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1/2020

시칠리아 여행: 15: 노토: 노토에서 2



뭘 제대로 먹을 시간은 없는데 지나가다가 줄이 길어 그냥 지나쳤던 우리나라 분식집 같은 튀김가게putia del coppo가 생각난다. 거기에서 간단히 먹자 싶어 갔더니, 재료가 떨어져서 문을 닫는 중이란다. 한끼쯤 굶는다고 절대 죽지 않지...





대성당 옆 살바토레 교회chiesa del santissimo salvatore로 왔다. 이 교회도 창을 덮은 쇠창살 장식이 눈에 띈다. 시칠리아 교회 중 창문이나 테라스에 쇠창살로 만든 장식이 있으면 여지없이 수녀원에 딸린 교회였다. 수녀원에 한 번 들어가면 절대 외부로 나올 수 없었단다. 쇠창살 뒤에서 바깥 세상의 시선을 피하며 밖을 내다보는 것이 전부... 그것도 성인의 축일 등 종교 행렬이 있을 때나 허락됐단다. 상상할 수 없는 삶이다.

살바토레 수도원은 귀족 딸들을 위한 시설이었다고 한다. 들은 바에 의하면 귀족들이 딸을 수도원으로 보내는 것이 평생 수녀로 살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결혼 전까지 정절을 지키게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한다. 수녀원에 있다가 수녀원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신랑의 집으로 가는 경우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또 다른 이유는 당시 상류사회에서 엄청난 지참금을 신랑 측에 보내는 관습 때문이었단다. 그래서 딸이 여럿인 집은 큰딸 정도만 결혼을 시키고 나머지는 어릴 때 수녀원으로 보내곤 했다. 딸 시집 보내다 파산하는 상황을 피하려는 이유이기도 했지만 더 많은 재산을 장자에게 상속하고자 했기 때문이란다. 물론 수녀원에 들어갈 때에도 지참금이 필요했는데, 결혼 지참금에 비하면 훨씬 저렴했다고... 당시 만연한 풍습이었는지 강제서원monacazione forzata이라는 말이 생겨났단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사운드 오브 뮤직의 마리아도 생각나고, 그렇게 수녀원에 갇히게 된 수녀님들이 만들었을 마르토라나의 과일frutti di martorana도 생각나고... 

아무튼 귀족 소녀들을 배려한 색상의 선택인지 아니면 감옥과 다를 바 없는 수녀원을 호사스러운 궁전이라도 되는 양 현실을 호도하기 위한 수단이었는지 수도원 내부는 분홍색, 하늘색, 보라색 등 사탕 색으로 장식되었다고 한다. 파스텔 톤이 소녀 취향이라는 고정 관념에 오랜 역사는 듯 하다.


[살바토레 교회와 수도원]

[노토 살바토레 수도원 주변 풍경]

[공사 중인 살바토레 교회. 위는 인터넷 사진]

[살바토레 수원에서 본 풍경.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이곳으로 오게 된 그녀들. 구원의 손길이 없으면 평생 이런 풍경에 갇혀 살아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살바토레 수도원 종탑에서 본 풍경]


수도원 정면 외벽이 출렁이는 물결 같고, 가우디의 카사 밀라casa milà를 연상시킨다. 교회의 탑torre belvedere에서 보는 전경이 좋다고 해서 입구를 찾는데, 교회 문은 닫혀있고 다른 입구가 보이지 않는다. 입구를 찾는 일이 때로는 가장 높은 장애물이다. 표준이란 단어를 이 순간에 꺼내면 안되겠지 하며 인내심을 발휘해 본다. 교회 주위를 빙 돌다 윗마을로 올라가는 계단via mariannina coffa이 있었는데 계단 수직면에 그려놓은 그림이 아래에서 보니 한 장의 그림으로 보인다. 칼타지로네의 산타마리아 계단은 그림이 그려진 타일을 붙여놓았지만, 그림을 그려놓은 계단은 여기 말고 아그리젠토에도 있었다. 산꼭대기에 형성된 도시들이라 워낙 계단이 많다 보니 그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격려 같기도 하다. 노토도 아랫마을과 윗마을이 있는, 언덕 비탈에 형성된 도시다. 계단 그림이 내게는 코 앞에서 입구를 못 찾아 고생했다고 주는 선물 같다. 교회 옆 수도원 문이 열려 기웃거리니 들어오란다. 수도원은 지금 학교로 쓰인다고 했는데, 아무도 쓰지 않는 시설마냥 구석구석 이곳을 지나가도 되나 망설여진다. 그런데 다행히 이곳을 탐험하는 사람이 나만이 아니다. 교회는 겹겹이 비계를 세우고 공사를 하고 있어 공개되지 않고, 종루까지는 올라갈 수 있다. 종탑에 올라가며 비계 사이사이로 보이는 교회 내부는 파스텔 색조라는 말을 확인할 정도 보인다. 다 오르니 성당 지붕과 돔이 잘 보인다.





[산 프란체스코 교회]

[프란체스코 교회. 가까이에서 보니 영 다른 표정이 보인다.]


살바토레 수도원 옆에 있는 프란체스코 교회chiesa di san francesco d'assisi all'immacolata는 문이 닫혀있다. 문이 닫혀 있으니 흰색 스투코로 장식됐다는 내부가 더욱 보고 싶어진다. 교회는 특히 열려 있을 때 봤어야 했는데... 작은 교회들이 문 여는 시간을 맞추기는 쉽지 않다.


[창문 쇠창살 사이로 들여다 본 산타 키아라 교회]


허기는 지나갔지만, 젤라또로 유명하다는 노토에 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지. 젤라또를 먹으며 기차역으로 걷는데 아까 닫혀있던 산타 끼아라 교회chiesa di santa chiara가 문을 열었다. 열린 창의 쇠창살 사이로 안을 들여다 보니 스투코 장식이 예쁘다. 볼 수 있는 시간이 10여분은 있는데 젤라또를 들고 들어갈 수는 없다. 몇 입 못 먹었는데 버리고 교회를 볼 것이냐, 아니면 먹으며 기차역으로 갈 것이냐? 젤라또를 선택했다. 그런데 젤라또는 몇 입 더 먹으니 먹기 싫어져 버렸고, 기차역까지도 생각보다 가까워서 시간이 많이 남았다. 으...

누군가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던데 뭐 이리 인상적이지 않을까 하며 다시 안내서를 봤더니 노토 젤라또는 아무 곳이나 맛있다는 뜻이 아니었다. 어딘가에서 상을 받았다는 가게가 두 곳(caffè sicilia, caffè costanzo)이 있는데 그곳이 맛있다는 것이었다. 그럼 그렇지... ^^ 트라파니에서 젤라또 맛에 편차가 얼마나 클 수 있는지 알았기에 그곳 젤라또를 먹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둘 중 젤라또는 카페 코스탄조가 더 낫고, 그라니타는 카페 시칠리아가 더 낫단다. 둘 다 카사타cassata, 아몬드 과자dolci di mandorle, 토로네torrone도 맛있단다. 다음에 기회에... ^^

산타 키아라 교회는 대성당을 설계한 로자리오 갈리아르디rosario gagliardi가 설계했고, 네이브가 바로크 말기의 특징인 타원형이고, 성당 천정화를 그린 코스탄티노 카라지costantino carasi의 그림, 스투코, 조각상, 유색 대리석 제단, 푸티 등으로 장식되어 있고 탑torre del belvedere에서 보는 풍경이 좋다고 한다. 어차피 조금 먹다 버릴 젤라또를 포기했어야 했는데 하며 두고두고 아쉬웠다. 인형극을 보려고 3시 44분 기차를 타려 서둘렀던 것이었는데, 인형극은 다른 날 봐도 되니 노토를 더 보고 두 시간 뒤에 있는 다음 기차를 타도 됐었는데 그날 따라 왜 그렇게 계획에 집착했었는지... ^^

교회가 워낙 많다 보니 안내서에 나오지 않는 교회도 많다. 어쩌면 안내서에 나오는 정보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을 고려해서 뽑은 일종의 걸작선이지 싶다. 소개되지 않는 교회를 찾아 보는 것도 좋 구석구석 교회를 찾으며 하게 되는 골목 탐험도 재미있다. 언젠가 다시 와서 오늘 못 본 교회들도 보고 맛집 젤라또도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



P.S. 
혼자 한적한 교회를 보고 있는데 어떤 여자가 다가와 손을 내밀며 뭐라고 했다. 반사적으로 몸을 피해 뒤돌아 교회를 나왔는데, 그 여자가 했던 말이 뒤 늦게 이해됐다. 그녀가 했던 말은 ho fame... 배가 고프다는 말이었다. 배는 고프지 말아야지... 다시 교회로 들어가 그녀를 찾았더니 아직 교회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말없이 돈을 쥐어 주며 손을 꼭 잡게 됐다. 나름 까탈스러워서 낯 모르는 사람의 손을 잡는 것...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그날은 어떻게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러고 나서 도시를 배회하다 그녀를 다시 좁은 언덕길 건너편에서 보았다. 나는 아는 친구를 만난 듯 손을 흔들었는데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지나갔다. 그런데 완전 다른 사람으로 느껴졌었다. 조직의 여자 보스 같은 포스가 흘렀다고 할까... 그러자 상상력이 발동되었다. 왠지 조직원에게 혼자 돌아다니는 조그만 동양 여자는 건드리지 말라 통을 놓았을 것 같고, 왠지 이 도시 어느 구석에서도 나는 안전할 것 같았다. 그러고는 까맣게 잊고 있다 어느날 문득 그 일이 떠올랐는데, 기억도 기록도 없다. 어느 도시 어떤 교회였는지... 아그리젠토 같기도 하고 피아짜 아르메리나였던 것 같기도 하고... 그녀의 얼굴도 표정도 몸짓도 머리색도 옷차림도 다 기억나는데 희한하게 사건의 장소만 흐릿하다. 그런데 지출을 적어놨던 기록에 의하면 뜬금없이 노토에서 일어났던 일이었다. 미스테리... ^^




다시 시라쿠자로...




부지런히 역으로 왔더니 내가 1등이다. 이런 일에 1등하고 그러는 사람 아닌데 거의 매번 1등으로 나온다. 오늘 아침 뻬고...^^ 차를 절대 놓치면 안 된다는 강박 때문에 그런 사람이 되었다. 매번 하는 말이지만, 다 누울 자라를 보고 다리를 뻗는 법...^^ 그런데 표 파는 기계도 없고, 창구도 닫혀있다. 곧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드는데 아무도 표 살 걱정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물어보니 다들 왕복으로 사두었다고 한다.

그 중 발렌시아에서 왔다는 커플이 있었다. 남자는 안토니오 반데라스를 닮았고 여자는 제니퍼 애니스톤의 분위기가 있었다. 둘 다 밝고 여유로워 보였다. 영어를 잘 못한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스페인어를 한다고 말을 꺼내는데, 헐~ 말이 나오지 않는다. 2주전까지 스페인어 회화 학원을 다녔고 일상 소통에 별 어려움이 없었는데... 겨우 떠듬떠듬 단어를 나열하니 알아듣고 적극적으로 표 파는 곳을 찾아 보며 같이 걱정을 해준다. 스페인어랑 이탈리아어랑 너무 헷갈려서 이탈리아어 하다보면 스페인어가 생각이 안 나고, 스페인어 하다보면 이탈리아어가 생각이 안 난다. 어떨 때는 뒤죽박죽... 며칠전에 누가 스페인에서 왔냐고 물었다. 이탈리아어로 한다고 했는데 스페인 단어가 섞여있었나보다. 이탈리아에서 스페인에서 왔냐는 말 들었으면 말 다한 거다.^^ 근처에 앉아있던 10대 청소년들에게 물으니 여기에서 타면 기차가 공짜라고 농담을 던지며 좋다고 깔깔거린다. 어른이라고 딱히 어려워하지 않는 당돌함이 귀엽다. 원래 당돌한 아이들 엄청 좋아한다.

결국 해결을 못하고 벌금을 내봐야 얼마나 내겠냐 하며 그냥 기차를 탔다. 그런데 검표원이 돌아다니며 표를 팔았다. 오래 전에 이탈리아 본토에서 표 살 시간이 없어 그냥 기차에 탔다가 검표원과 한참 실랑이하고, 결국 벌금 내고 표를 샀던 기억이 있다. 내 잘못이 아니라 기차가 연착되어 벌어진 일이었는데도 막무가내였다. 여기도 이탈리아인데 무슨 억지를 부릴지 알 수 없어 어이없을 각오(?)를 했는데, 검표원이 별 말이 없다. 

기차에서 내려 다른 칸에 탔던 발렌시아 커플을 만나서 무사히 표를 샀다는 소식을 전하니 다행이라며 자기 일처럼 좋아한다. 그 모습에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