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4/2020

시칠리아 여행: 18: 팔라쫄로 아크레이데 1



팔라쫄로 아크레이데palazzolo acreide는 기원전 7세기에 시라쿠자의 식민지 아크라이akrai라는 도시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기원전 3세기 최대 전성기를 누렸고, 지금 남아있는 그리스 극장도 이때 세워졌단다. 비잔틴 시대에 기독교가 융성했고, (아마도 그래서) 뒤 이은 아랍 통치 시절 파괴되었다가 다시 기독교 세력이 지배하면서 도시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지금 남아있는 도시의 아름다운 건축물은 1693년 대지진 이후 세워진 것들이란다. 이곳 역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발 디 노토val di noto의 8개 바로크 후기 도시 중 하나다.

처음 계획에는 없던 이곳에 오고 싶었던 이유는 수태고지를 받은 마리아에게 봉헌된 교회chiesa dell'annunziata 때문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일단 마을 북쪽 끝에 있는 교회로 향했다. 가리발디 거리via garibaldi를 따라 올라갔는데 이 길이 마을의 주 도로라고 한다. 남북으로 난 길 중간쯤에 있는 산 안토니오 교회chiesa di sant'antonio를 기점으로 북쪽은 18세기에 형성되었고, 남쪽은 19세기 부르조아에 의해 형성되었단다.




루미나리아 장식이 가리발디 거리가 시작되는 광장piazza pretura을 에워싸며 설치되어 있다. 보아하니 광장에서 가리발디 거리를 따라 장식을 설치하고 있다. 곧 축제가 있나 보다. 거리 양쪽 건물 장식은 바로크가 대세지만 아르누보 스타일 장식도 간간이 눈에 띈다. 19세기에 형성된 구간인가 보다. 이 거리의 북쪽 끝에 있는 움베르토 1세 광장piazza umberto I에서 동쪽으로 조금 가면 교회가 있다. 걷는 도중 갑자기 가로등이 일제히 켜진다. 가로등을 켜기엔 이른 시간이라 설치 중인 장식을 테스트하려 잠깐 켰나 했는데, 계속 그대로 켜둔다. 구름이 짙게 꼈지만 구름 사이로 짙푸른 하늘이 보여 흐리다고도 맑다고도 할 수 없는 날이었는데 샛노란 가로등이 들어오니 마을 전체에 신비한 느낌이 감돈다. 흐린데 흐리지 않은 느낌, 맑은데 맑지 않은 느낌, 밝은데 어두운 느낌, 어두운데 밝은 느낌. 글쎄, 뭐라 표현해야 좋을 지 모르겠다.




작은 집 시멘트 벽 앞에 지붕보다 높이 솟은 가로등 하나가 먹구름이 드리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노란 불을 밝히고 있는 모습이 너무 예쁘다. 그 모습을 찍으니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무엇을 찍느냐고 묻는다. 그래서 사진을 보여주니 무심했던 표정 그대로 말없이 그냥 지나간다. 속으로 관광객들이란 하며 끌끌 혀를 찼을지도... 세월에 빛 바랜,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닳아서 윤곽선이 흐릿해진, 때가 낀 이 모든 것이 하늘과 구름과 가로등과 함께 만드는 분위기가 너무 좋다. 마냥 신나고 너무 좋은데, 특별한 이유가 없다.





[팔라쫄로 아크레이데 수태고지를 받은 마리아에게 봉헌된 교회chiesa dell'annunziata]


사진으로 보았던 교회 정면이 눈 앞에 나타났다. 와~ 바로크 건축 장식에 많이 쓰이는 비비꼬인 기둥이 있다.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모르지만 솔로몬 기둥이라고 부른다. 실제 구조물을 받치는 역할을 하는 기둥이라기 보다는 장식용이라고 한다. 교회의 입구 양쪽에 그 솔로몬 기둥이 네 개 있다. 주로 시칠리아 바로크 교회를 지은 돌이 석회암이니 석회암인 듯 한데, 이 기둥의 색은 대리석처럼 하얗다. 비비꼬인 기둥을 타고 포도 넝쿨이 올라간다. 물론 조각되어 있다는 뜻. 기둥 머리는 코린트 식이고, 바로크 양식 특유의 꺾인 엔타블러처entablature의 프리즈frieze에 식물의 잎, 천사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다. 그 밖에도 포도, 석류, 무화과와 리본 장식, 휘장 등으로 섬세하게 장식했다. 교회 정면의 다른 부분은 무너지거나 파괴된 것을 임시 방편으로 보수해 놓은 듯한 모습이다. 문이 닫혀 안을 못 봐서 모르겠지만 정성의 반은 문을 만드는데 쓰지 않았을까 싶다. 오르티지아에 주립 미술관galleria regionale di palazzo bellomo이 있는데, 이 미술관이 자랑하는 그림이 15세기 안토넬로 다 메시나가 목판에 그린 수태고지이다. 그 그림이 바로 이 교회의 의뢰로 그려졌고, 1902년까지는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오르티지아에 있는 주립 미술관이 소장한 안토넬로 다 메시나의 수태고지l'annunciazione. 인터넷 그림]




왔던 길로 되돌아 가지 않고 좁지만 지름길로 가려 골목으로 들어섰는데 개 여섯 마리가 태평하게 길바닥에 누워 잔다. 가까이 가니 내 기척에 한두 마리가 고개를 든다. 고양이 스무 마리 떼 옆으로는 살살 지나갔는데, 이 녀석들 옆으로는 못 지나가겠다. 고양이는 조금 무서워하지만 개는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데, 늘어져 자고 있는 개 여섯 마리 옆으로는 차마 못 지나가겠다. 귀여워 죽을 것 같으면서 무서운 건 뭘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