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2/2020

시칠리아 여행: 16: 시라쿠자: 고고학 공원 가는 길



[시라쿠자 골목 풍경]


시라쿠자는 다른 도시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도 있고 관광객도 많다 보니 hop-on hop-off 투어 버스가 있나 보다. 조지가 알려 주었는데, 시라쿠자 본토를 둘러볼 때 유용할 것 같고, 일정을 버스 노선 대로 짜도 알찬 하루가 될 것 같다. 걷기 좋아하고 날씨 좋으면 다 걸어 다닐만한 거리지만 삼복 더위에 땡볕이라... [걸어봐서 하는 말이다.^^ 날씨도 날씨고, 길도 보행자에게 그렇게 친절하지 않다.]

[Siracusa Open Tour. 1일 5유로, 20분 간격으로 운행. 오르티지아 섬에서 나가 chiesa di santa lucia al sepolcro (정류장은 아니지만 요청하면 세워준다고...)> latomia dei cappuccini> museo archeologico regionale paolo orsi> catacombe di san giovanni> parco archeologico neapolis를 돌아 다시 오르티지아 섬으로 돌아온다. ]

시라쿠자 오픈 투어 버스의 가장 가까운 정류장은 아르키메데스 광장 근처 카페piazza archimede caffe' 앞에 있어 그곳으로 갔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 다 탈까 싶은데, 줄을 서면 좋을 텐데 줄을 서지 않는다. 네다섯 명의 동양 여자들이 왔다. 어느 나라 출신이냐고 묻는다. 그래서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더니 미얀마에서 왔단다. 그런데 너무 중국 사람들 분위기다. 버스가 왔고 나보다 한참 늦게 온 그들은 예상처럼 염치 같은 것은 없다. 그들 중 몇 명이 나를 제치고 버스에 오른다. 그들을 다 태우고 탔다가는 못 탈 분위기이기도 하지만 염치없는 사람들에게 양보는 몰염치를 습관으로 만들어 주는 일... 보이지 않아도 엄연히 존재하는 내 차례를 챙겨 버스에 올랐다. 누군가 좌석이 없다며 그들 일행 중 마지막 한 명을 가로막는다. 그런데 일행이 탔다는 아우성에 못 이겨 마저 태워준다.

몇 정거장쯤 가서 한 여자가 탔다. 명품이라는 브랜드 가방 손잡이에 스카프를 감아 놓은 것 하며 한동안 유행하던 팔찌, 염색한 머리 스타일, 옷차림... 너무 한국 사람이다. 기사에게 차비를 건네며 버스에 오르자마자 기사 옆 보조의자를 펼쳐 앉더니 고개를 푹 숙인다. 관광객인데, 차창 밖에 눈길 한번 안 준다. 기사가 버스를 타면 무료로 제공하는 이어폰을 내미니,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없이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내 보여준다. 됐다는 말이다. 기사가 어디서 났느냐고 물어도 아무런 대답이 없다. 어제도 탄 거냐고 재차 물으니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인다. 내내 그러고 있다가 산 죠반니 교회에서 역시 고개를 푹 숙인 자세로 내렸다. 카타콤베를 보러 가나 보다. 저렇게 온 몸으로 온 세상을 거부하고 싶다는 뜻을 발산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싶다. 세상이 자신을 외면해주길 저렇게 바라며 또는 세상을 저렇게 외면하며 먼먼 이곳까지 온 사정이 무엇일까? 세상에 자신의 시선조차 닿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 듯 보이는 사람이 여행을 하고 있는 것도 이상하지만 뭔가를 보겠다고 내리는 건 더 이상하다. 그곳에서는 과연 저 떨구어진 고개가 들릴까?






too much of greek...

평생 박물관 또는 TV에서 말고는 그리스 유적을 한번도 못 보고 살다가, 며칠 사이 실제 그들이 살던 유적을 너무 많이 봤더니, 이 섬에 강력하고 발달된 문화의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가 존재했다는 것을, 우리가 그리스라 지칭했던 지역에 펠로폰네소스 반도 일대뿐만 아니라 시칠리아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을 이젠 그만해도 알겠다 싶었다.

어제 노토 가는 길, 그리스 조각이 살아 움직였다. 표 파는 기계 앞에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조각은 역 광장에서 여자친구와 헤어지는 인사를 나누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스 미소년 조각의 얼굴과 몸매다. 옆에서 본 얼굴이 그리스 조각을 볼 때 뭔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던 코에서부터 턱을 지나 목까지 이어지는 선이 그대로 그 청년에게 있다. 머리카락도 조각의 모습처럼 뭉게구름처럼 풍성하고 구불구불 하다. 달려가서 사진 몇 장만 찍게 해달라고 사정해보고 싶었다. 여자친구로 보이는 아가씨만 옆에 없었더라도 용기를 내봤을 수도 있다.

여자 중에는 옛날 프로비던스providence라는 미국 드라마에 나왔던 여주인 공을 볼 때마다 그리스 조각같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지만, 그리스 조각같다는 생각이 든 남자는 어제 봤던 청년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투어버스를 타고 고대 그리스 유적지인 고고학 공원으로 가는데, 또 조각상이 걷고 있다. 길이 막혀 서행 중이었는데 시선을 돌릴 수가 없다. 아니, 돌리기 싫다. 내 시선이 너무 강했는지 그 소년도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가 자꾸 나를 본다. 아직까지 시칠리아 어디에서도 못 본, 아니, 내가 가본 서양 어디에서도 못 본 신비한 느낌의 얼굴이다.

지금까지 내가 들어본 그리스 조각 같이 생겼다는 수식어는 모두 거짓이거나 뻔뻔한 과장이다. 진짜 그리스 조각 같이 생긴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유전자가 이 땅에서 기적적 확률로 보존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시라쿠자의 그리스는 과거가 아니고 현재인가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