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0/2020

시칠리아 여행: 24: 타오르미나: 그리스 극장 Teatro Greco





그리스 극장에 갈 생각인데 일단 밥을 먹어야 할 것 같다. 숙소가 움베르토 거리에 있어서 문만 열고 나가면 레스토랑, 카페, 상점들이 넘쳐난다. 두오모 쪽으로 조금 걸으니 신도시 맛집 분위기의 식당들 틈에 1950년부터 있었음을 자랑하는 식당ristorante il ciclope이 있다. 노포의 이유가 있겠지 하고 들어갔는데 그냥 편안한 분식집 분위기다. 구운 파프리카와 해물 리조토를 시켰는데, 맛있고 여직원의 명랑한 기운이 보는 사람에게도 전해진다.

점심을 먹고 나니 어느새 세 시가 넘었다. 그리스 극장teatro greco에 가서 노을질 때까지 있다가 오면 되겠다 싶다. 가는 길에 카스텔몰라castelmola 가는 버스 정류장과 시간표를 확인하러 관광안내소에 들렀다. 숙소 직원에게 물으면 될 일인데 숙소에 사람이 상주하지 않는 게 이럴 때 아쉽다. 관광 안내소 직원이 마지못해 엉성한 지도에 대충 위치를 표시해 준다. 너 같으면 이래서 찾겠니 라고 물어 보고 싶었다. 혹시나 하며 그 지도를 들고 나와 위치를 찾아보려 했으나 정말 아무런 가치도 없는 정보였다. 결국 묻다 보니, 카스텔몰라 가는 버스도 버스 터미널에서 타면 됐다. 시간을 확인하려 버스 터미널로 갔는데, 비싼 투어버스hop on-hop off를 알려주며 눈뜬 사람 코를 베어가려 한다. 이것들을 확~^^ 드디어 매표소를 찾아 물어보니 매 시간 40분에 버스가 있다고 한다. 비싼 투어버스 시간표는 찾지 않아도 보이는데, 싼 보통 버스 시간표는 물어봐야 겨우 알 수 있다. 세계적 관광지라고 하니 애교로 봐주기로 한다.




시칠리아 야외 유적지들은 매표소 문은 일찍 닫아도 폐장 시간은 일몰 시간인 곳들이 있다. 이곳 그리스 극장도 그렇다. 이 극장은 로마시대에 완전히 다시 지어진 그리스식 반원형 극장인데 시칠리아에서 두 번째로 크다고 한다. 지름이 106미터. 벽돌로 지어져 로마시대 극장처럼 보이는데, 토대가 그리스 극장이라 그리스 극장이라고 부르나 보다. 대리석 등 마감재가 홀딱 벗겨져 벽돌이 다 드러나있고, 벽돌 구조물이 무너져 내린 모습이 스산해 보인다.




이 참에 알게 된 그리스 극장과 로마 극장, 로마시대의 원형 극장과의 차이는 이렇다. 그리스 극장의 특징은 무대가 원형이고 계단식 관람석이 원형 무대를 반 원형으로 에워싸는 것이 기본이란다. 그런데 관람석의 계단을 쌓아 올린 것이 아니라 자연 지형의 경사를 이용했단다. 그러니 현재 남은 극장들이 도시 안에 있기 보다는 한적하고 전망이 좋은 곳에 있는 것이다. 나중에 원형 무대는 반원형으로 변하기도 했고, 합창단이나 오케스트라 석으로 바뀌고 반원형 좌석의 지름에 해당하는 곳에 무대와 분장실 등의 구조물을 따로 설치하기도 했다. 로마 극장, 즉 로마 시대에 지은 그리스 식 극장은 그리스 극장과 구조는 같은데 자연 지형을 이용하지 않고 관람석을 계단식으로 건설했다는 점이 특징이란다. 마지막으로 로마 원형극장은 다른 장르다. 좌석이 반원형이 아니고 그야말로 원형이다. 원형의 중심 가장 낮은 곳이 무대이고 공연의 종류가 완전 달랐다고 한다. 연극, 음악회, 시 낭송 등과 같은 공연을 했던 그리스 식 극장과 달리 원형극장에서는 검투사 싸움, 전차 경주 등이 벌어졌단다.
 



이 극장에서 보이는 경관을 말할 때 breath-taking, dramatic 같은 수식어가 사용됐었다. 알고 보니 그리스 극장은 태생적으로 경치가 좋은 곳에 위치할 수 밖에 없는데, 이곳은 특히 더 경관이 좋을 거라는 인상을 받았었다. 이 극장이 그렇게 자랑하는 경관은 극장 좌석에 앉으면 왼쪽으로는 바다가 보여야 하고 오른쪽에는 에트나 화산이 보여야 그런 수식어에 어울리는 장관이 완성되는데, 흐린 날은 아니어도 하늘이 뿌예 바다도 선명히 보이지 않고 에트나 화산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맑은 날에는 북동쪽으로 칼라브리아에 있는 산까지 보인다는데 언감생심이다.
 



극장도 보존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데다 공연장으로 사용하려 만들어놓은 좌석과 무대 때문에 유적의 정취를 많이 잃었다. 이곳에서 공연을 본다면 다른 이야기일 것 같은데, 백주 대낮, 모든 것을 소상히 비추는 태양아래에서 유적으로서의 매력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 동안 좋은 것을 많이 봐서 눈이 한껏 높아진 까닭일 수 있을 것 같다.
 



정면에 바다가 있지 않아 바다가 그렇게 멋있게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모두들 멋있는 바다 풍경을 기대하는지 바다가 조금이라도 더 잘 보이는 곳을 찾는 눈치다. 오늘은 아무리 찾아봐야 별 소용없다. 연무 때문에 하늘과 바다가 잘 구분이 안 된다. 멀리 보여야 할 에트나 화산도 보이지 않는다. 좌석 꼭대기에 벽돌 쌓아 만든 화단처럼 생긴 곳이 있다. 사람들이 그곳에 올라가 사진을 찍길래 나도 올라갔더니 안내원이 내려오라고 손짓이다. 나중에 사진에 찍힌 안내원의 모습을 보니 사진을 찍는 동안 험상궂은 표정으로 나를 향해 오고 있었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다고... 보존해야 할 것으로 보였으면 올라가겠니? 극장 주변 풍경을 돌아보았다. 타오르미나 동쪽 높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어 한 바퀴 돌면 타오르미나 동서남북 전경을 다 볼 수 있다. 하늘이 투명했으면 느낌이 달랐을 것 같다.


[타오르미나. 하늘이 맑았다면 흰 구름 대신 에트나 화산이 보였을 풍경]

[타오르미나. 왼쪽 봉우리 절벽 끝에 교회chiesa madonna della rocca, 중간 봉우리 꼭대기에 사라센 성castello saraceno, 오른쪽 봉우리 절벽에는 카스텔몰라가 흐릿하게 보인다]



극장을 빙빙 돌고 오르내리며 풍광을 감상하다 노을이 잘 보이는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람들이 어느새 다 빠지고 몇몇 하드코어들만 남아 고즈넉한 분위기가 살아났다. 해가 내려가서 에트나 화산 뒤쪽을 비추니 안개 낀 듯 뿌연 하늘에 가려 보이지 않던 에트나의 웅장한 외곽선이 드러난다. 어제 저곳에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눈에 보이긴 하지만 닿을 수 없는 곳 같다. 드디어 이 공간과 이 순간이 감동적이다.






호루라기 소리가 들린다. 호루라기 소리를 몇 번 듣고서야 일몰 시간이 지나 나갈 시간을 알리고 있음을 자각했다. 잠깐 무념의 시간이 아니었다면 이곳을 좋아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다 싶다.

극장 오른쪽에 예쁘긴 하지만 소박한 입구가 있다. 들으면 알만한 온갖 사람들이 다녀간 호텔의 입구라고 한다. 입구만 봐서는 그렇게 유서 깊은 호텔인지 전혀 알 수 없다. 무슨 드라마를 찍었는지, 어떤 연예인이 다녀갔는지 더덕더덕 붙어있던 장소들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