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나 화면으로 수백 번은 봤을 그리스 신전을 드디어 실제로 보는 날이다. 그리스 신전의 실물을 보고 싶기 시작한 지는 꽤 됐다. 신전의 대명사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을 보러 가야 하나, 나폴리 근처에 있다는 신전을 보러 가야 하나 했는데, 시칠리아에도 그리스 신전이 있다는 거다. 그런데 한 개도 아니고 세 개나, 잘 보존된 상태로... 세제스타, 셀리눈테, 아그리젠토에... 웬만하면 없는 선택 장애가 이상한 데서 발생한다. 뺄 것을 못 고르겠다. 다 보면 되지, 뭐... ^^ 세 곳 모두 일정에 넣었고, 세제스타segesta 신전이 그 중 첫 번째다. 세제스타는 트라파니 지방에 속하고 트라파니 지방의 수도인 트라파니 시에서 동남쪽으로 30여km 떨어진 곳에 있다.
버스 정류장에 생각보다 빨리 도착해서 버스 시간까지 20분이 남았다. 어제 담배가게에서는 버스 기사에게 직접 표를 사라고 했는데, 정류장에 붙어있는 안내문을 보니 버스표 파는 곳과 주소가 써있다. 진짜... 어쩌라는 건지... 시간 여유가 있으니 한번 찾아보자 싶어 열심히 찾았더니 어제 그 담배 가게다. 물이나 사자 하며 들어가서 다시 확인하니 기사에게 사는 것이 맞는단다.
오늘도 세제스타에는 나밖에 없을 예정인지 버스 시간이 다 됐는데 나 말고 아무도 없다. 사람이 없으니 버스가 있는 건 맞나 싶어 잠시 초조했는데, 다행히 버스가 제 시간에 왔다. 버스표도 기사에게 사는 것이 맞았다. 내 목적지의 정식 명칭은 parco archeologico di segesta이다. 목적지를 말하니 perfetto라고 칭찬이다.^^ 기분이 좋다. 버스표 뒤에 돌아오는 버스 시간을 적어 준다. 선함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을 보면 순간 나도 그런 사람이고 싶다. 하지만 곧 상처받고 분노하고 마음에 옹이가 생기기도 하고 앙심을 품게 되기도 한다.
아직 승객은 나 한 명. 덕분에 가장 좋아하는 오른쪽 맨 앞자리가 내 차지다. 설마 나밖에 없을까 했는데, 한동안 기다려도 승객이 더는 오지 않았고, 기사 아저씨와 나 그렇게 단 둘이 그 큰 버스를 타고 출발했다. 이래서 버스가 없어지는구나 싶다. 안타깝다. 더 없어지면 안 되는데...
아무튼 오늘 세제스타에는 나밖에 없을 예정인가 보다. 땡볕에 기절해서 쓰러져도 아무도 나를 구해주지 않을 건가 보다. 정확히 말하면, 나를 구해 줄 사람이 한 명도 없을 예정인가 보다. 바로 어제 밤에 남들 하지 않는 짓은 다시 하지 않기로 했는데, 바로 다음 날 나 말고 아무도 하지 않는 짓을 또 하게 되었다. 왜 사람들은 세제스타에 가지 않는 걸까?
가로수에 진분홍 꽃이 활짝 펴서 꽃길이다. 유도화 또는 협죽도라고 불리는 나무인데, 요즘은 보기 드물지만 다들 주택에 살던 시절에는 집집마다 이 식물 화분 하나씩은 있을 만큼 흔했다. 관목으로 알고 있는데 이곳이 저 나무의 생장에 좋은 환경인지 교목처럼 자라 가로수가 되었다. 제주도에서도 이렇게 큰 나무를 본 적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나무 줄기에 맹독이 있다는 사실은 모두 알고 심은 것이겠지?소풍 갔던 가족이 젓가락을 챙기지 않아 이 나뭇가지로 젓가락 삼아 밥을 먹고 다 죽은 일이 실제로 있었다고, 어린 조카들이 즐겨보던 프로에 나왔었다.
급하게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건물들이 늘어선 트라파니 신시가지를 지나는데 생뚱맞은 교회 건물이 보인다. 뾰족한 종탑과 멋진 장미창... 세월이 느껴진다. 지도를 보니 santuario di maria santissima annunziata다.
[P.S. 14세기 교회인데 18세기에 재건축되어서 고딕 스타일 입구와 장미창이 있는 정면 정도만 원래의 모습이란다. 항구도시의 교회답게 어부와 선원에게 봉헌된 예배당도 있고, 트라파니가 신성시하는 우상,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의 조각상 madonna di trapani가 모셔져 있는 마돈나 예배당도 있다고 한다. 교회에 수도원이 붙어있는데, 지금은 주립박물관museo regionale pepoli으로 쓰고 있단다. 안내서를 읽어보니 트라파니의 주산품인 산호 조각 장식 등 흥미로운 전시물이 많다. 트라파니에서 손꼽히는 주요 명소라고 한다. 가보고 싶었는데, 구도심과 해안만 맴돌다 가보지 못했다.]
여행하며 자주 음성인식 기능을 사용해 메모한다. 여행 전에는 한번도 쓰지 않았었는데, 감동할 수준의 음성 인식률은 아니어도 없는 것 보다 훨씬 낫다. IT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눈에 나는 반동분자다. IT 산업의 발전(?)을 위해 10여년을 일해놓고 이제 와서 기술 발전에 비협조적이다.^^ 개인 정보를 다 까고 받아야 하는 공짜라는 허울의 서비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 개인 정보 노출이 두려워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내 정보야 알려주겠다고 해도 그들이 거부하리라, 흥미로운 것도 쓸모있는 것도 없어서...
선의로 포장하여 공짜로 편리를 제공하지만 결국 사람들을 길들이는 과정... 나는 신종 gaslighting이라고 본다. 교묘해서 저항하기도 피해를 호소하기도 애매한... 이런 방식 비즈니스의 위험성을 설파해봐야 그러는 사람만 이상해지는... 차츰 길이 들어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그리고 그렇게 되는 순간 상대가 정체를 밝혀오는... 그들은, 기술을 선도한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이 기술이 가져올 미래를 감당할 수 있을까? i don't think so... 가랑비가 내리지만 아무도 우산을 펴지 않는다. 편리함에 대한 대가로 무엇을 지불하고 있는지, 어떤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지 생각하면, 살 날이 많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현재 IT 산업이 가는 방향이 두렵다. 그러면서도 눈 앞의 편리함에 많이 자주 굴복한다. 살 날도 많이 남지 않아 괜찮다고, 다행이라고 하면서... ^^ 다만 소심하고 소소하게 혼자서 되도록 너무 의존하지 않으려 할 뿐이다. 그런데 이번 여행을 계기로 거부하던 것들과 웬만하면 다 텄다. 그리고 이렇게 속내까지 까지도 술술 다 털어놓고 있다.
구글은 알고 있다, 내가 시칠리아에서 하는 짓을, 모두...
수박을 봉고차 가득 싣고 와서 길에서 팔고 있다. 조금 지나니, 또 수박을 작은 트럭 뒤에 가득 싣고 나와 팔고 있다. 근처에 수박 밭이 있나? 구시가지에 있어서 몰랐는데, 트라파니가 생각보다 큰 도시인가보다. 한참 지났는데도 도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팔레르모와 마찬가지로 그다지 부유해 보이지 않지만 그렇게 궁색해 보이지도 않는다. 사람들의 모습이 소박하게 평범하게 사는 내 주변 사람들과 비슷하다. 또 수박을 엄청나게 쌓아놓고 팔고 있다. 지금이 수박 철은 확실한 것 같은데 수박 가격이 너무 싸서 기절할 뻔 했다. 0.5유로. 무등산 수박처럼 길쭉하게 생겼고 크기도 비슷하다. 가격을 제대로 본 게 맞나 싶다. 뉴스에서는 농민들이 밭을 갈아 엎는다 해도 슈퍼 가격은 그대로인 우리 나라와는 달리, 이곳에서는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확실하게 작동하나 보다.
시칠리아 지도를 하도 봐서 도로 표지판 지명이 익숙하다. 어쩌면 우리나라 지명 보다 더 잘 알 수도 있을 것 같다. 버스는 팔레르모와 마짜라 델 발로Mazara del Vallo 방향의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언덕 꼭대기에 뼈대만 남은 건물들이 간간히 보인다. 주변 밭들이 경작되고 있는 것을 보면 농사 짓던 사람이 살던 곳 같은데 왜 버려졌을까 궁금하다. 교통이 발달해서 굳이 농지 가까이에서 불편하게 살 필요가 없어진 걸까?
멀리서 풍차들이 돌아간다. 아무도 하지 않는 것을 혼자 하는 장점이 엄청 많다. 버스에 사람이 많았다면 이렇게 전면 유리창으로 풍경을 온전히 즐기며 마음 놓고 사진도 찍고 음성 메모도 하며 갈 수 있었을까...
언덕 등성이에 올리브나무 여남은 그루가 쪼르륵 줄지어 심겨 있다. 생선 등지느러미처럼... 저렇게 심은 이유가 있을까? 나무 몇 그루가 능선을 100배는 더 예뻐 보이게 만든다. 능선 위 하늘이 예쁘다. 풍경에 대한 감탄을 멈출 수가 없다. 날씨에 따라 계절에 따라 오고 가는 시간에 따라 매번 다르리라. 문득 오늘도 나 하나를 태우고 무심히 이 길을 달리는 기사 아저씨의 눈에 이 풍경은 어떨까 궁금하다. 길은 같아도 풍경은 하루도 같은 날이 없기에 즐겁게 다니지 않을까... 누가 뭐라는 것도 아닌데 고속도로 풍경에 호들갑스러운 찬사를 연발하고 있는 게 무안한지 동조자를 구하고 싶은 것 같다.
멀리 둥글둥글한 것들이 보이길래 건초 더미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양이다. 양들아, 미안. 그런데 순간 그렇다면 양고기를 먹어봐야 하는 것 아니야? 저렇게 자유롭게 자라는데 얼마나 맛있겠어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양들아, 또 미안... ^^
[세제스타 고고학 공원 입구]
구글 지도를 보니 1km도 남지 않았다. 11시에 도착한다 하더니, 11시다. 버스가 제시간에 오고 제시간에 도착하는 것만으로도 감동.^^ 고고학 공원 바로 앞에 버스가 선다.
기사 아저씨가 1시, 4시 버스 중 어느 버스로 돌아올지 묻는다. 마르살라 염전 투어가 확정되어서 촉박하지만 일찍 돌아가야 한다. 1시 버스를 탈 거라고 하니, 그러면 셔틀버스를 타고 극장으로 먼저 올라가서 극장을 먼저 보고나서 신전을 보라고 한다. 그러면 시간이 적당할 것이라고. 돌아오는 버스 타는 곳도 알려 준다. 사소한 친절 같지만 따뜻하고 귀한 마음이다. 이런 사람이 좋고 또 세상이 이랬으면 좋겠다. 혼자이니 받을 수 있는 특별 대접인 것 같기도 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