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8/2020

시칠리아 여행: 21: 라구자: 카타니아 가는 길



택시가 왔다. 기사 아저씨도 나와 대화할 의사가 없어 보였지만 나도 누군가와 말을 트고 싶은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정든 고향을 떠나 치열하고 삭막한 도시로 객지 생활하러 가는 기분이라고 할까...

안녕, 라구자...

버스 터미널은 기차역보다 한참 더 멀다. 걷지 않길 잘했다 싶다. 기사가 코팅된 요금표 보여주며 오늘은 일요일이니 13유로를 내란다. 보통은 10유로. 도시 외곽에 있는 기차역이나 버스 터미널에서 시내까지는 10유로가 시칠리아 공식 요금인 것 같다.

매표소 겸 대합실로 보이는 곳에 들어오니 택시 요금표가 붙어있는데 그냥 10유로다. 설마 관광객 속여 3유로 더 받자고 가짜 요금표를 만들어 코팅까지 해서 가지고 다니겠어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요금표를 이렇게 붙여놓은 걸 보면, 바가지가 있으니 숙지하고 바가지 쓰지 말라는 뜻이지 싶다. 그렇다면 바가지 쓴 것? 그런데 매표창구에 아무도 없어 확인 불가능... 그런데 그렇게 까지 치사하지는 않을 것 같고, 혹시 그렇다 해도 의지가지없는 이방인을 늦지 않게, 사실 매우 이른 시간에 무사히 목적지에 데려다 준 것만으로도 크게 아까울 것 없는 액수다 싶다. [나중에 사진 찍어둔 요금표를 자세히 보니, 일요일이나 공휴일에는 30% 오른다는 말이 요금표 하단에 작은 글씨로 쓰여있다. 이방인을 환대하는 전통이 남아있다는데 택시요금을 바가지 씌우겠냐고... ^^]

버스 시간 45분 전에 도착했는데, 나보다 먼저 온 아주머니가 한 분 계신다. 루마니아에 가는 길인데 카타니아 공항에서 비행기를 탈 것이란다. [한 달 동안 여행하며 끝내 이해하지 못한 게 시칠리아 버스 시스템이다. 매표소에서 표를 사야 하는 경우도 있고, 담배가게에서 표를 사는 경우도 있고, 매표소에서 표를 팔아도 기사에게 사도 되는 경우도 있고, 매표소가 있어도 기사에게만 표를 사는 경우도 있고... 정류장도 고유 버스정류장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고, 터미널이 있는 경우도 있고, 터미널 근처 따로 떨어진 정류장도 있고... 그리고 시간과 노선을 알아보려면 각 버스회사별 홈페이지를 찾아서 검색해야 한다. ]

아무튼... 루마니아 가는 아주머니가 매표소 창구가 닫힌 것을 보고 어디서 표를 사나 걱정이시다. 뭐라뭐라 하는데 다는 못 알아 듣겠고, 요지는 근처에 있는 바와 담배가게에 같이 가보자는 것 같다. [바나 담배가게에서도 표를 파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가보자 했더니, 아주머니는 당신의 짐을 가리킨다. 헐... 당신은 짐이 있으니 나보고 갔다 오라는 이야기였나 보다. 나 착하게 생겼나? 내 등 뒤에 있는, 아주머니 짐 두 배만한 배낭이 안 보였을 리는 없고, 그만한 짐쯤이야 가뿐히 지고 다닐 만큼 내가 젊고 튼튼해 보이나? 어이는 상실했지만 연로한 아주머니가 노심초사 하니 가주자 하고 다녀오마 했더니, 순간 염치가 돌아온 건지 아니면 내가 못 미더운지 짐과 주변을 번갈아 살피다 따라 나선다. 애초에 표를 어디서 살지는 내 문제가 아니었다. 매표소가 닫혔으니 당연히 기사에게 사면 되겠지 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아주머니 청을 거절하지 않고 들고 내릴 때마다 휘청거릴 만큼 무거운 배낭을 메고 근처를 헤맬까? 바도 담배 가게도 모두 닫혀있다. 일요일이라 그런 것 같다.



[라구자 버스 터미널]


밖은 너무 땡볕이라 매표소 안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데, 직원이 와서 창구를 열고 표를 팔기 시작한다. 아주머니도 와서 표를 사간다. 어디를 많이 다니시지 않나? 동네 사람이 왜 이걸 몰랐을까? 매표창구 옆에 앉아있다 보니 사람들이 어디 가는지 알게 된다. 다 10시 버스로 카타니아 가려는 사람들이다. 시간이 가까워 오니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버스 승객이 제법 많을 것 같다. 내 자리는 있겠지...

배구선수 김연경 목소리가 들린다. 돌아보니 생김새도 키도 김연경이다. 인종을 뛰어넘는 유전자 패턴이 있는 것 같다. 그녀의 아들로 보이는 남자아이의 팔다리 길이가 놀랍다. 저렇게 가늘고 긴 팔다리는 본적이 없는 것 같다. 모여든 사람들을 보니 시칠리아에는 정말 다양한 인종이 사는 것 같다. 트라파니에서 만난 알레시오의 눈에는 저들이 어디 출신인지 보인다는 거지? 신기하다. 4분이 지나고 있는데 버스는 오지 않고 어제 갈 걸 했던 돈나푸가타 행 버스가 와서 몇 명의 사람들을 태우고 떠난다. 라구자 수페리오레가 그렇게 무미한 줄 진작 알았다면 저길 갔을 텐데... 또 아쉬움이 도진다. 발 때문에 안 가길 잘했는데 수페리오레 탓을 하고 있다.

버스는 10분이나 늦게 왔다. 혼자였다면 안달복달하며 기다렸을 텐데, 기다리는 사람이 터미널에 한바닥이니 혹시 안 오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안 된다. 부지불식간에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가 되는 거다. 기사 아저씨는 늦게 와놓고도 천천히 짐 싣고 세월아 네월아 표 검사 하고 동료들과 수다 떨 것 다 떨고 그러고 출발한다. 속 터지게 꾸물거리는 것으로 보였는데, 시계를 보니 13분 걸렸다. 신기하다. 13분이면 가질 수 있는 여유였다. 배웅 나온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포옹하고 쓰다듬고 입맞추고 아쉬워하며 떠나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다. 세상 부러운 것 없다 하며 살다가도 저런 온기를 나누는 모습은 언제나 부럽다. 고기에 밴 맛도, 채소와 과일에 든 맛도, 생선과 해물에 든 맛도, 꿀의 향기도 다 더 진하고 뭐 하나 싱거운 게 없다. 심지어 소금도 더 진하고 짜단다, 다른 소금에 비하면 반만 넣어도 될 만큼. 그리고 햇볕과 사람의 성격과 마음까지도... 이 섬의 모든 것은 다 더 농밀한 듯... 내게 그런 삶은 틀린 일. 이번 생은 쿨하게 살고 저런 삶은 다음 생을 기대해 보기로...^^




창밖 풍경이 좋다. 산기슭부터 구획 정리된 구릉지대가 펼쳐있다. 사실 무엇이든 좋아할 준비가 되어 있어 좋아 보이는지도...

고속도로 중간 주유소가 정류장인지 내리는 사람들이 있다. 내리는 사람 중 누군가 표를 받지 않았는지 굳이 불러서 표를 챙겨 준다. 차비를 냈으면 된 것 아닌가? 표는 다시 필요도 없던데. 전에도 그러는 것을 본적이 있다. 그들은 표를 다시 쓸 곳이 있는 걸까? 졸다 일어났더니 풍경이 바뀌었다. 여전히 나무가 없는 구릉지대라는 점은 같은데 더 푸르고 짙고 수분이 있어 보이고, 비옥해 보인다. 에트나 지역에도 포도밭이 많은 것 갔던데 지형이 확실히 더 짙푸르러진다.





시라쿠자 가는 길에 잠시 보게됐던 카타니아. 제발 역을 벗어난 지역은 다르기를 기대하지만, 시라쿠자 인형극 극장에서 만났던 프랑스 여행자가 조심스럽게 여기저기 슬럼화된 듯하다고 했었고, 잠시 스치며 받았던 느낌도 그 이야기와 다르지 않아서 그저 안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된다.

나무로 가득한, 숲이 우거진 산이 나타났다. 우리나라에서는 숲과 산이 동의어 같은 느낌인데, 다니다 보니 그렇지 않은 곳이 많이 있었다. 평평한 숲도 많았고, 나무가 없는 산도 많았다. 그래도 여전히 나무가 없는 산은 이상하다. 산에 나무가 없으면 아무리 높아도 자꾸 언덕이라고 부르고 싶다. 드디어 포도밭도 보인다. 렌티니 라는 곳을 지나고 있다. 삼분의 이 정도 왔다. 이제 30분 남짓 가면 카타니아에 도착한다. 이제 완전히 좌우로 평평하게 펼쳐진 평원을 지나고 있다. 시칠리아 지형은 정말 다양한 것 같다. 아프리카 사바나 평원부터 에디오피아 산악지대까지 다 있다.




카타니아 공항. 사람이 엄청나다. 시라쿠자 가던 날의 대혼란이 떠오른다. 공항을 빠져 나오며 카타니아 항구를 지난다. 항구 주변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갑자기 그 풍경에 숨이 막히는 듯하다. 꿈속을 헤매다 현실로 돌아온 느낌... 모두 필요하니까 존재하는 시설일 거다. 인간의 삶이 점점 얼마나 더 비대해지고, 점점 얼마나 더 복잡해지고, 점점 얼마나 더 이해할 수 없어지는 건지 모르겠다. 차가 엄청나게 막힌다. 시칠리아 최악의 교통체증. 카타니아라는 새로운 도시에 대한 기대나 설렘이 없다. 대도시여도 팔레르모에서는 신이 났었는데 이곳에 대해서는 해야 할 숙제를 빨리 하고 벗어나자 하는 마음이 된다.




나란히 서있는 거대한 사일로에 그래피티가 그려져 있다. 나중에 찾아보니 곡식 무역회사silos granari della sicilia에서 전문 예술가들을 초빙해 그린 작품이라고 한다.


P.S. 라구자 이블라에서 카타니아 가는 교통편


라구자에서 카타니아까지는 기차와 버스로 갈 수 있는데, 버스가 빨라서 버스로 이동(일요일에도 운행).

  • 버스: Etna Transporti. 홈페이지에서 시간 확인.
  • 라구자 버스 정류장: 버스 터미널이 있다. 주소: Via Zama, 53, 97100 Ragusa (라구자 이블라에서 버스 터미널까지 택시로 이동. 평일 10유로, 휴일 13유로)
  • 카타니아 버스 정류장: 카타니아 중앙역 근처 버스 터미널.


[라구자 버스 터미널. 구글 지도]

[카타니아 버스 터미널. 구글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