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2/2020

시칠리아 여행: 15: 시라쿠자: 인형극 & 저녁



발렌시아 커플과 헤어져 인형극 시간을 맞추려 오르티지아를 향해 부지런히 걸었다. 인형극 극장teatro dei pupi - siracusa이 숙소에서 멀지 않고, 오르티지아는 늦은 시간에도 특히 안전하니 볼 수 있으면 여기에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극장 안. 성당 벤치 같은 의자에 지정된 좌석이 있었는데 좌석이 뭔가 불편하다. 전혀 인체공학적이지 않다. 나만 불편한가 싶어 옆에 앉은 사람을 보니 다리를 넉넉히 접어 발을 편안하게 발판에 척 내려놓았다. 나도 자세를 고쳐 꼼지락거리니 겨우 발이 닿는다. 좌우를 살피며 계속 꼼지락거리니 옆 사람이 불편했는지 시선을 보낸다. 내 다리는 네 것과 달리 짧아서 그런다 했더니 알아 듣고 웃는다. 

프랑스 친구 커플이었다. 자신은 몽펠리에에 살고 친구는 파리에 산다고 한다. 시칠리아에 프랑스 관광객이 진짜 많다. 느낌상으로 이탈리아 관광객 다음으로 많은 것 같다. 매너도 좋지 않아 언짢을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마침 잘 됐다. 산티아고 길 걸을 때 한국 사람이 왜 이렇게 많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어조가 왜? 걸으면 안 돼? 라고 대답하고 싶을 만큼 힐난조였다. 오래 품은 앙심에 대한 복수의 기회다.^^ 최대한 비난을 실어서 시칠리아에 프랑스 사람이 왜 이렇게 많느냐고 물었더니, 진짜 많다면서 자신도 이유를 모르겠다며 웃는다. 오늘 노토에서는 한 스무 명이 떼지어 다니더라 했더니, 친구에게 불어로 내 말을 전한다. 친구는 영어를 못 했다. 그렇게 시작해서 여행 정보도 교환하고 인형극 시작할 때까지 수다를 떨면서 기다렸다. 그들은 카타니아에서 시작해서 한 달 동안 대중교통으로 시칠리아를 나와 반대 방향으로 일주하고 있었다.

줄로 움직이는 인형극뿐만 아니라 인형극은 평생 처음 보는 것이었던 것 같다. [사실 시칠리아 인형극은 줄이 아니라 철사로 움직인다. 줄로 움직이는 경우 들어올리기만 가능하지만, 철사는 힘을 다양한 방향으로 전달할 수 있어 더 다양한 동작을 박진감 넘치게 표현할 수 있다고 한다.] 언젠가 발레 공연 본 직후 자꾸 발끝으로 서서 걷게 되었다. 인형극에서는 특유의 발 동작이 있었다. 보는 내내 그렇게 한 번 뛰어보고 싶었다. 발레 보고 발레리나처럼 걸어질까 했던 때처럼, 인형들처럼 그렇게 뛰어질까 하고 뛰어보니, 안 된다. ^^ 이야기를 못 따라가 극에 집중을 못하고 발 동작이 재미있네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문 팜플렛을 팔았지만 가지고 다닐 수도 없고 줄거리를 알아도 대사를 못 알아들으니 어차피 추측하기는 마찬가지겠다 싶어 그냥 편하게 무대를 즐기기로 했었다. 그런데 졸려서 잠깐 졸기도 하며 너무 편안히 봤다. 

시칠리아 인형극은 오페라 데이 푸피opera dei pupi라고 불린다. '인형들의 오페라'라는 뜻이다. 2008년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고, 시칠리아의 오랜 전통이고 자랑거리라고 한다. 지금은 영화, TV 때문에 관광객이나 어린이용 공연으로 전락했지만, 과거에는 모두 즐기는 공연이었단다. 어딜 가도 웬만하면 인형 박물관이 있는 것을 봐도 그랬다는 것을 알겠다. 인형극은 팔레르모 스타일과 카타니아 스타일이 있다고 한다. 어떻게 다른지는 모르겠는데 시라쿠사 공연은 카타니아 식이란다. 극의 주요 소재는 기사가 악당의 손아귀에서 공주를 구하는 로맨스, 기사들의 영웅담, 사라센과 기독교 기사들의 전투 등이라고 한다. 샤를마뉴와 롤랑의 이야기도 단골 소재라고 한다. [팔레르모 스타일은 인형 크기가 약 80cm 정도로 카타니아 스타일에 비해 작고, 무릎이 굽혀진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가볍고 유연해서 전투 장면을 빠르게 역동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조종하는 방식은 무대 뒤에서 한다고. 카타니아 스타일은 약 120cm 정도이고 무릎이 꺽이지 않는다고 한다. 조종은  위에서 내려다 보는 방식으로 한단다.]




기사가 나오고, 공주가 나오고, 공주의 부모와 유모로 추정되는 인물도 나오고, 유령(발이 없었다.^^)도 나오고, 언제나 악당이어야 하는 사라센 사람들도 나온다. 인형들의 의상과 도구 등이 화려해 보는 재미가 있다. 드라마 보며 다음 편을 마치 미리 본 것처럼 예상하던 실력으로 확신만 없을 뿐 무슨 내용인지 알 것도 같다. 추측이 맞든 틀리든 전통인 인형극을 본 것만으로도 만족이다.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언제나처럼 커튼콜이다. 늘 감동적이다. 공연이 끝날 무렵 꼬맹이들이 객석에 들어와 왔다갔다해서 무슨 일일까 했었는데 숨은 배우들(인형 조종자)의 아이들이었나 보다. 그 중 한 아이가 아빠로 추정되는 사람에게 다가가니, 아빠가 번쩍 들어 안아 올렸다. 삶의 어느 순간에도 가족과 일이 분리되어 있지 않은 것 같은 모습이 좋고 신선했다. 아빠의 일터를 자유롭게 드나드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을 굳이 말리지 않는 동료들, 관객들 앞이라고 굳이 아이들을 다르게 행동하라고 하지 않는 아빠, 그 모습에 기꺼이 환호를 보내는 관객들. behave하라는 압력을 받지 않으며 스스로 behave하는 법을 터득해가는 아이들. 집과 일터가, 가정과 일이 굳이 분리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언젠가부터 너무 분리된 삶을 살고 있을 뿐.

인형극이 끝나고 서둘러 극장을 빠져 나오고 보니 옆에 앉았던 사람들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나온 게 생각났다. 내가 앞뒤 없고 그런 사람은 아닌데, 너무 배가 고파 정신이 나갔었나 보다.


[시라쿠자 도자기 가게]


걷기 앱을 보니 2만보를 걸었다. 하루 종일 땀을 뻘뻘 흘렸는데, 아침 먹고, 석류 주스 한 잔 마시고, 젤라또 먹다 만 것이 전부다. 좋은 식당에서 잘 먹고 싶었다. 오르티지아에 유대인 구역이 있는데 좋은 식당도 많고 볼거리가 많다고 해서 그쪽으로 가보자 했다. 손바닥 만한 곳에 유대인 구역 아랍인 구역 하는 것이 이상한데 그렇게 나뉘어 있다. 정말 손바닥만하다. 섬 전체 면적이 1평방 킬로미터가 안 된단다. 무작정 골목을 걸으며 마음에 드는 식당을 찾았는데 산 죠반니 교회chiesa di san giovanni battista 옆에 흰 후추 라는 뜻의 bianco pepe라는 깔끔한 식당이 눈에 띈다. 메뉴도 마음에 들어 저녁이 되냐고 물으니, 한참 이른 시간인데도 된단다. 하루 이곳 사람들처럼 늦게 저녁을 먹었더니 밤새도록 속이 부대껴서 평소 루틴을 지킬 수는 없더라도 되도록 이른 저녁을 먹으려 하고 있다. 홍합 스튜zuppa di cozze와 가지 요리melanzane alla parmigiana를 시켰다. 오뜨 뀌진(?)을 추구하는 신식 또는 트렌디한 식당이었다. 다 먹었는데도 후식 먹을 배가 남아서 기뻤다. 시칠리아 후식을 시킬까 고민하다 티라미수를 시켰다. 시칠리아라도 이탈리아인데...
 

[시라쿠자 bianco pepe]


바로크 도시 삼총사 노토, 모디카, 라구자 중 첫 도시였던 노토. 숙제하듯 분주히 돌아다녔지만 역시 시간이 아쉬웠다. 시간이 아쉽지 않은 날이 없다. 시간을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기는 하지만 일상에서는 시간을 어떻게 쓰고 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젤라또 때문에 지나친 산타 키아라 교회가 여전히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