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8/2020

시칠리아 여행: 19: 라구자: 숙소 & 점심



숙소


[라구자. 이블레오 정원. 길 끝에 보이는 건물이 숙소]



택시가 숙소 앞에 딱 내려준다. 배낭 메고 낯선 도시에서 숙소를 찾아 헤매다 보니, 이것마저 호사스럽게 느껴진다. 숙소는 이블레오 정원giardino ibleo 한쪽 모서리에 있었다. 옛 수도원antico convento dei cappuccini을 호텔로 개조한 곳이었다. 라구자 이블라 제일 끝에 있어 기차역에서 좀 멀다는 단점이 있지만 예쁜 공원을 정원처럼 이용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면 조금 먼 것은 얼마든지 감수할만하다.

수습 사원 같은 직원이 수속을 받는다. 옆에 서있는 여자의 눈치를 계속 보며 어쩔 줄을 모른다. 왜 그러는지 궁금하다. 열쇠도 몇 개를 들었다 놨다 하고, 방을 안내해 주는데 복도 갈림길에서 이리저리 왔다갔다한다. 뭔가 착각했다고 우물쭈물 말을 하는데 말꼬리가 흐리다. 아침은 몇 시에 주냐고 물었다. 모르겠단다. 뭐라고? 이따가 알려주겠다고 한다. 방은 세련되고 단정했다. 수도원에서 운영하는지 까지는 모르겠지만 호텔로 개조한지 얼마 되지 않는 듯 구석구석 새것의 깨끗함이 있었다. 짐을 대충 풀어 필요한 것만 챙겨 작은 백팩에 넣고 카운터로 내려갔다.

사람이 아까 그 여직원 밖에 없다. 할 수 없이 뭐든 시원치 않아 보이는 그녀에게 이곳에서 저녁을 먹을 수 있냐고 물었다. 먹을 수 있다면 예약을 할 생각이었다. 그랬더니 또 안절부절이다. 이 숙소를 예약하고 나서, 호텔 레스토랑이 지역 음식을 잘 한다며, 점심이나 저녁을 먹겠냐고 묻는 이메일을 몇 번이나 보냈었기에 물어본 말이다. 그런데 도대체 저 여직원은 왜 저래야 하는 걸까? 찜찜한 구석이 있어 이것 저것 물어 보니, 손님이 오늘 나밖에 없고 그래서 여러 상황이 불확실 하다고 한다. 그렇다 해도 여전히 여직원의 태도는 이해가 안 된다. 처음부터 사실대로 말하고 문제가 있으면 양해를 구하면 되지 저럴 일인가 싶다. 그럼 오늘 밤 이 건물은 내가 지켜야 하는 것이냐고 물으니, 그것은 아니란다. 저녁에는 다른 아가씨가 올 것이고, 야간에는 어떤 청년이 와서 보안을 담당하고 리셉션 데스크를 지킬 것이라고 한다. 꽤 큰 규모의 호텔인데 나 하나 때문에 계속 교대근무를 해야 하고, 주방장도 출근을 해야 하고, 저들의 난처함이 이해는 되는데, 저렇게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손님을 대해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차라니 그냥 근처의 다른 숙소를 소개해주고 문을 닫지 싶다. 101호라는 방 번호조차이 상황을 설명해준다.


점심




숙소에서 저녁이 안되니 점심을 잘 먹고 저녁은 상황 봐서 간단히 먹자 싶다. 숙소에서 가깝고 안내서에도 소개되고 평도 좋은 꽈뜨로 가티quattro gatti라는 곳에 갔더니 휴업 중이라는 메모가 붙어있다. 다음으로 가깝고 안내서에 소개되고 평도 좋은 a' rusticana라는 곳에 왔다. 간판에 cucina casereccia라 써있다. 가정식 요리라는 뜻이다.

발 디 노토 도시들에서 촬영된 몬텔바노 경감inspector montalbano이라는 TV 시리즈의 팬이라면 이곳에서 먹고 싶을 것이라는 소개가 있었다. [원래는 아그리젠토 일대를 배경으로 쓰인 소설인데, TV 드라마로 만들며 라구자 일대에서 찍었다고 한다. 이 식당도 드라마에 등장한단다. 대부 못지않게 이 드라마도 대단한 팬을 거느리고 있는 것 같다.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 수출되어 국제적으로 인기가 있었단다. 아그리젠토에는 이 드라마의 실제 배경인 곳을 방문하는 투어가 있고, 라구자 일대에는 이 드라마를 찍었던 곳을 방문하는 투어가 있다. 어딘가에서는 이 드라마를 진짜 경찰을 트레이닝하는 자료로 사용하기도 했단다. 그리고 드라마의 인기가 라구자 지역을 인구 감소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는데 한 몫을 했다는 말까지 있다. 궁금해서 유튜브를 열심히 뒤졌는데 아쉽게도 동영상은 찾지 못했다.] 골목 끝에 있는 아치 입구로 들어가니 작은 마당이 있고 안쪽에 홀이 있다. 야외가 좋아 마당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이 지역에서는 사랑 받는 육류는 돼지고기라고 한다. 돼지고기로 만든 소스를 얹는 카바티cavati라는 음식이 전통 음식이라고 해서 시켰고, 카쵸카발로라는 이 지역 특산 치즈 구이와 오렌지 샐러드를 곁들여 시켰다.

카쵸카발로 구이... 아주 오래 전 로마 여행할 때 난생 처음으로 먹었던 치즈 구이다. 햄이나 버섯을 곁들여 먹으면 맛있다던 주인 아저씨의 말도 선명히 기억난다. ^^ 치즈를 구운 것이라 특별한 솜씨가 필요하지 않아 보이지만, 그래도 비법은 있는 것 같다. 선명한 그릴 자국이 생기도록 센 불에서 빠르게 굽는 것. 이 지역 꿀이 유명하다는데 그래서 그런지, 아니면 꿀과 치즈가 잘 어울리는 조합이라서 그런 건지 꿀을 곁들여 줬다. 맛있는데 다 먹었다가는 파스타와 샐러드를 못 먹을 것 같아 남겼다. 시키기 전에 양이 어떻느냐고 물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오늘도 분명히 적당한 양이라고 했었다. 

카바티는 고둥 모양으로 말린 생파스타에 돼지고기 스튜 같은 소스를 얹은 것인데, 돼지고기를 오븐에 구워 만드는 건지 오븐에 구운 돼지고기 특유의 맛이 났는데, 그렇게 인상적인 맛은 아니다. 신선한 생고기를 즉석에서 기름기 쫙 빠지게 구워먹는 사람들의 입맛에 어떤 돼지고기 요리도 그것보다 더 맛있기 쉽지 않다. 그런데 생 파스타의 질감이 특이하다. 시칠리아 생면 특유의 질감인가 싶다. 팔레르모에서 먹었던 파스타 알라 노르마의 파스타 식감도 이랬다. 분명 무슨 첨가물을 넣거나 과정이 복잡하지는 않을 텐데 어떻게 이런 질감이 나는지 궁금해서 웨이터에게 물어보았더니 역시 단순했다. 그라노 두로, 소금, 계란이 전부라고 한다. 그라나 두로는 경질 밀이라고 부른다. 질감으로 봐서 보통 밀과 많이 다르지 싶다. 파스타의 색이나 질감으로 볼 때 계란은 노른자를 쓰지 않고 흰자만 넣었을 것 같다. 북쪽에서 쓰는 생면 중에는 거의 노른자만으로 반죽하는 면이 있는데, 색도 질감도 이것과는 많이 다르다. 소스만으로는 첫 입맛에 딱 맛있다 할 맛은 아니었는데 파스타 질감이 좋고 곁들인 오렌지 샐러드가 파스타와 잘 어울려 맛있게 먹었다. 오렌지 샐러드는 시칠리아에만 있는지 어디서 들어본 적도 없는 음식이었는데, 재료는 오렌지, 펜널, 파슬리, 페페론치노, 올리브유, 소금이 전부다. 오렌지를 제외한 나머지 재료는 양념이다. 과일이 부재료로 들어간 샐러드야 흔하지만, 오렌지만 넣은 샐러드는 신선했다. 오렌지 속껍질만 벗기면 섬세하고 고급스러운 음식이 될 것 같고, 고기 요리와 정말 어울릴 것 같다.

옆 테이블에 꼬맹이 둘이 있다. 쫑알대며 밥을 먹다가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는지 일어나서 테이블 근처를 서성이다 이제 장난감 차를 가지고 놀며 테이블 밑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며 행동 반경을 넓힌다. 꼬맹이들이 내 테이블 밑까지 접근하니, 부모가 미안하다며 제지하느라 정신이 없다. 세상 모든 아이들의 부산함이 다 귀엽고 예쁘지는 않다.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닌데, 부모가 아이를 훈육하며 사과를 하니, 아이들이 다 그렇지 뭘 그런 일로 미안하다고 까지 하나 하는 마음이 된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도 갚을 수 있다는 속담은 사실에 근거해서 퍼진 말일 것 같다.

비었던 정원 테이블이 어느새 꽉 찼다. 악사 두 명이 기타를 들고 정원으로 들어와서 신나게 노래를 하고 팁을 걷는다. 나도 즐겁게 들었기에 동전을 주었다. 그들이 이제 홀 안으로 들어가려 하니, 보고만 있던 직원이 못 들어 가게 한다. 잠깐 실랑이가 있지만 양쪽 모두 불편한 기색이 없다. 쫓겨 가는 사람도 측은해 보이지 않고, 쫓아 내는 사람도 무례하거나 험악하지 않다. 혹시나 하며 괜한 긴장을 한 내가 머쓱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