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3/2020

시칠리아 여행: 20: 라구자: 아침



새벽


어제도 들어와 잠깐만 눕자 하다 그냥 잠이 들었다. 그런데 잠결에 발소리와 물 소리를 들었다. 분명 오늘 밤 이곳에서 자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했는데 누굴까 했지만 누가 됐든 내 알 바 아니다 하고 그냥 잤다. 그런데 지금도 간간히 사람 말 소리와 문 소리가 들린다. 귀신이든 사람이든 제가 해야 할 일을 하겠지...

화장실. 화장실이 침실의 크기만하다. 침실이 작은 게 아니라 화장실이 큰 거다. 샤워부스도 비례해서 크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다 보면 폐쇄공포증 있는 사람은 힘들겠다 싶게 작은 샤워 부스가 많다. 덩치가 큰 사람과 비교하면 반 밖에 안 될 나도 조심스럽게 몸을 돌리지 않으면 벽과 닿는다. 그런데 이곳은 마음껏 팔을 뻗으며 비누칠을 해도 어디도 네 벽 어느 곳에도 닿지 않는다. 이렇게 큰 샤워부스는 처음이지 싶다.





방의 모든 창이 계곡을 향한다. 커튼이 없기도 하지만 커튼을 칠 이유가 없다. 건물 아래가 바로 계곡이고 창을 열면 계곡 맞은편 절벽이 보인다.




창을 열고 계곡 등성이를 위로 올라올 해를 기다린다. 어딘가 특별한 장소에서 맞아야 할 것 같은 자연 경관 속 일출이 아침에 일어나서 창을 열면 보인다. 감사한 호사다.


아침


식당으로 내려가니 테이블이 몇 개 세팅 돼있다. 혹시나 누가 있을까 했지만 역시 나 말고는 없다. 새로 수리되어 깨끗하고 한적한 넓은 홀에 온갖 새소리가 들린다. 식당 벽에 프레스코화가 있다. 옛 수도원 시절 있던 장식을 살려 보존해둔 것 같다. 옛 것이 보잘것없이 남았어도 잘 살려 보존해놓은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옛 것을 조금이라도 살려 놓는 데 이들만의 일가견이 있는 것 같다. 많은 건축물에 역사의 순간이나 사건들이 모자이크 조각처럼 박혀있다.




아침 상차림. 감동적이지는 않지만 구색을 갖춰 차렸다. 치즈, 살루미, 견과류, 과일 요거트... 내게는 더 바랄 것 없는 아침이다. 테이블 위에 일회용 유리병에 담긴 꿀이 놓였다. 어릴 때 꿀은 거의 우리집 만병통치약이었다. 웬만하면 꿀 먹어라, 꿀 발라라... 그래서인지 꿀에 별 호기심이 없어 손을 대지 않는데, 왠지 치즈에 꿀을 올려 먹고 싶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치즈와 단 것을 함께 먹는데, 꿀도 많이 올려 먹는다. 꿀 병을 열어 치즈에 발라 한 입.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이런 꿀은 없었다. 이렇게 향기롭고 부드럽고 진한 꿀은 처음이다. 향이 진하지만 전혀 자극적이지 않다. 부드러운 향이 진하게 응축된 느낌. 단 맛도 날카롭지 않고 부드럽고 질감도 꾸덕하지만 젤처럼 탱글하고 부드럽다. 먹어봐야 안다. 양봉하는 친지 덕에 여러 꿀을 먹어봤지만 꿀이 이렇게 감동적일 수 있는 식재료일 줄 몰랐다. 리코타 치즈에 얹어 먹으니 세상에 이런 진미는 없다. 나중에 보니 찾아 보니 이 지역 꿀이 예로부터 유명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의 어떤 왕도 이곳 꿀을 찾아 먹었다고 할 정도다.

천천히 오래 앉아 분위기를 즐기고 싶지만 눈치가 보인다. 눈치를 주는 것은 아닌데 나 때문에 대기 중인 직원이 보인다. 내가 끝내줘야 치우고 쉴 것 같다. 직원을 불러 커피만 마저 마시고 나가겠다고 다른 것은 치워도 좋다고 하니, 기다렸다는 듯이 치우기 시작한다. 요리사를 꿈꿨던 시절이 있다보니 부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남 같지 않다. 내 잘못은 아니지만, 어쩌다 나를 받아 이 번거로움을 겪을까 싶어 괜스레 미안하다.




방에 올라와 느긋하게 이 닦고 선크림 바르고 손톱, 발톱을 깎으며 수 없이 마음속으로 되뇐다. 나는 바쁘지 않다, 나는 바쁘지 않다, 나는 쉴 거다, 쉴 거다, 나는 오늘을 한가하게 보낼 거다. 발이 엉망이다. 산티아고 길을 걸을 때 보다 더 심하다. 그때는 초반에 물집 두세 개 잡혔다 아물고 그것으로 끝이었는데, 어제 새끼발가락에 새로 잡힌 물집이 작은 방울토마토 만큼 커졌다. 발에게 미안해서라도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발로 에트나 산을 오를 수 있을까 걱정이다.

아무리 여유로운 하루를 보내겠다 다짐을 해도 길만 나서면 폭주한다. 오늘은 과연 자제가 될까? 내일 버스로 카타니아로 갈 예정이니 버스 정류장을 알아보는 차원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갔다 윗마을을 한 바퀴 돌아 보고 올 생각이다. 그리고 오늘 밤 재즈 공연 표를 구하면 공연 보고 자고, 내일 아침 10시쯤 카타니아로 출발할 생각이다. 카타니아 숙소에 도착 시간도 알려놨고, 숙소를 통해 에트나 투어도 예약해놨으니 오늘은 제발 느긋하기로...

이곳이 지금까지 여행한 곳 중에 가장 입체적 레이아웃을 가진 도시가 아닐까 싶다. 동네 산길을 걷다 지도가 차가 못 다니는 길까지 어떻게 알까 했던 적이 있었는데, 여기 와보고 지리정보를 어떻게 구축하는지 궁금해졌다. 구글 지도는 2차원으로 해결되지 않는 입체적 길과 계단까지 알고 있다. 관련 업에 종사하던 당시 다른 팀에서 지리정보 시스템을 구축하네 어쩌네 해도 전혀 궁금하지 않았던 게 새삼 궁금하다. 어떻게 정보를 모으고, 경로를 찾고 결정할까? 다양한 경험이 중요하다는 말의 의미를 새삼 깨닫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