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까에서 디아나 신전이 주인공일 수는 없을 것 같다. 기둥 하나도 없이 그냥 ‘카더라’ 통신처럼 허무...
로까의 하이라이트는 노르만 시대에 쌓았다는 성벽 아래 펼쳐진 체발루의 전경이다. 대성당과 마을 지붕들과 옛 항구porto vecchio, 룽고마래lungomare 해변이 한 눈에 들어온다. 하늘, 바다, 산,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 다른 곳에서도 보이지만 이곳에서는 특히 성당의 평면을 위에서 온전히 내려다 볼 수 있다. 이 경치는 말로 설명할 수 없고, 카메라에 담기지도 않는다. 풍경을 바라보기만 해도 분에 넘치는 호사를 누린다 싶고, 감사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
성벽을 따라 계속 걸어보고 싶어서 나가는 길을 지나쳐 걸었다. 수많은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지만 또 다른 각도의 도시의 모습을 보여준다. 나 말고도 걷는 사람이 어쩌다 한두 명 있다. 피끼딘디아 선인장이 사방에 있다. 시칠리아에서 척박하다 싶은 땅에는 이 선인장들이 보인다. 얘들을 어떻게 찍으면 예쁠까 바다를 배경으로, 하늘을 배경으로 마을을 배경으로 실컷 찍었다. 성벽 경로는 로까에서 내려가는 길과 연결되지 않을까 하는 바람과 달리 막다른 골목이 끝이었다. 왔던 길을 되돌아 나와서 로까를 내려왔다.
체팔루 풍경에 배경으로 등장하는 로까는 마을 동쪽 끝에 있는, 높으니 당연히 전망이 좋은 커다란 돌산인가보다 했다. 그런데 그냥 돌산은 아니었다. 라 로까la rocca라는 이름에도 그런 뜻이 담겨있다. the rock, 그 바위... 일단 보기보다 훨씬 넓고, 비록 돌 더미로 변해 형체는 별로 없어도 긴 역사가 압축되어 담겨있고, 그 역사가 느껴지는 장소였다. 디아나 신전은 원래 시칠리아 토착부족 시카니sicani의 성소를 그리스인들이 자신들의 신전으로 개조한 것이란다. 시카니 부족이 신에게 제물을 바친 곳으로 추정되는 수조의 유적이 남아있다. 비잔틴 제국이 지배하던 시절 이슬람 세력의 공격을 피해 마을을 버리고 이곳으로 올라와서 생활한 흔적도 있다. 이슬람 시대와 노르만 시대에는 이곳에 성채가 지어지고 망루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적장이 이곳을 차지했다면 정말 흐뭇한 미소를 지었겠다 싶을 만큼 360도 전망이 속속들이 보인다. 어떤 장소에 대해 책이나 다른 매체를 통해 알게 되는 것과 실제로 보고 느껴 아는 것은 정말 다르다. 로까는 특히 더 그런 것 같다. 2차원이었던 것이 3차원으로 부풀어 오른 듯한 느낌.
나오는데 매표소를 지키는 아까 그 여직원이 표를 보여달라더니 번호가 빼곡히 써 있는 공책에서 표 뒤에 쓰여있는 번호를 크로스아웃 한다. 아까부터 궁금했던 참이라 이유를 물으니, 나간 사람을 체크하는 것이란다. 이렇게 꼼꼼하게 관리를 한다고?^^ 그런데 그럴만하다. 가파르고 돌산이라 안전사고의 위험이 높고, 사고를 당하면 도움을 청하기 어려울 만큼 충분히 넓고 외진 곳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