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떠졌는데 맞은 편 방에서 굵고 거친 목소리가 들린다. 다소 격앙된 어조다. 가만 들어보니 대화는 아니고 전화로 이야기하는 중이다. 어떤 언어인지조차 알아들을 수 없는 생경한 어조. 통화는 계속 이어진다.
씻고 아침을 먹으러 나왔다. 당장 인테리어 잡지를 촬영해도 거슬릴 것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식당. 열어놓은 창으로 마씨모 극장이 다 들어온다. 입방정 떨다 동티날까 그 동안 참았던 말을 하기로 한다, 이곳이 마지막 숙소니까. 이번 여행에서 숙소 복은 있는 것 같다.
이미 테이블을 다 세팅해 놓았다. 커다란 테이블 한 쪽에 은제 촛대가 놓여있고, 말린 식물이 풍성하게 담긴 금속 화병 양 쪽에 빨간 줄무늬 러너가 깔려있다. 그 위에 은쟁반, 은제 티팟, 유리 저그, 하얀 도자기 접시와 잔, 보르미올리 유리병, 스템이 있는 은 그릇 등등에 오렌지 쥬스, 차, 비스킷, 버터, 잼, 토스트 등이 품위 있게 담겨있다. 오렌지를 스템이 있은 은제 그릇에 담아 놓으니 다른 오렌지로 보인다. 물론 요구하는 비용을 지불하고 받는 서비스지만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정성을 넘어서 철학이 없으면 이렇게 못한다 싶다. B&B라는 형식을 빌어 시칠리아의 삶의 한 단면과 hospitality를 알리고 보여주고 싶은 것이 아닐까... 시칠리아를 바라보는 시선에 덧씌워진 색안경을 벗기기 위해 시민으로 할 수 있는 일쯤은 하자는 사명감으로 하는 일일 수도... 어딘가에 이렇게 작은 B&B를 열어 정성껏 후하게 대접하며 살고 싶어진다.
새벽녘 벽을 뚫고 들리던 목소리의 주인공으로 보이는 남자가 아침을 먹고 있다. 인사를 하니 짧게 받고 다시 접시에 집중하며 밥을 먹는다. 말 시키지 말라는 뜻이 읽힌다. 목소리로 예상됐던 딱 그 모습이다. 내가 아무하고 아무 이야기나 다 할 수 있는 사람이긴 하지만, 때로 나도 가리고 싶은 사람은 있다.^^
발레리아가 이미 차려두지 않은 음식을 날라다 준다. 빵, 치즈, 햄, 커피... 따끈한 밥과 국이 있는 아침상만큼이나 이렇게 먹는 아침이 좋다. 품위 있게 차려진 상에서 먹으니 같은 음식을 먹어도 느낌이 다르다. 실용적인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형식이 좀 있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남자가 먼저 먹고 일어서 나간다. 공간의 공기가 달라진다. 발레리아가 와서 더 필요한 것이 없느냐고 묻는다. 바스따basta(enough)라고 대답하니, 눈이 동그래지며 파스타pasta?라고 되묻는다. ‘바스타!, 파스타?’ 를 몇 번 반복하고 나서야 뜻이 통했고, 웃었다. 우리 ㅂ 발음이 p 소리로 들린다는 말을 여러 번 듣기는 했는데, 그 말의 증거를 이렇게 수집...^^ 그래도 그렇지 이 아침에 파스타라니... 보고 싶은 대로 보이고 듣고 싶은 대로 들리는 것... 내일은 어떤 아침을 준비해줄까 묻는다. 안타깝게도 내일은 일찍 나가야 해서 아침을 먹을 수 없다.
공간과 창밖 풍경이 좋아 마냥 앉아서 순간을 즐기고 싶다. 그나마 아침에야 마음의 여유가 있다. 막상 숙소를 나서 관광이 시작되면 고요함을 순간을 즐길 여유가 사라진다. 찾아야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찾을 수가 없다.
나오는 길에 발레리아가 더는 못 볼 수도 있다고 작별인사를 한다. 내일 아침에는 내가 일찍 나간다니 못 만나고, 오후에는 자신이 라구자에 있는 집에 갔다 주말을 보내고 온단다. 다시 만나는 인연이 있었으면 좋겠단다. 어제 카포시장에서 피키딘디아 먹었던 이야기를 떠듬떠듬 이탈리아어로 해주며 뜻이 전달되고 있는지 너무 궁금하다. 이해했느냐고 물으니, 너무 잘 알아들었단다.^^ 어느 순간에도 시칠리아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느껴진다.
언어의 장벽이 안타까울 만큼 그녀의 이야기가 궁금하고, 여러 생각을 일깨웠다. 사랑과 자부심의 대상이 될 자격 같은 것이 있다는 생각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만 그 생각을 버리려 하지만 아직 멀었구나. 이유가 없어야 사랑이라는 것. 사랑에 이유가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인연이라는 것. 자랑스럽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자랑스럽다는 것. 내 아이덴터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사랑은 채워주길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채워주겠다는 의지라는 것. 진짜 사랑은 약함, 비겁함, 이기심, 욕심 등을 걷어내야 가능하다는 것... 사랑은 결국 운명을 사랑하는 것... 그래서 연자 언니가 신나게 노래하잖아... 아모르 파티amor fati, 네 운명을 사랑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