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차는 노토noto, 시클리scicli, 모디카modica를 거쳐 라구자ragusa로 간다. 벌써 세 번째 이 노선의 기차를 탄다. 첫 번째와 비교하면 느끼는 편안함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다. 한 번과 두세 번의 차이는 별로 없지만, 한 번과 0번의 차이는 엄청나다. 빛의 속도로 익숙하고 편안해지지만 같은 속도로 기대와 설렘도 사라진다.
라구자는 두 구역으로 나뉜다. 오래전부터 있었던 라구자 이블라ragusa ibla와 1693년 대지진 이후 형성된 라구자 수페리오레ragusa superiore. 수페리오레에 있는 기차역에서 이블라에 있는 숙소까지는 약 3km. 걸을 수는 있겠지만, 발의 상태를 고려해 택시를 타기로 했다. 호텔에서 시내 버스 정보를 알려주긴 했는데, 처음부터 택시를 탈 생각이었다. 시칠리아에서 시내 버스는 자주 다녀야 30분 간격이고, 한두 시간 간격으로 다니는 것도 예사라 택시비가 어마무시하게 나오지 않는 거리라면 시간을 절약하는 게 더 경제적이라는 결론이다. 택시를 예약하려 호텔에서 알려준 번호로 전화했더니, 예약은 안 된단다. 일단 가보는 걸로...
마주 보는 좌석인데, 사람이 많아 좌석이 거의 찼다. 내가 앉은 칸에도 커플이 마주보고 앉아 있다. 내 옆에 남자가, 맞은 편에 여자가 앉았다. 내 옆에 앉은 놈의 손이 겨우 속옷을 가리는 여자의 치마 밑으로 들어간다. 처음부터 가관이었는데, 저것들이 해도 너무 한다 싶다. 기차가 찜통인데, 놈의 몸이 열기를 화로처럼 뿜어내고 체취까지 풍겨 숨쉬기도 불편한 걸 참고 있는데, 이제 시선마저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그들을 위해 고개를 돌려주고 싶지 않다. 빤히 바라봐 줬다. 내 시선 탓인지 좀 잠잠하다 했더니 이번엔 여자가 그에 상응하는 수작을 건다. 아, 짜증나 라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온다. 소리가 들렸는지 여자가 수작을 멈추고 가방을 뒤져 핸드폰을 꺼내 코를 박는다. 남자는 진작부터 핸드폰에 코를 박고 있었다. 직접 말은 못하고 기껏 해야 인상 쓰고 빤히 보는 것이 전부라도, 너희들과 내가 함께 있어야 하는 장소면 너희들도 내 존재와 내 문화를 존중하라는 뜻을 표현하고 싶었다.
제발 빨리 내리거나 다른 자리가 생겨 옮겨갔으면 좋겠다. 그나마 그들이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다 싶다. 여자는 영어 밖에 못하는 눈치인데, 남자는 영어가 잘 안 된다. 잠잠하던 녀석의 손이 여자의 허벅지를 타고 올라가 엉덩이를 쓰다듬는다. 언짢은 걸 숨길 수 없다. 여자가 왜 저렇게 화난 얼굴이야 라고 나를 의식한 듯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쫙 째려보니 입을 닫으며 흐트러진 치마를 수습한다. 짐승과 인간의 경계에 있는 존재들이 노토에서 내린다. 너무 늦게 내려주지 않아 고맙다. 옆구리가 시원해졌고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
보통의 나였다면 최대한 그들의 짓거리가 시야에 들어오지 않도록 시선을 돌리고 말았을 것이다. 너희들은 당연히 존중 받아야 하니, 내가 불편을 감수해야지 하며... 나는 누구든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나를 존중하지 않는 태도나 행동을 마냥 허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최근에 깨달았다. 마땅한 존중을 받지 못하는 상황을 잠자코 받아들이는 걸 너그러움 또는 이해라 착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 의식하지 못한 채 지속된 그런 태도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나는 나를 존중하지 않는 인간들에게 내 기분을 표현했다. 이 땅이 마음 속 패인 골을 메우고 있는 건지, 찌그러진 곳을 펴고 있는 건지... 매우 소극적인 방식이었지만 내가 존중받아야 할 존재임을 표현했고 전달됐다. 궤도를 벗어났던 마음이 궤도로 진입한 것까지는 아니라도 궤도를 찾고 향해 가는 느낌이랄까...
[위 사진에 절벽에 굴을 파고 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고가도로. 너무 높아 위태로워 보였는데, 뜻 밖의 장점을 발견했다. 너무 높으니 오히려 지상의 시설을 방해하지 않는다. 아래에 빛도 잘 들고 차량 통행 소음도 없을 듯...]
그들이 내리니 풍경이 보인다. 지옥과 천국은 다 마음 속에 있다는 말이 너무 맞는다. 매 순간을 천국으로 사는 지혜를 터득하는 날이 올까?^^ 무화과, 석류, 피키딘디아fichi d'india, 올리브... 포도 밭은 잘 보이지 않는다. 무화과 근처에 가면 무화과 향기가 난다. 아니, 무화과 향이 나서 둘러보면 무화과 나무가 있다. 피아짜 아르메리나에서 로베르토의 할아버지 친구가 준 무화과. 그래, 무화과는 그런 맛이었다. 무화가 철이 되면 이번엔 제대로 맛이 날까 하며 한 번은 사먹어 보지만 결국 꿀을 서너 바퀴 휘휘 둘러 먹는다. 그래야 이탈리아에서 먹어 본 단맛이 난다. 이 땅을 떠나기 전 피끼딘디아는 꼭 먹어보고 싶은데... 어제 시장에서도 까서 파는 것을 봤는데 양이 너무 많아서 지나쳤다.
이스피카ispica 역으로 들어간다. 언덕 꼭대기 성채 같은 교회가 있는데 멋있다. 이곳도 안내서에서 봤던 곳이다. 기차가 시클리scicli 역으로 들어간다. 이제 30분쯤 더 가면 라구자에 도착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시클리는 가보고 싶었던 곳인데 일정이 너무 빡빡할 것 같아 포기한 곳이라 안타까움이 인다.
라구자 도착. 택시회사에 전화를 하려는데 역 앞에 서있는 택시가 있다. 그 택시를 잡으려 부지런히 걸었지만 어떤 커플이 나보다 한 발이 빨랐다. 들으니 그들과 내 목적지가 같다. 합승할 생각까지는 못하고 기사에게 다른 택시는 없느냐고 물었더니 10분 만 기다리면 자기가 다시 오겠단다. 과연 10분이라는 말은 못 믿겠고, 순간 좌석이 하나 남으니 합승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그래도 직접 말은 못하고 내 목적지도 같다고 하니, 기사가 눈치 빠르게 그럼 같이 가자고 해준다. 감사...
뒷좌석에 탄 여자가 효율적인 것이 좋다며 같이 타서 좋다고 한다. 양해 없이 합승을 시킨 불만을 너그러움으로 승화하려는 노력 같다.^^ 그들을 먼저 내려주려 좁고 꼬불꼬불한 골목으로 들어갔는데 정말 딱 90도 각이 진 골목이 나타났다. 여유 공간은 차 양 옆으로 한 뼘이나 있을까 싶다. 적어도 나는 그 상황에 말을 잃었다. 후진으로 빠져나가기도 어려워 보이는데 이 난국을 어찌할까 싶지만, 조용히 지켜보는 것이 최선이다 싶어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몇 번 지글지글 하더니 마법처럼 90도를 꺾어낸다. 드디어 숨을 쉬며 브라비시모bravissimo!라 했더니 뒷좌석 승객도 안도의 환호를 한다. 그들 역시 나만큼 가슴 졸이고 숨죽이고 있었나 보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이곳을 살아내는 기술이 있었다. 어떤 골목에 커다란 돔이 보인다. 산 죠르죠 성당의 돔이라고 하며 라구자 사람들의 자부심이라고 한다.
기사에게 기차역에서 걸으면 얼마나 걸리느냐 물으니, 한 15분 20분 걸린다고 한다. 구글 지도로는 40분이던데... 경사도 있고 3km나 되던데... 혹시 잘못 들었나 다시 물어봐도 같은 답이다. 칼타지로네에서도 터무니 없이 짧게 걸린다 해서 고개를 갸웃했었는데, 걸어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으니... 기차역이 있는 라구자 수페리오레에서 라구자 이블라까지 가는 길은 대체로 내리막이라 천천히 걸었어도 괜찮았겠다 싶기도 하다. 걸으면 협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다리 위에서 본 경치가 좋다고 했다.
P.S. 시라쿠자에서 라구자가는 교통편
기차와 AST 버스로 갈 수 있다. 나는 버스 보다는 기차를 선호해서, 기차를 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