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2/2020

시칠리아 여행: 19: 라구자: 라구자 이블라 전경





칸첼레리아 궁전을 지나 본격적으로 계단과 경사를 한참 쭉 오르니 사진으로 봤던 라구자 이블라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고 계단의 산타 마리아 교회chiesa di santa maria delle scale가 나왔다.

계단을 오르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게 됐던 동·서양 커플이 있었다. 여자는 중국 출신으로 보이고 남자는 북아메리카 출신으로 보였다. 캐나다 사람인지 미국 사람인지 까지는 구별이 안 되어도 북아메리카 출신이라는 것은 분명히 알겠다. 몇 번 지나치니 이상하게 경쟁심이 생겨 그들 뒤를 따르기 싫다. 턱에 차는 숨을 견디며 앞서 갔다. 늘 뒤따라 다녔던 사람으로 마음 먹으면 앞질러지는 것이 신기하다. 언덕 꼭대기 시칠리아 도시들을 열심히 오르내린 보람을 찾고 있는 건가?^^




그런데 목적지가 같다 보니 결국 다시 만났고, 남자가 말을 건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지나치며 웃는 표정이라도 좀 지을 걸... 시합도 아니었는데 지기 싫었던 속마음이 얼굴에 써있었을 것 같아 민망하다. 닉이고 캐나다 밴쿠버에서 왔단다. 여자가 대뜸 중국말을 하냐고 묻는다. 밴쿠버에 한국 사람 많은데 많은 사람들이 중국말을 하더라고 한다. 중국어 열풍에 한국사람들이 중국어로 말깨나 붙였던 모양이다. 내 이래서 인사하기 싫었고, 지기 싫었지 싶다. 너는 한국어를 하니? 라고 물으니 못한단다. 네 이름이 뭐니 정도는 하지 싶어 중국어로 이름을 물으니, 제니라며 발음이 좋다고 엄지손가락을 올리며 칭찬이다. 그 칭찬에 넘어가서, 마음을 풀었다.^^ 파리에서 만나 결혼을 했단다. 이런 저런 수다도 떨고 서로 사진도 찍어주고 풍경도 감상했다.

나지막한 옛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길다란 도시가 넓은 하늘 아래 나무가 듬성듬성한 황량한 언덕을 배경으로 짙은 초록 나무들 뒤에 섬처럼 떠있다. 마침 햇살이 라구자 이블라만을 위한 조명처럼 비춘다. 이미 사진을 보고 반한 풍경이지만, 이 풍경만 보러 라구자에 온 것은 아닌데, 풍경이 눈 앞에 있으니 이 장면이 라구자에 온 이유라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구나...^^ 날씨에 따라 시간대에 따라 느낌이 다른지, 오늘은 미리 봤던 사진 속 풍경과 또 달랐다. 이런 색과 이런 빛과 이런 조화, 이 분위기는 이곳에 밖에 없고 또 이 순간에 밖에 없을 것 같다. 닉 부부와 서로 감탄사를 남발하며 감동을 나누었다. 서있는 동안 모기가 발목을 물어 간지럽다고 긁으니, 닉이 제니도 다리를 엄청 물렸다고 한다. 제니는 바지가 너무 짧아서 그렇지 라는 말을 뱉으려는 입을 겨우 막았다. ^^ 섬세하고 순박한 사람 같다. 가끔 노스아메리칸 중에 저런 사람이 있지...




전망대 아래 교회chiesa di santa maria delle scale에서 결혼식이 있었는지 신랑신부와 하객들이 쏟아져 나왔다. 제니는 결혼식이라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사진을 찍고 신이 났다. 여행 중 처음 보는 결혼식이라면 저럴 수 있지 싶다. 나는 내 관광의 최대 적이 결혼식이라고 느낄 지경으로 너무 많은 결혼식을 본 처지라 오늘도 저 교회를 못 보는 이유는 결혼식이었구나 라는 생각만 든다. 결혼 행사의 클라이막스... 하늘로 풍선을 날렸고, 풍선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드론이 모든 장면을 찍고 있었다. 무심코 시칠리아에서 드론으로 사진을 찍으리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라는 말이 나왔는데, 그 말이 닉에게 들렸는지, 닉이 나를 향해 '오, 노!'를 외친다. 오, 노? 오, 노라니... 그 두 단어가 내가 시칠리아를 얕잡아 봤다는 뉘앙스로 들리며, 황당하다. 사람을 뭘로 보고... 섬세하다 했더니 너무 예민한 것 아님? 피해의식 있나?

내가 기술 수준으로 다른 사회를 판단한다고, 그런 기준으로 시칠리아를 무시했다고 생각하니 라고 묻고 싶었지만, ‘오, 노!’ 두 단어로 짐작하고 들이댈 말은 아니다 싶다. 한편, 내가 선진한 기술로 주목받는 나라 출신이 아니었다면 그런 식으로 반응하지 않았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느새 우리나라가 외국인들에게 첨단 기술을 뽐내며 다른 나라를 얕본다는 선입견을 주는 나라가 된 건가? 우리나라에서는 번듯하게 대리점에서 팔리는 전자레인지가 미국 k-mart 구석에 싸구려 전자제품들 사이에 전시되어 있던 모습을 봤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격세지감이다. 남들 배 아프게 만드는 이미지가 좋을 건 없지만,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어디? 라고 되묻던 상황보다는 훨씬 낫지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