 해서 기차를 놓칠 뻔했던 게 떠오른다. 격세지감...
8시 59분. 전광판 대로라면 지금 기차가 와야 하지만 기차는 오지 않고 있다. 더 늦는다고 또다시 전광판을 바꾸는 일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지, 전광판은 바뀐 상황을 반영하지 않고 그대로 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시칠리아에서 가장 믿을 만한 교통 수단은 기차라 생각했었는데, 이곳 전광판에 시라쿠자 행 7시 31분 기차는 1시간 35분이 늦는다고 되어 있다. 시칠리아 기차를 못 믿는다고 했던 사람은 이런 일을 당했던 거겠지? 모든 평가는 주관적이니까... ^^ 9시 5분 도착 7분 출발. 17분 연착. 전광판은 끝내 그대로였다. 전광판을 세 번이나 정정하는 모양 빠지는 짓을 할 수는 없었나 보다.
기차 안을 보니 경찰이 검표원을 따라 다닌다. 이런 경우는 두 번째다. 난 또 어디로 가는 걸까? 메시나... 큰 도시이고 본토로 오가는 관문인데 아무도 여행지로 꼽지 않는다. 나는 시간이 없어 지나칠 뿐 메시나 해협이 궁금하긴 했다.
기차에는 일군의 피부색 짙은 사람들이 타고 있다. 이래서 경찰이 있는 건가? 앞 칸에 올랐다. 에어컨이 작동해 찜통은 아닌데, 빈 자리가 별로 없다. 마주보고 넷이 앉는 좌석에 이미 두 명이 앉아있다. 진행 방향을 등진 창가 좌석과 그 대각선 좌석이 비었다. 창가에 앉고 나머지 빈 자리에는 배낭을 앉혔다. 얼핏 몰상식한 관광객의 무도한 짓으로 보이지만 골육지책이라고나 할까... 안고 있을 수도 없고, 선반에 올릴 수도 없고 좌석 바닥에는 안 들어가고, 복도에 두자니 통행을 방해하고... 그런데 너무 당당히 의젓하게 자리를 차지한 폼이 우습다. 나와 마주앉은 아저씨는 다리를 어쩌지 못하고 안달이다. 여기는 아직 쩍벌남 교육이 없는지, 내 다리를 사이에 두고 다리를 벌리고 있다. 아, 불편하다.
쩍벌남 아저씨가 내렸다. 아저씨가 앉았던 자리로 옮겨 앉았다. 이제 제대로 오른쪽 바다를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과정은 매우 흥미진진해 할 말이 많아진다. 이탈리아 사람들만큼 수다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말만 통하면 어떤 상황에도 누구와도 수다를 떠는 것 같다. 남녀노소가 없다. 아기들도 말만 할 수 있으면 누구에게든 주저 없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 같다. 길 건너편에서 네 이름이 뭐냐고 당돌하게 외쳤던 꼬맹이 녀석도 있었다. 옆 칸막이의 아주머니들은 한 순간도 안 쉬고 수다를 떨더니 다정히 함께 내렸다. 보이는 모든 걸 휴대폰에 기록하고 있는데, 뒤통수에 시선이 꽂히는 느낌이 있다. 돌아보니 호기심 많아 보이는 청년이 내 모니터를 유심히 보고 있다. 몇 언어를 한다 해도 필시 아는 문자는 모두 알파벳일 테니 한글이 신기해 보이겠지. 실컷 보거라. 이거 보는 사람 바보 라고 쓰고 싶어진다. ^^
어떤 역에 선다. 지도를 보니 반 조금 못 왔다. 40분간 반을 못 왔으면 40분 후 떠나는 체팔루 행 기차는 못 탄다는 뜻이다. 갈아탈 기차를 기다릴 걱정이 아니라 못 탈 걱정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맞았다. 검색해보니 10시 40분 다음 기차는 12시 27분. 10시 40분 기차를 못 타면 거의 2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그래도 10분이 더 생겼으니, speriamo...
[메시나 중앙역]
헐, 기차가 역에 들어서서 어딘가 봤더니 메시나 중앙역이다. 굼벵이처럼 간다고 속으로 험담을 한 바가지 했는데 갑자기 번개처럼 기차역에 도착했다. 맞은 편에 앉았던 학생으로 보이는 아가씨가 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내며 메시나역임을 확인해준다. 그런데 담배갑 안에 든 것이 뭘까 싶다. 담배는 아닌데, 뭔가 가늘게 돌돌 말린 것이었다. 설마... 공공연히 꺼내는 것을 보면 나쁜 것은 아니겠지... 제발 아니기를...
10시가 조금 지난 시간. 체팔루 행 플랫폼을 확인하고 바로 향했다. 너무 배고프다. 재빨리 크루아상 하나쯤 먹을 시간이 되지 않을까... 기다리며 어떤 크루아상을 먹을까 열심히 골랐는데, 직원이 혼자 주문 받으랴 커피 만들랴 바빠 생각보다 느리다. 그냥 커피만 시키고 어제 먹으려고 샀다가 죽을 것처럼 달아서 맛만 보고 남겨둔 쿠키를 먹기로 했다. 포만감이 없어서 그렇지, 열량은 점심 먹을 때까지 충분하고도 남을 거다.
메시나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메시나 역에 대해서는 또 괜한 긴장을 했다. 험악할까 걱정했었는데 여느 역이나 다를 바가 없다. 팔레르모까지 가는 체팔루 행 기차는 이미 대기 중이었고 제시간에 출발했다. 이탈리아어 안내 방송은 서는 역을 모두 말해주는데 영어 버전은 마지막 목적지와 도착시간 만을 말하고 만다. 검표원이 왔는데, 검표원이 이렇게 잘 생겨도 되나 싶다. 저 청년이 이런 말을 억울해할 지 모르겠지만, 저런 외모면 100점 만점에 한 70점은 거저 먹고 들어갈 거다.
계속 바닷가로 간다. 이 정도 풍경이면 일부러라도 탈 만한 관광열차다. 숲이 우거진 산이 거의 없나 보다. 도시가 산 꼭대기에 있는 이유 중에 나무가 없어서이기도 한가? 전략적 위치도 위치지만 숲이 없으니 길을 내기도 터를 닦기도 쉽지 않았을까... 그런데 처음부터 그렇게 나무가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산도 있었던 것을 보면 또 슬픈 역사와 연관돼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지금 보이는 바다는 이탈리아 서쪽 바다 티레니아해다. 메시나까지는 이탈리아 남해안과 그리스 서해안 사이에 있는 이오니아해였다. 아그리젠토에서 본 바다는 지중해다. 삼각형처럼 생긴 영토의 세 변이 각기 다른 바다와 접해있고, 북쪽과 서쪽에는 유럽, 동쪽에는 그리스와 아시아, 남쪽에는 아프리카. 학교 다닐 때 많이도 들었던 표현인 지정학적 위치로 볼 때 한 때 세계사의 주요 무대였다는 것이 전혀 놀랍지 않다. 이과라서 세계사를 잠깐 얼렁뚱땅 배웠다 해도, 오랫동안 역사의 중심이었던 곳을 마피아가 설치는 땅 정도로 알고 있었다는 게 두고두고 신기하다. 내 무식에 대해 누굴 탓하랴만은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렇게 까지 노바디 취급을 해온 이유가 너무 궁금하다. 시칠리아 역사에 등장하는 어떤 세력도 이곳에서 벌어진 일들이 들춰내지는 걸 바라지 않는 걸가? 그 시절 자신들이 이 땅에서 한 일에 대해 자랑스러워 하지 않는 건가?
바다 멀리 섬이 보인다. 끝까지 고민하다 계획에서 뺀 에올리에 제도isole eolie인가 싶어 지도를 보니 맞다. 예전 같으면 누군가에게 물어 확인을 했겠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구글 지도가 있다. 지오이오사 마레아gioiosa marea라는 곳을 지나는데 해변이 너무 좋다. 아는 사람만 알 것 같은 작은 해변들도 너무 좋아 보인다. 이졸라 벨라에 왜 가 라는 말이 튀어 나온다. 이졸라 벨라... 기대를 너무 컸나 보다.^^
에올리에 제도까지 다녀오는 당일치기 투어가 있다. 섬에 와서 너무 땅만 밟고, 바닷물에 발은커녕 손도 안 담근 건 좀 너무한가? 하루라도 다녀오는 것이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려서 여행사를 알아봐야겠다. 메시나에서부터 꽉 차서 온 기차는 어느새 발 디딜 틈도 없이 돼버렸다. 어떤 여자가 배낭이 놓인 좌석에 앉고 싶다는 눈치를 보낸다. 배낭을 바닥에 내려 놓으니 그녀나 나나 다리를 제대로 놓을 틈이 없다. 어쩔 수 없다. 그녀는 팔레르모에 가는 길인데 오늘따라 유난히 사람이 많단다. 지도를 보고 예정시간보다 더 빨리 도착할 것 같아 잠시 위로를 받다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예정된 시간대로 정차하고 출발해야 하는 역이 있으니 늦을 수 있어도 빠를 수는 없다. ^^
바다가 진짜 좋다. 같은 칸에 앉은 동양 아가씨 두 명과 말이 잘 통하지 않음에도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가고 싶은지 계속 작업에 열중하던 아저씨, vorei vorei vorei al mare 라고 한다. 바다에 가고 싶어, 싶어, 싶어... 강조하고 싶을 때 부사 대신 같은 말을 반복하는 이탈리아식 화법...^^ 저 바다를 보러 가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메시나에서 팔레르모 구간 기차는 관광열차라는 이름을 붙여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철길이 어쩌면 이렇게 바다 가까이에 있을까 싶은 구간도 많아 해변을 너무 막 쓰는 것 아냐 하는 생각도 들지만, 고급 숙박시설이나 빌라가 해변을 차지하고 있는 것 보다는 철길이 있는 게 나은 것 같다.
체팔루에 가까워지니 기차가 산악지대의 산자락을 타고 가고 있다. 체팔루 남쪽에 마도니에madonie 산맥이 있다는 말 확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