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6/2020

시칠리아 여행: 19: 시라쿠자: 안녕, 시라쿠자



어제 발가락에 또 물집이 잡혔다. 처음에 생긴 물집이 다 잦아들어 이제는 천하무적의 발이 된 줄 알았는데 처음 생겼던 물집 밑으로 새로운 물집이 생겼다. 이전 것들과 달리 걷는데 자꾸 의식이 됐다. 며칠 후 에트나에 가려면 빨리 가라앉아야 할 텐데 걱정. 이전 여섯 개 물집이 순하게 가라앉았던 것처럼 이번 것도 무탈하길...


[시라쿠자 두오모와 두오모 광장]


아침 두오모 광장.

체크아웃하고 배낭을 사무실에 맡기고, 마지막 아침 쿠폰을 받아 광장으로 왔다. 미리 다 주겠다는 아침 쿠폰을 아침마다 받아가겠다 했었다. 두 옵션이 있는데 그날 아침 어느 바로 가고 싶은지는 일어나 봐야 아니까... 그런데 아침마다 용돈 받던 시절이 떠오르는 부작용이 있었다. ^^ 조지가 아침 먹고 와서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한다. 조금 당황스러운 제안(?)이지만 정이 들 만큼 오래 있었다 싶다.

좀 이른 시간이라 바 분위기가 썰렁하길래 aperto?라고 물으니 open, open한다. 우리도 그 정도 영어는 한다는 투다. ^^ 팔레르모 하와이안 포케 집 아가씨의 애보카도가 생각난다. 아보카도가 영어로는 애보카도라던... 어떤 때는 영어가 너무 당연한 듯 통하고, 어떤 때는 황당할 정도로 안 통한다. 시금치와 치즈가 든 크루아상을 먼저 먹고 초코크림 크루아상을 먹으려 했는데, 짠 것이 아직 안 왔다고 해서, 단 것 먼저 먹는다.

첫 날에는 엄청 쌀쌀맞아 보였던 아가씨가 눈이 마주치자 어느새 낯을 익혔다고 반갑게 인사한다. 그녀는 차가워 보일 뿐, 처음부터 쌀쌀맞지 않았을 거다. 삶에 찌든 싸늘한 시선에 너무 익숙해져 웃지 않는 사람의 시선은 모두 싸늘하다고 느끼는 게 아닐까 싶다. 내 마음 속 얼룩 확인... 눈치 없다는 눈총을 좀 받더라도 오지랖 넓고 수다스럽고 따뜻한 아줌마로 늙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짠 크루아상이 오면 먹을 생각이었는데 그만 먹어도 될 것 같다. 크루아상이 한 개로도 충분한 양이라는 것을 오늘에서야 깨닫는다. 그렇게 땀을 뻘뻘 흘리며 종일 걸어 다녀도 배가 나오고 있는 것 같은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다. 한국 크루아상 두 배만한 것을 두 개씩이나 먹고 있으니.^^

세 번째로 본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성당 앞에서 사진 찍기 바쁘다. 조금 있다 또 다른 커플이 성당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니 단체 관광객이 왔나 보다. 동양인이 별로 눈에 안 띄는데, 한국 사람은 더 드물다. 오늘따라 커피도 맛있다. 아쉽다. 떠나고 싶지 않다. 이 순간을 기억하는 한 그리울 거다.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온다.


[시라쿠자 시청의 도마뱀]

기차 시간이 있으니 마냥 앉아 있을 수는 없다. 시청 건물 도마뱀이나 찾아보고 떠나야겠다. 시청 건물에는 도마뱀이라는 뜻의 루체르톨로네라는 별명이 있단다. 이 건물을 지은 건축가 죠반니 베르멕시오giovanni vermexio가 사인으로 건물 코니스cornice 왼쪽 끝에 도마뱀 조각을 해놓았단다. 몇 번을 홀로 찾아보려 했으나 실패. 마침 건물 앞을 서성이는 경비 아저씨가 보인다. 얼른 다가가 떠듬떠듬 루체르톨로네가 있다고 들었다라고 말하는 중인데, 루체르톨로네라는 단어 말하자마자 말을 막더니 잠시 기다리란다. 그러고는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찾는다. 잉? 한참 스크롤을 해서 찾은 사진 속에 완전 확대해서 찍은 도마뱀 사진이 있다. 도마뱀은 정말 완전 끝끝끝에 한 뼘이나 될 만한 크기로 붙어있다. 저러니 아무리 봐도 안 보였지... 사진을 보고 나니 그제서야 그 조그만 도마뱀이 눈에 들어온다. 이제는 왜 저게 눈에 띄지 않았을까 의아할 정도로 선명하다. 도마뱀이란 말만 듣고 사진을 보여준 걸 보면 도마뱀을 찾는 사람이 많은가 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건 우리만 터득한 지혜는 아닌 듯... ^^

숙소 사무실에 둔 배낭을 가지러 가는 길에 다른 숙박객과 두오모 광장으로 가는 조지와 마주쳤다. 며칠 있다보니 처음 온 손님을 바에 데려다 주는 것은 그의 루틴이다. 시라쿠자에서 좋은 삶이 있기를 바란다고 인사하니, 좋은 여행하라고 하며 조심하란다. 의례껏 하는 인사말이지만 조심에 방점이 찍혔다.

많은 사람들이 혼자 여행을 두려워한다. 어떤 사람들은 심심하거나 외로울 걸 걱정하던데 많은 경우 치안을 두려워했다. 나도 다른 건 괜찮은데 치안에 대한 걱정이 가장 크다. 어디서든 홀로 여행하는 동양 여자는 온갖 시선을 모은다. 그런데 시선에 대해 깨달은 것이 있다. 불량한 시선도 있고 호기심 어린 시선도 있지만 염려가 있다는 것. 나쁜 시선보다는 선량한 시선이 훨씬 더 많고, 그런 시선이 투명 보호막처럼 작용한다는 것... 그래서 상상 속 염려보다는 훨씬 안전하다는 것... 물론 객관적 근거 없는 느낌에 불과하지만, 나는 이제 그것을 믿는다.

사무실 책상 위에 열쇠를 두고 배낭을 메고 나오며 조지가 사진 찍자고 했던 게 생각난다. 솔직히 새 손님 때문에 찍지 않게 돼서 좋다. 언젠가부터 누군가의 사진 속에 남는 것도, 누군가를 사진으로 남기는 것도 썩 내키지 않는다.

안녕, 시라쿠자... 루치아, 시라쿠자를 부탁해...




디아나, 아레투사, 아르키메데스에게도 안녕을 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