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구자 이블라에서 라구자 수페리오레 가는 길, 걸어서...
끝이 없을 것 같던 계단은 '계단 옆 산타마리아 교회chiesa di santa maria delle scale'에서 끝이 나고, 여전히 오르막길이긴 해도 더는 계단이 없다. 수페리오레는 이블라와는 사뭇 다르다. 동시대에 건설된 마을이고, 레이아웃이 직선과 곡선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두 마을이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 같은데 너무 다르게 느껴진다. 이블라 귀족들이 지진으로 완전히 무너진 도시를 재건하며 옛 레이아웃을 고수했던 것이 단순히 옛것에 대한 고집만은 아니었을 것 같다. 곡선의 세상에서 갑자기 직선의 세상으로 들어오니 왠지 뭔가 포용과 관용의 여지가 없어진 것 같은 느낌이랄까... 주민들은 어떻게 느낄지 모르겠지만, 관광객에게는 틀어지고 꼬불거리는 골목이 훨씬 더 매력적이다. 어제 성당의 축이 성당 앞 광장의 축과 일직선이 아니라며 마음이 불편하네 어쩌네 했던 것 다 취소...^^
[라구자 수페리오레 시청]
[라구자 수페리오레 우체국]
왠지는 모르겠지만 예사롭지 않은 건물이 많다. 관공서 중에 유독 우체국에 공을 들였는지, 우체국 건물이 매우 인상적이다. 나는 이런 느낌의 건축물을 공산당스럽다고 표현하는데, 안내서는 파시스트 건축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실제 파시스트가 지은 건물인지 까지는 모르겠지만, 건물 자체가 전체주의 프로파간다로 보인다. 감성 제로 인간들의 산물인 듯 위압적, 과시적, 기능적... 인간적 요소가 보이지 않는다.
[라구자 수페리오레 세례자 요한 대성당]
직선으로 쭉 뻗은 이탈리아 거리corso italia를 따라 걸어 성당 도착. 대성당cattedrale di san giovanni battista 정면은 약간 이집트 신전 같은 느낌이 든다. 주상 복합 건물처럼 아래층에 상가가 있고 그 위에 성당이 있다. 성전 아래가 상가여도 되나? 아무튼 성당은 2단 구조인데 1단에 비해 2단이 급 좁아져서 사다리꼴로 보인다. 필라스터pilaster 기둥이 러스티케이티드rusticated 되어있다. 벽과 접착된 면을 제외하고 모든 면이 보이도록 모서리를 깎아내는 것을 러스티케이트rusticate한다고 표현한단다. 많이 봤지만 용어는 처음 알았다. 나는 벽이든 기둥이든 러스티케이트 된 장식을 볼 때마다 별로라고 생각했었다. 불편했던 바로크 양식에는 이제 많이 적응이 된 걸 보면 언젠가 저런 식의 장식도 좋아지는 날이 있을 수도... 입구 위 세 조각상은 원죄 없이 잉태된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 사도 요한이라고 한다.
[세례자 요한 성당 내부]
성당 문이 닫혀있다. 아무리 주말이라도 성당 주변인데 모두 문을 닫고 텅 빈 도시처럼 조용하다. 성당 앞 카페에 들어가볼까 봤더니 문은 열려있어도 장사는 하지 않는 듯, 의자가 모두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다. 이게 관광객이 없는 도시의 진짜 모습일까? 이블라도 관광객이 없다면 이런 느낌일까? 라구자의 주교좌 성당인데 지나칠 수는 없어 문 열 때까지 성당 앞 벤치에 앉아 기다렸다.
예배당 마다 설명이 쓰인 안내판이 있다. 보기 드물게 친절한 설명이다. 관리가 잘 된 상태 때문에 오히려 신축 교회 같은 인상을 준다. 이런 교회가 우리 동네에 있다면 매번 감동하고 닳도록 구석구석을 봤을 테지만, 시칠리아에 좋은 교회가 너무 많다. 너무 많아 감사를 잃은 것 같다. 입구 오른쪽에 세례당을 장식한 프레스코화가 인상적이다. 세례당 중앙의 조각상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예수라고 한다. 흰색 돌을 박아 넣은 검고 반들반들한 바닥이 예쁜데, 검은 재료가 돌은 아닌 것 같다. 아마도 이 일대에서 났다던 천연 아스팔트가 아닐까 싶다.
[대성당 종탑에서 본 풍경]
발 때문에 종탑에 올라갈까 말까 고민하다 올라갔다. 매일 멀쩡히 메고 온갖 종탑을 무사히 오르던 배낭이 자꾸 계단 벽에 쓸린다. 이곳이 유난히 좁은가 보다. 폐소공포증 있는 사람이 이탈리아에 와서 못 할 두 가지는 아마도 샤워와 종탑에 올라가는 일이 아닐까... 끝까지 오르니 라구자 수페리오레를 360도로 다 볼 수 있다. 내 시선의 높이로만 봤다면 절대 알 수 없었을 도시의 모습... 다리는 아파도 오르면 늘 보람을 찾는다.
점심
답사하듯 버스정류장까지 갔다 돌아오는 길에 다리 위에서 협곡 풍경도 보고 박물관을 볼 생각이었는데, 멈춘 듯한 도시의 기운에 전염된 듯 의욕이 없다. 밥이나 먹어야겠다. 이블라에 가서 좋은 식당에서 먹고 싶은데, 그러자면 점심 시간이 지날 것 같다. 근처를 검색해서 한 곳을 찾았는데 가보니 장사를 안 한다. 옆에 1956년부터 했다는 식당이 있어 세월 값을 하겠지 하고 들어갔다. 관광객을 위한 메뉴판을 주는데 별로 마음에 드는 메뉴가 없다. 동네 사람들에게 주는 메뉴판이 따로 있는 것 같아 보여달라고 했더니 손으로 써서 묶어놓은 메뉴판인데 이삼십 페이지는 된다. 옛날 요리 공부 했던 가락이 있어 웬만큼 알아보겠다. 이 지역이 돼지고기 요리를 잘 한다 하고, 매일 단백질이 부족한 식단이란 생각이 있어 돼지 정강이 구이와 오렌지 샐러드를 시켰다.
생각해보니 어디서든 오븐에 구운 돼지고기를 맛있게 먹어본 기억이 없다. 심지어 세계적 명성의 세고비아의 새끼돼지 구이도 그저 그랬다. 오늘 정강이 구이는 매우 짠, 세고비아의 새끼돼지 구이 같다. 돼지고기는 우리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게 먹지 싶다. 그럼, 앞으로 오븐에 구운 돼지고기 요리를 시키지 않을 것이냐? 그렇지 않을 거다. 혹시나 하며 또 시키고, 역시 맛이 없군 할 게 분명하다. 맛있는 돼지고기 구이를 만날 때까지... ^^ 오렌지 샐러드에는 펜넬을 너무 많이 넣었고 오렌지 속껍질이 너무 질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