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써야 할 에너지가 아직 남았거나 오늘을 끝으로 시칠리아의 바로크 컨트리를 떠나는 아쉬움이 밀려오나 보다.
수페리오레가 이렇게 싱거울 줄 알았으면 일찍 시클리scicli나 돈나푸가타donnafugata에 다녀올 걸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수페리오레는 다녀오는 길에 오며 가며 봤어도 충분했을 것 같다. 오늘 아침에 느긋한 하루를 보내겠다 그렇게 다짐했건만 다 소용없다. 별로 아끼는 것 없는 와중에 가장 아끼는 것이 시간이기는 하지만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시간을 아까워하는 사람이 됐나 싶다. 미리 알고 계획했더라도 발을 생각해서 취소하고 쉬는 편이 앞으로 남은 일정을 위한 현명한 결정이었을 텐데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떠나오기 전 계획을 세울 때는 한가로운 여행을 하겠다 생각했었다. 시칠리아가 어떤 곳인지 잘 몰랐을 때 할 수 있었던 생각이다. ^^ 이번 여행에서 휴식같은 느긋한 여행은 앞으로도 틀렸다 싶다. 지키지 못할 다짐을 계속 하느니 차라리 여유 있는 여행에 대한 생각을 접어야겠다. 여유 있는 여행은 시칠리아에 한 세 번쯤 온 다음에 하는 걸로...
사람들이 터를 보는 이유를 라구자와 모디카의 상반된 느낌으로 알 것 같다. 둘 다 난생 처음 와보는 곳이기는 마찬가지인데 모디카에서는 하루도 머물기 싫더니 이곳에서는 며칠이라도 빈둥거리며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보내고 싶다.
가는 곳마다 후다닥 돌아보고 떠나야 하니 계속 아쉬움이 남고 자꾸 다음을 기약하게 된다. 유럽을 열흘에 일주(?)하는 판에, 우리나라보다 작은 섬을 한 달 동안 여행하는 거면 그만하면 됐다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세상에 안 가본 곳이 얼마나 많은데, 새로운 곳에 가면 새로운 것을 배우고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될 텐데, 지나친 곳에 대해 자꾸 다음을 기약하는 것은 과거에 연연해 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여행인데, 완벽한 여행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인간사에 완벽이라는 것이 없는데 완벽한 여행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설령 있다 해도 완벽한 여행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나간 것은 그대로 온전하게 의미가 있고, 어떻게 보면 완벽해지는 건 무엇이든 과거가 되었을 때만 가능한 일... 그리고 모든 과거는 그냥 그대로 완벽한 것, 그러니 아쉬울 것도 연연할 것도 없는 것 아닐까... 영어식 표현을 빌면, 나는 지금 시칠리아 버그에 물렸는지도...
어쩌면 아쉬움은 주어진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거나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는 자책 때문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최선은 무엇일까... 평생 내가 규정한 나는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 스스로를 그렇게 규정하고 있으니 채근하며 행복하지 못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게 아닐까... 최선을 다하든 말든 그만하면 됐는데... 누군가에 의하면 태어나는 것으로 소명은 다 한 거고, 남은 삶은 즐기기만 하면 된다던데...
사실 이 모든 생각의 시작은 발의 상태. 발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은 이유이지 핑계가 아닌데도 자꾸 핑계일 수도 있다고 스스로를 의심한다.
여행에서 만난, 닮고 싶은 어떤 언니가 생각난다. 갔던 곳을 다시 가고 싶다니, 단호하게 새로운 곳에 가라고 했었다. 매사에 앞만 보는 사람. 틀렸을 수 있어, 잘못했을 수 있어, 그래서 뭐? 나는 앞으로 갈 테니 너는 가서 고쳐 보던가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사실 세상 모든 곳을 다 가본 것이 아닌데, 좋아서 다시 간다면 모를까, 아쉬움 때문에 다시 갈 필요는 없다. 다시 가면 아쉬움이 남지 않을까? 또 남는다. 세상 사람들이 입에 달고 사는 최선이나 완벽은 없다. 매사에 아쉬움이 남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결과를 놓고 혹독하게 평가하지 말고 잘하려 했던 마음을 인정해주자 싶다. 후회를 해도 되지만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후회만이 의미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싶다.
그리고 휴가를 보내는 것과 여행을 구분하자 싶다. 아까 만난 네덜란드 부부를 예로 들면 그들은 매년 휴가를 보내러 이곳에 오는 것이고, 온 김에 볼 것이 있으면 보는 것이다. 탐험하고 보고 느끼러 온 나와는 근본이 다르다. 그들이 아까 다시 오겠냐고 물었을 때 돈과 시간이 허락하면 오겠다 했는데, 생각을 바꿔봐야겠다. 열심히 보고 누리는 만큼만 내 몫이고 그렇지 못한 것은 내 몫도 아니고 인연도 아니니 뒤돌아보지 않기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