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냥 머물고 싶지만, 사실 조금 더 머물러도 될 것도 같은데, 헝가리 커플이 함께를 강조하며 서두르는 바람에 일찍 함께 가이드를 만나기로 약속한 사피엔자 대피소로 내려왔다. 그런데 웬걸... 다른 네 명의 그룹을 기다려야 한단다. 그들은 일가족으로 보였는데 30분도 더 넘겨 나타났다. 관광객에게 30분은 무척 귀한 시간일 수 있다. 30분이면 근처 분화구silvestri crater에 다녀오며 또 다른 경치를 감상할 수 있었는데, 언제 올지 모르니 오롯이 주차장에 서서 보낸 것이다.
볼로냐에서 온 사람이 기다리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분화구 탐험에 주어진 시간은 겨우 한 시간 남짓... 그 절반의 시간을 주차장에서 소비하자니 그도 분통이 터졌을 수도... 가이드가 그래도 이렇게 편하게 짧은 시간 안에 화산을 볼 수 있는 곳이 다른 데는 없다고 변명인지 위로인지 모를 답을 한다. 맞다, 적어도 에디오피아의 다니킬 화산 투어에 비하면 에트나 투어의 난이도는 막말로 새발의 피도 못 된다. ^^
그들이 왔다. 남들을 30분 넘게 기다리게 할 수 있는 용감한 그들은 누구에게도 미안한 기색이 없다. 기다린 사람들에게 사과는커녕 인사도 없다. 그래 놓고는 빈 좌석 하나 없이 빽빽한 차 안에서 어찌나 큰소리로 수다를 떠는지, 미운 것들이 더 밉다. 경우 없는 인간들... 자기들끼리는 서로 사랑스럽고 소중한가 보다.
점심 먹으러 가는 자페라나zafferana라는 마을로 가는 도중 가이드가 일정이 늦어져서 미리 주문을 해놓겠다며 무엇을 먹을지 묻는다. 시칠리아나라는 시칠리아 전통 음식을 먹게 될 것인데, 치즈, 햄과 치즈, 라구 등 세 종류가 있다고 한다. 겨우 셋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뭔 말이 그렇게 많아야 하는지, 뭐 그리 어려운 선택이라고 이랬다 저랬다 난리다. 이게 이승의 마지막 끼니인 줄 아나 보다. 식당에 도착했다. 단체 관광객을 위해 마련된 테이블에 우르르 앉았다. 그런데 그것들이 이번엔 음료를 두고 이랬다 저랬다 하며 시간을 끈다. 아, 놔... 빨리 가서 로마 목욕탕 봐야 한다고, 이 답답한 인간들아... 라고 마음이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 같으면 앉자 마자 음식이 나왔을 것이다. 이럴 거면 뭐 때문에 미리 주문을 했을까 싶게 음식이 나오지 않으니, 말이 잘 통하지 않아도 대화를 할 수 밖에... 헝가리 커플과 마주 앉았는데, 헝가리라는 나라에 대해 아무 생각이 안 난다. 다뉴브 강에 유람선이 빠졌던 기막힌 사건이 생각나 그 사건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대뜸 미안하다고 한다. 당황스러웠다. 그런 반응을 기대한 게 아닌데... 그들이 사과할 일이 아니고 나도 사과를 받을 입장이 아니지 않나? 헝가리는 공동체 의식이 아직 강한 사회인가 하는 생각이 스치면서, 내가 만난 적지 않은 일본인들 중에 한반도 강점과 일본 제국의 만행에 대해 사과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게 떠올랐다. 개인적으로 시시비비를 가릴 일은 아니더라도, 헝가리인은 불의의 사고에 대해서도 일개 국민이 나라를 대표해 상대국 국민에게 사과하는데, 그 엄청난 만행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는 일본인을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는 게 새삼 놀랍고 생각해볼 여지가 있지 싶다. 예전에 누군가 헝가리로 음악 유학을 갔던 것이 생각나서 클래식 음악으로 유명하지 않냐고 했더니, 리스트가 헝가리 출신이란다. 몇 년 전 리스트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발매된 전집을 사서 고이 모셔두었는데 그가 헝가리 출신이었다니...^^ 헝가리어가 우리말과 같이 우랄 알타이어족에 속한다고 배웠던 기억이 났다. 그래서 혹시나 어순이 같을까 싶어 물어봤더니, 어순을 기준으로 구분하는 건 아닌가 보다. 무엇으로 어족이 분류되는지 아는 것도 없고 그걸 찾아낼 만큼 대화가 원활하지 않아 가벼운 수다를 떨며 음식을 기다렸다. 아무래도 여름 휴가철에 렌터카로 시칠리아를 여행하는 건 아닌가 보다. 이들도 카타니아에서 주차장 찾으며 두 시간을 헤맸단다. 저녁에는 아치레알레라는 곳에 갈 거란다, 그곳에 유명한 해산물 레스토랑이 있다며... 어떻게 하다 시네마 천국 이야기가 나왔고, 다들 아는데, 헝가리 커플은 그 영화를 모른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 시칠리아를 여행하며 시네마 천국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 ^^ 그들을 보면 4박5일의 짧은 일정임에도 매우 느긋하다. 나도 두세 시간 거리에 살았다면 그랬을까?
시칠리아나라는 음식은 처음 들어봐서 뭔가 했는데, 칼조네calzone 튀김이라고 보면 틀리지 않을 것 같다. 만두를 찌기도 하고 튀기기도 하듯이 칼조네를 기름에 풍덩 담가 튀겼다. 이곳 사람들도 군화도 튀기면 맛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그냥 구워 주었으면 맛있게 잘 먹었을 텐데... 너무 느끼해 아무리 먹어도 반을 못 먹겠는데, 체구도 크지 않은 헝가리 커플은 맛있다며 기름이 줄줄 흐르는 그 거대한 튀김을 다 먹는다. 잘 먹고 잘 소화해서 힘도 좋고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들, 부럽다.
자페라나는 에트나 남동쪽 산자락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돌아와서 사진으로 보니 교회가 있는 광장도 예쁘고 에트나를 배경으로 하는 마을 풍경이 예쁘다. 잠깐이라도 마을을 돌아보면 좋았을 것 같은데 그냥 밥만 먹고 떠났다. 그럴 것 같으면 그냥 카타니아로 올 것이지 그곳은 뭐 하러 들렀을까... 개인적으로 다시 갈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좀 돌아볼 수 있냐고 물어보기라도 할걸 그랬다.
갈 때 제일 먼저 태우더니 내려줄 때도 제일 먼저 내려준다. 나름의 룰이 있는 것 같다. fair... 여행 가이드가 대개 다 그렇지만 파올로는 밝은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다. 굳이 운전석에서 내려 배웅을 해주며 만나서 좋았고 꼭 다시 만나길 바란다는 인삿말을 건넨다. 가이드, 택시 기사, 숙소 호스트 등과 제법 많은 이별을 했지만 다시 만나길 바란다는 인사는 처음 듣는 것 같다. 나도 한 적이 없다. 나는 언젠가부터 그런 인사말을 의식적으로 피한다. 아무리 진심이어도 빈말이나 다름없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 수없이 만나고 헤어지며 그런 바람이 얼마나 이루어지지 않는지 알게 됐고, 의미 없는 말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허무가 남는다는 것을 깨달으며 빈말을 되도록이면 하지 않는다.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겠지 라는 말이 내가 건네는 최대의 표현이다.
카타니아에 다시 온다 한들 파올로를 다시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zero에 가깝겠지... 그런데 그 인사말에 기분이 좋아진다. 인삿말인데, 그냥 진심이면 충분한 거지... 더 생각할 게 뭐가 있을까? 고작 마음을 전하는 인삿말에 다시 만날 확률을 들먹이는 사람이 된 건 어쩌면 지나치게 미래를 사는 경향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너무 앞서 앞날을 예측하고 대비하는 경향. 과거를 사는 것만큼 미래를 사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덕분에 큰 낭패를 보는 일은 많이 없지만, 늘 일어나지 않을 수많은 가능성을 생각하느라 생각이 많은 것... 그냥 현재를 최대로 사는 법을 모르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