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8/2020

시칠리아 여행: 10: 아그리젠토: 도착 & 숙소



아그리젠토 도착. 버스 터미널stazione autobus(piazza fratelli rosselli, agrigento)에서 내려준다. 터미널... 도착하고 떠나는 곳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터미널이라 그런지 낯선 도시임에도 난데 없이 길바닥에 덩그러니 떨궈진 느낌은 아니다. 어느새 네 번째 도시. 시칠리아의 낯선 도시를 만나는 일이 더는 그렇게 긴장되지 않는다. 매번 긴장한 보람(?)이 없으니 의욕 상실 상태인지도 모르겠다. 도시 풍경도 특별히 인상적이지 않다.
 

[아그리젠토 piazzetta vadalà. 이 광장과 마주보는 길이 아그리젠토에서 가장 유명한 via atenea]

[표지판에 아그리젠토가 보여주고 싶은 게 빼곡히 적혀있다. 오른쪽 맨 아래는 기차역]


방향감각도 공간지각력도 없게 타고난 데다가 2차원 평면 지형에 길이 들어놔서, 아무리 위성 사진과 스트리트 뷰를 봐도 숙소 가는 길이 가늠이 안 됐다. 가보면 어떻게 되겠지, 설마 길을 못 찾겠니 했었다. 

막상 이곳에 와보니 언덕 위에 형성된 도시인데, layout이 마을 만들기 공작 시간에 탄생할 법한 작품처럼 창의적으로 입체적이다. 주소로 봤을 때 도로에서 지붕이 보이는 집들 중 한 곳이 숙소일 것 같은데 어떻게 그곳으로 내려가는지 알 수가 없다. 내려가는 계단이 있어 내려갔더니 남의 집으로 들어가는 통로 같은 길이 나와 남의 집 무단침입 하려다 들킨 사람마냥 다시 튀어 올라왔다.

마침 근처 은행 앞에 경비 아저씨가 서성이길래 저 아래쪽으로 어떻게 내려가냐고 물으니, 어디를 가느냐고 되묻는다. 나라면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말에 답을 했을 텐데, 아저씨는 먼저 질문의 의도를 파악한다. 그러게... 묻는 말에 답하기 전에 의도를 먼저 파악하는 것... 그게 안 되는 사람으로서 아저씨의 대화 기술에 일단 탄복하고, 순순히 목적지를 말했다. 

그러니 잠깐 기다리라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더니 대뜸 전화를 해서 여기 일본 사람이 너희 집을 물으며 서 있다고 한다. 그러고 전화를 끊더니 지금 데리러 온다고 하니 기다리란다. 엉엉... 나도 질문 의도를 물어볼 걸... 탄복만 하지 말고 학습을 했어야지... 

일단 일본인 아니고요, 전화번호는 저도 알고요, 휴대폰도 있고요, 전화를 할 것 같으면 제가 했겠지요. 제가 길치는 맞는데 에스코트가 필요한 정도는 아니고요, 묻는 대로 내려가는 방법만 알려주면 될 것을 이게 왠 만행이냐고요! 고맙다고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저씨가 같이 에스코트가 올 때까지 기다려주겠다는 태세라 그냥 갈 수도 없고... 엉엉... 

곧 순딩순딩한 훈남 청년이 남의 집 입구 같던 그 계단으로 올라온다. 그냥 끝까지 내려가 볼 걸... 아니면 올라오면 됐잖아. 관광객이 어리바리하다 남의 집 마당 한번 기웃거리는 게 뭐가 대수라고 놀래서 튀어 올라오냐고... 설마 총이라도 쏘거나 경찰에 신고야 하겠냐고...



[아그리젠토: 전날 1도 안보이던 입간판이 다음날 보니 숙소로 내려가는 계단 입구에 저렇게 버젓이 서있다. 어떻게 이걸 못 보냐고!!! ^^]


호스트 청년은 세상 풍파 없이 자란 사람처럼 밝고 구김 없어 보인다. 누군가의 집으로 의심한 곳은 레스토랑이었다. 유명한 곳이고 파스타가 엄청 맛있다고 이야기해준다. 숙소는 레스토랑 바로 아래 건물. 테라스에서 바다가 보인다. 와... 테이블이 몇 개 놓여있는데, 아침식사는 여기에 차려놓으니 먹으면 된다고 한다. 집안으로 들어가며 내가 혹시 방을 누군가와 공유해야 하는 거니? 라고 물으니, 무슨 그런 어이없는 질문을 하냐는 표정으로 혼자 쓴다고 한다. 다행... 얼마나 쫄았었는데...^^


[아그리젠토 숙소: villa pirandello]


방은 걱정이 무색하게 좋다. 크고 깨끗하고 세련됐고 흠을 잡을 곳이 없다. 물에 음료수에 커피기계도 있다. 트라파니 숙소를 겪어서 점수가 후해진 것도 있겠지만 절대적으로 평가해도 이곳은 그 가격으로는 구할 수 없는 곳이다. 지랄같은 아빠를 둔 작가이긴 해도, 숙소의 이름이 작가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고, 내심 나쁘지는 않으리라는 기대 어쩌면 바람이 있었다. 유명 작가의 명성에 기대려는 의도가 있을지언정 작가의 이름으로 이름을 짓는 사람들이 나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맞길 바랐다. 방 벽에 새긴 그의 작품에서 인용한 문구를 보니, 나쁘지 않을 뿐더러 좋을 수도 있겠다 싶다.^^

청년에게 영어를 하느냐고 물으니, 당연하지 라고 대답은 했는데 잘 하는 눈치는 아니다. 단어 몇 개와 손가락과 표정으로 모든 것을, 심지어 여행 안내 팜플렛까지 설명하는데, 왠지 무슨 말인지 다 알 것 같아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다고 하니, 짧게 끝나지 않을 낌새를 느꼈는지 지금 파스타 먹던 중이었는데 짐 풀고 레스토랑으로 오라고 한다. 왠지 영어 못하는 것 들통날까 봐 도망가는 느낌도 들었지만, 밥 먹다 은행 경비 아저씨 전화에 불려 와서 이러고 있다 생각하니 미안했다. 누군가의 면을 불게 하는 것은 만행이다. 어서 가서 먹으라며 보냈다.


[아그리젠토 숙소 이웃들. 저 세 집이 품앗이하듯 서로 사정 봐주며 지내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그게 마지막이었다. 더는 청년의 얼굴을 볼 기회는 없었다. 특별한 배려나 친절도 없었고, 궁금한 것이나 아쉬운 것은 내가 알아서 해결했고, 안되면 근처 아무나 눈에 띄는 사람을 붙잡고 말하면 그럭저럭 해결이 됐다. 내가 이 집의 손님이 아니라, 이 동네의 손님인 듯한 느낌... 그렇다고 특히 불편할 것도 언짢을 것도 없는, 참 이상하게 편하게 느껴진 숙소였다. 오래 있었어도 정말 편히 잘 지냈을 것 같다.



P.S. 방 벽에 걸린 피란델로의 희곡 리올라(Liolà)에 나오는 구절

"Nun chianciri, juzzidda, un t'appinari!  "울지마, 아가야, 걱정마!
Quannu lu fai, non lu fari muriri 아이를 낳았으면, 죽게 내버려 두지 마.
Tri, e unu quattru - e cci nsignu a cantari!" 셋, 하나 더 넷 - 그들에게 노래하는 것을 가르칠 거야"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낙천적 바람둥이 미혼부가 자신의 아이를 가진 여인을 위로하며 배다른 아이들을 향해 삶의 아름다움을 알려주겠다고 다짐하는 노래라고... 결혼이라는 속박은 거부하지만, 삶과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핏줄에 대한 사랑과 책임은 저버리지 않는 파격적 캐릭터. [한 달을 여행하며 얼핏 느낀 시칠리아의 기질과 닮은 느낌. 제도와 형식에 가둬지지 않는 본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