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2/2020

시칠리아 여행: 19: 라구자: 하루를 마치며



전망대에서 라구자 이블라 전경을 보고 나니 라구자에 온 이유를 다 찾았다 싶다. 이제 그만 들어가서 쉬어도 되겠다. 수페리오레에서 이블라로 내려오는 지그재그 모양의 도로가 있고 그 도로를 가로지르는, 지름길 역할을 하는 가파른 계단이 있다. 지도로 보면 계단 입구가 근처에 있다는데 몇 번을 왔다갔다해도 보이지 않는다. 지나가는 사람을 잡고 물었더니 따라오라고 한다. 따라오라니, 갑자기 그의 어두운 피부색이 의식되며 혹시 잘못 물었나 하는 생각이 스친다.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어 하며 따라갔는데, 생각과 반대 쪽에 계단 입구가 있어서 계속 못보고 지나친 것이었다. 앞서 가던 청년은 계단에 진입하자 고맙다고 인사할 틈도 없이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고맙고, 또 미안하다. 언젠가는 본능처럼 작용하고 있는 이 편견을 극복할 수 있을까?

[라구자 이블라 라구자 이블라에서 본 라구자 수페리오레]


라구자 이블라 입구에 있는 레푸블리카 광장에서 아까 내려왔던 길과 다른 길로 숙소로 가려고 방향을 잡았다. 지도를 보니 동쪽으로 쭉 가면 될 것 같다. 낯선 마을에서 길을 잃는 로망이 있다. 발길 닿는 데로 걷는 것. 낭떠러지로 에워싸인 손바닥만한 마을. 절호의 기회다 싶어 지도를 껐다. 조금 오르막을 오르다 뒤를 돌아보니 라구자 수페리오레 모습이 보인다. 산비탈에 옛 집들이 오밀조밀 다닥다닥 있는 모습. 이쯤 되면 이런 풍경이 시칠리아의 시그니쳐 풍경이라 해도 될 것 같다. 조금 더 가니 왠지 좀 으슥한 느낌. 길 잃기를 포기하고 지도를 꺼내 들었다. 어둠이 내릴 조짐이 보이니 객기가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라구자 이블라 산 죠르죠 성당의 돔]

[라구자 이블라 라 로까 궁의 코벨 조각들]


라 로까 궁palazzo la rocca이 있는 길로 들어서니 두오모의 돔이 보인다. 택시 타고 올 때 지난 길이었다. 라 로까 저택 또한 철제 난간이 있는 발코니와 발코니를 받치는 코벨 조각이 재미있다. 산티아고 길을 걸으며 로마네스크 교회 현관의 아키볼트와 기둥 머리 조각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이번 여행에서 바로크 스타일 건물의 발코니 코벨 조각을 그만큼 좋아하게 된 것 같다. 볼 때마다 그냥 좋다. 가고일gargoyle이 변형된 것 같기도 하고... 어떤 의도로 저렇게 코벨을 장식했을까 궁금하다. 나름 추측을 해보면 예술적 의도도 있었겠지만 내 집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잠시라도 즐겁게 해주고 싶은 집 주인의 해학이 아니었을까.


[라구자 이블라 밤이 내리는 두오모 광장]




두오모 앞 광장에 작은 슈퍼가 있어 물과 주스도 사고, 도자기 공방도 기념품 가게도 기웃거리며 드디어 휴가를 즐기는 관광객 모드로 유유자적 걸으며 숙소가 있는 정원으로 향했다. 저녁을 건너 뛰고 정 허기가 지면 주스를 마실 생각이었는데, 정원 앞에 요거트 집gelateria mastrociliegia을 보니 저녁으로 요거트를 먹자 싶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 야생 열매frutti di bosco를 얹은 요거트를 먹고 있는데 공원에 있는 공연장으로 쓰이는 옛 교회chiesa di san vincenzo ferreri 앞 무대에서 재즈가 울려 퍼진다. 순간 야외 공간을 채우는 생음악의 감동으로 가슴이 벅차며 감사가 밀려온다. 이 호텔에 묵지 않았다면, 요거트를 먹지 않고 그냥 들어갔다면... 이 모든 것이 우연이지만, 누군가의 선물 같다. 이번 여행은 끝없이 흔들리고 지쳐가는 나를 격려하기 위해 내가 내게 주는 선물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난 여기까지 오기만 했을 뿐, 정작 선물은 다른 누군가가 마련해 주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스친다.


[라구자 이블라 산 빈첸조 페레리chiesa di san vincenzo ferreri]


이곳은 모디카와 반대로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편하다. 어디서도 한 병에 1유로씩 받던 물이 50전도 안 되는 것 같다. 오는 길에 물 두 병과 주스 3팩짜리 한 묶음을 샀는데도 2.1 유로를 내라는 걸 보면... 이 사소한 일이 기쁘다. 관광객... 초과 이익을 좀 취해도 되는 사람으로 취급 받지 않은 것 같아서... 이방인을 환대하는 전통이라는 게 이런 것일 수도... 적어도 바가지는 씌우지 않는 것. ^^ 사실 뭘 훔치고 빼앗고 해치지만 않아도 환대다 싶다. 남의 것도 슬쩍 할 수만 있으면 제 것이라고 생각하는 놈들이 많다 보니...

호텔 코앞에 바가 있어서 좋고 공원이 있어서 좋고 공연장이 있어서 좋다. 더 들어보니 정식 공연은 아니고 리허설을 하는 듯 했다. 그만 들어가서 쉬고 내일을 준비하기로...


[라구자 이블라 이블레오 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