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하이라이트는 당연히 수천 년의 시간을 견디고 내 눈 앞에 당당히 서있는 그리스 신전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지로 수없이 봤던 것의 실물을 드디어 목격하는 날이었으니... 하지만 역시 뭐든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었다. 예상을 한치도 벗어나지 않고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서 떠나온 여행인 건 맞는데, 그렇다고 의외로운 뭔가를 기대한 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며칠 지나지 않았음에도 반전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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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부터 바닷바람 흙바람 맞으며 하루종일 싸돌아 다녀서, 좀 씻고 쉬고 마르살라 염전 투어를 가는 게 좋겠다 싶어 숙소로 들어왔다. 가이드를 만나기로 한 가리발디 광장은 5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라서, 15분쯤 있다 나가면 되겠다 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전화할 사람이 없다 싶기는 한데, 온 전화니 그냥 받아봤더니 여행 가이드라며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목소리가 왠지 낯설지 않다 싶었지만, 아는 사람일 리는 없을 거고, 그저 후덕한 중년 아저씨일 것 같다 했다.
[트라파니 가리발디 광장]
가리발디 광장...
주변을 둘러 봤지만 가이드로 보이는 사람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래서 걸려온 번호로 전화를 걸어 광장에 있는데 보이지 않는다고 하니, 자기는 지금 나를 보고 있다며 걷던 방향으로 더 내려오란다. 엉, 날 알아??? 뭐... 관광객 티가 너무 나니까 금방 알아본 것이겠지 하며 걸어가니, 알레시오가 손을 흔들며 서있다. 어쩐지... 목소리가 낯설지 않더라니... 알레시오도 전화 목소리가 나 같긴 했지만 설마 했는데 광장에 내가 나타난 순간 손님이 나인 줄 알았단다. 하하하...
좁은 곳이지만 염전 투어를 진행하는 사람이 알레시오 한 명은 아닐 텐데 이게 무슨 인연인가 싶다. 염전을 다시 제대로 보고 싶어 여행을 신청했는데 네가 나올 줄은 정말 몰랐다고 하니까, 자신도 여행사에서 일본사람 한 명이라는 말만 듣고 나왔단다. 성별도 모르고, 나이도 모르고, 말은 잘 통할지, 성격은 어떨지 긴장했었단다. 그런데 손님이 나라서 너무 마음이 놓이고 반갑단다. 가이드들도 어떤 사람을 만날지 긴장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들에게도 매번 낯선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고충이 있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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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알던 친구를 만난 것처럼 편하다. 이탈리아 커플과 함께 투어를 하는데 그들을 태우러 마르살라에 있는 발리오 오네토baglio oneto라는 곳으로 가야 한단다. 발리오는 시칠리아 사투리인데 빌라라는 뜻이란다. 발리오 오네토는 알레시오가 시칠리아에서 가장 좋아하는 빌라라는데 어떤 곳일지 궁금하다.
그들에게는 이탈리아어로 설명을 해줘야 하니 가는 길에 내게 먼저 염전에 관한 설명을 해주겠단다. 어제 들었던 이야기의 복습 심화 과정이었다. 어제 택시 승객이었던 내게 관광객에게 푸는 레파토리를 다 풀었던 거다.^^
발리오 오네토는 넓은 영지(?)에 자리잡은 빌라를 리조트로 바꿔 운영하는 곳 같다. 뚜벅이 여행자는 올 수 없는 곳이다. 옛 유럽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속 장면이 떠오른다. 말 타고 뛰어다니고 숲으로 에워싸인 잔디밭에서 피크닉하고 우아하게 산책하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관광이 아닌 휴가를 즐기는 모습을 엿본 느낌이다. 이곳에서도 결혼식이 있는지 여기저기 꽃 장식이 있다. 걷고 버스 타고 기차 타고 하는 여행에 만족하고 있지만 차로 다니면 또 다른 시칠리아를 보게 될 것 같다.
[마르살라 발리오 오네토. 위는 홈페이지 사진]
투어를 같이 할 이탈리아 커플이 건물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 인상이 좋다. 알레시오가 영어로 진행하면 어떻겠냐고 물으니 난색을 표한다. 그들을 태우고 가면서 내게 했던 설명을 고스란히, 다만 이탈리아어로 그들에게 해준다. 내용을 알고 들으니 너무 잘 들린다.^^ 계속 자신들에게만 설명을 해주니 좀 당황스러웠나 보다. 알레시오에게 내게도 설명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한다. 나는 오는 길에 들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복습까지 마쳤으니 얼마나 잘 알겠냐고... ^^
마르살라 염전이 펼쳐진 풍경이 보이는 곳으로 데려갔다. 날도 어둑어둑하고 구름이 짙어 어제 봤던 염전 보다 더 멋있고 그렇지는 않다. 알레시오가 커플에게 이탈리아어로 설명을 해주는 동안 나는 멀뚱멀뚱 사진이나 찍고 있으니 그 상황이 또 불편했나 보다. 알레시오의 말을 끊으며 내게도 설명을 해주라고 한다. 그래서 또 난 이미 들은 이야기니 걱정하지 말라고 해주었다. 입장이 바뀌었다면 나도 했을 당연한 배려지만, 품위 있는 빌라에 묵는 사람들이 매너도 좋으니 사람이 달리 보인다. ^^
[마르살라 염전]
알레시오가 우리를 차에 남겨놓고 잠시 자리를 비웠다. 언어장벽이 있으니 선뜻 말을 걸기도 좀 그렇긴 한데 말없이 좁은 차 안에 함께 있기도 어색하다. 여행자 공식 질문을 던졌다. 어디에서 왔냐고... 여자가 자신은 리투아니아 출신인데 지금은 남편과 토리노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토리노는 내게 좀 특별한 도시다. 잠깐이었지만 토리노에서 가까운 아스티라는 곳에서 이탈리아 요리를 배웠다. 그곳에 있는 동안 작은 마을에서 느끼는 답답함을 해소하는 탈출구 같은 도시가 토리노였다. 그 많은 이탈리아 도시 중에 토리노 출신이라니 반갑다. 요리를 배우느라 아스티에 있었던 적이 있다고 하니, 남자의 부모님이 아스티에 살아서 자주 간다고 한다.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데 잘 못 알아 듣겠다. 신기한 것은 그래도 시간이 지나며 어찌어찌 하다 보면 의사소통이 된다는 것이다. 남자가 하려던 말은 아스티에서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오토바이 행사가 있는데, 행사 끝나면 요리 학교가 있는 성에서 파티를 하고, 자신이 그 행사에 매년 참석한다는 것이었다. 그 마을에 요리 학교야 거기 하나 밖에 없으니, 내가 다닌 곳이다. 휴대폰을 뒤져 파티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준다. 살라sala라고 부르던, 매일 점심과 저녁을 먹던 그 요리학교의 식당이다.
대단한 인연은 아니라도, 이탈리아에서 몇 달 동안 매일 밥을 먹던 장소에서 해마다 파티를 하는 사람들을 시칠리아에서 만나 투어를 같이하게 된 것이 신기하다. 자주 가던 bar roma는 아직 있느냐고 물으니, 여전히 있단다. 말만 좀 더 잘 통했으면 할 이야기가 많겠는데 애석하게 말이 잘 안 통하지 않는다.
무리하다 싶은 우연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드라마를 보면 말도 안 된다며 작가의 창의력을 탓하곤 했었다. 하지만 이젠 작가의 창의력을 탓하지 않는다.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고 안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매일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드라마가 되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 신기한 우연이 내 인생에도 몇 번 있었다. 오늘 이들과의 만남이 드라마가 될 이야기로 발전할 가능성은 없지만, 우리가 청춘 남녀였다면 로맨스 드라마의 시작으로 충분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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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지아mozia 행 보트를 타는 작은 부두로 갔다. 풍차 달린 빨간 지붕의 소금 박물관도 있고 mamma caura라는 레스토랑도 있다. 주변엔 염전이 펼쳐져 있고, 여기저기 수확한 소금이 쌓여있다. caura는 calda(=hot)의 시칠리아 사투리라고. 시칠리아 사람들은 염전 바닥을 뜨거운 엄마mamma caura라고 부른다고 한다. 왜 그렇게 부르는지 이야기해준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난다. 한낮에 염전 바닥은 데일만큼 뜨겁다고 한다. 바닷물을 닦달하든 따뜻하게 품든 어떻게든 해서 소금을 탄생시키니 그렇게 부르는 것 아닐까... 그게 거친 시대, 거친 환경에서 등장하는 엄마들의 모습 같기도 하고... 모질고 지독하지만 생명을 탄생시키고 지켜내는 숭고한 모습... 그래서 애증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레스토랑과 주변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주변에 인적이 거의 없는데, 다 어디서 나타난 사람들일까 싶다. 이곳에서 스타뇨네 라군 유람선이 출발한다.
[수확한 소금을 덮는 테라코타]
근처에 수확한 소금을 덮어놓는 테라코타가 여기저기 줄지어 쌓여있다. 왜 저렇게 생겼는지 아냐고 묻는다. 딱 기와처럼 생겼고, 어제 갔던 염전에서 기와 얹은 모양으로 소금을 덮어놓은 것을 봤길래, 빗물 스며들지 않게 겹쳐지도록 그런 것 아니냐 했더니, 틀렸다고 좋아한다. 핀트가 빗나갔다. 크기가 들쭉날쭉한 이유를 물은 거였다. 틀로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허벅지에 대고 모양을 잡아 만들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큰사람이 만든 것은 크고 작은 사람이 만든 것은 작다고.^^ 염전 trivia.
유람선은 일몰 시각에 맞춰 떠난다. 그때까지 자유시간이다. 사든 안 사든 기념품 가게를 지나칠 수는 없다. 소금? 패스... 트라파니까지 와서 소금을 안 사는 건 말도 안되지만 배낭에 메고 한 달을 다닐 수는 없다. 선인장을 모티브로 한 도자기들.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파카소의 제자가 세웠다는 공방에서 만든 도자기들. 소금 말고는 딱히 사고 싶은 것도 없지만, 있다 하더라도 그림의 떡이다. 모두 사진으로만 남기고 만나기로 한 장소로 갔다.
알레시오가 이곳에서 일하는 지인들에게 나를 소개시켜 준다. 한국에서 온 안나라고, 이탈리아 말을 배우고 있고 ‘조금’ 한다고. 소개 받은 내용에 부응하려고 이탈리아어로 또박또박 나는 한국에서 온 안나mi chiamo anna, sono di corea라고 했더니, 그들이 내 말을 따라 mi chiamo OOO, sono di marsala라며 받아 준다.^^
여자가 보트에 오르기 전 담배에 불을 붙인다. 그런데 나를 의식하며 멀찍이 떨어져 피운다. 사소한 배려들이 고맙다. 그런데 너는 늘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서 뭐가 그렇게 고마워? 당연한 거 아냐? 하는 당황스러운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 나만 매사에 감지덕지 하나? 작은 일도 고마워하고 감사할 수 있으면 좋은 거 아냐? 하다가 그것도 왠지 좋은 것만은 아니다 싶다. 마음이 왜 이러는 걸까?
[마르살라 맘마카우라 레스토랑과 유람선. 저 작은 배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타는지 모른다.]
스타뇨네 라군을 한 바퀴 돌며 노을도 보고 와인도 마신다는 보트의 정체는 만원버스 같은 유람선이었다. 항구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다 유람선 타러 온 사람들이었나 보다. 풍악이 울렸다. 으악... 내 취향은 아니다. 알레시오는 그 소리를 뚫으며 인근 풍경을 설명해준다. 그의 목소리가 생김새보다 훨씬 더 나이든 것처럼 들리는 이유가 여기 있구나 싶다. 라군을 에워싼 섬이 세 개 있다. 그 중 한 섬이 지금 매물로 나와 있단다. 돈만 있으면 흥정에 참여해보고 싶다.^^ 라군 중앙에 있는 카르타고 유적으로 유명한 모찌아 섬이 있다. 섬은 유명하지만 정말 볼 것이 없다며 굳이 보지 말라고 한다. 볼 것이 있는지 없는 지 직접 보고 판단하고 싶다.^^ 선장이 그릴로grillo라는 시칠리아 화이트 와인을 돌렸고, 풍악 소리는 더욱 커진다. 춤을 추는 사람, 따라 부르는 사람, 앉아서 장단을 맞추는 사람. 딱 들썩거리는 관광버스다.
그 와중에 알레시오는 마르살라 와인에 대한 설명, 마르살라 와인의 역사에 등장하는 whitaker가문에 대한 설명 등을 계속한다. 일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최선을 다 한다 싶다. '모히토에서 한 잔 마셔야 할 것 같은 몰디브'에서 다이빙 강사 생활을 7년간 하다가 돌아와서 이 일을 하게 되었단다. 그 생활을 즐겼지만 그곳에 있다 보니 삶이 이루어지지 않아 돌아오게 됐단다. 삶에 무엇이라는 정의가 있다는 뜻의 말이다. 그 말이 가슴을 울린다. 삶이 어떤 것이라는 정의가 있었어야 했나? 그냥 숨쉬고 있는 시간의 합이 삶이 아니었던가? 나름의 정의 대로 만들어 가듯 살아야 했던 건가?
토리노에서 온 남자의 아버지는 팔레르모에서 군생활을 했단다. 알레시오가 자신이 팔레르모 출신이라 그 부대를 안다며, 그 부대 별명이 무슨 호텔이란다. 이유를 물으니, 농담이 아니라 군생활이 호텔 생활처럼 호화로워서 그렇단다. 그 부대에서는 식사에 랍스터가 나온단다.^^
[마르살라 스타뇨네 라군 Laguna dello Stagnone. 위는 모찌아 섬의 일몰 전후 풍경. 아래는 환상의 노을을 전설 속 이야기로 남긴 채 항구로 다시 돌아가는 중]
알레시오의 말에 의하면 이 바다에서 보는 노을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단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을인지 확인해볼 수 있는 행운은 없었다. 구름이 짙어 노루 꼬리만큼의 붉은 빛도 보여주지 않았다. 봐야 할 노을이 없어 수다만 떨게 되었던 것 같다. 알레시오는 민망해하며 미안하다고 한다. 아쉽지만 어쩌랴, 하늘이 하시는 일인 걸, 뭘...
노을 아니라도 충분히 즐거웠다. 알레시오를 다시 만난 일, 아스티를 아는 인연을 만난 일, 시칠리아 관광 보트도 타보고, 이탈리아 관광객은 어떻게 노는지 구경도 하고, 스타뇨네 라군도 보고, 염전도 또 보고, 드라이브도 하고... 못 봤으니 스타뇨네 라군에서 보는 노을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을이라는 말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나도 나만의 가장 아름다운 노을이 지는 곳이 있는 사람이라 그렇게 말하는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
돌아오는 길. 토리노 부부를 먼저 내려주고 가도 되겠냐고 묻는다. 답·정·너. 살짝 도는 것이긴 해도 내 목적지 보다 훨씬 가까운데 어떻게 안 된다고 해??? 물어봐 준 것으로 사례는 충분하지 싶다. 셋이 이탈리아어로 이야기하다 내가 신경이 쓰이는지 알아듣겠느냐고 묻는다. 30%쯤 알아듣겠다고 하니까, 셋이 일제히 30% 알아들으면 다 알아듣는 것이라고 외친다. 내심 내가 마음에 걸렸는데 맘 편히 수다떨 핑계를 찾아 진심 기뻤나보다.^^ 이제 마음 놓고 본격 이탈리아인들의 수다 타임이 시작됐다. 이탈리아어 듣기 연습한다고 생각하며 열심히 들었다. 빌라에 부부를 내려주고 잠시 reception에 들러야 하니 기다려 달라고 한다. 한 밤중 리조트에도 풍악이 울리고 있다. 결혼식 피로연이란다. 알레시오가 빌라를 보여주겠단다. 시간도 늦었는데, 됐다. 나중에 묵으러 와서 보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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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몰디브에서 7년을 있을 수 있었냐고, 감옥 같지 않았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바닷속은 매일이 다르단다. 그래서 가능했던 것 같다고 한다. 아침에 세제스타 가면서 버스기사 아저씨도 같은 길이지만 풍경은 매일이 다를 테니 즐겁게 다니지 않을까 했던 게 생각난다. 신기한 섬이다. 내 생각이 누군가에게 읽혀져 다른 누군가에게 전달되 그의 입을 통해 재생되고 있는 것 같다.
삶이 만들어지지 않아 돌아왔다고 다시 말한다. 네가 생각하는 삶은 무엇이냐고 물고 싶었지만 참고, 멀리 보이는, 어제부터 궁금했던 불빛에 대해 물었다. 산 아래에서부터 꼭대기까지 빨랫줄처럼 불빛이 이어져있다. 에리체 가는 케이블카 불빛이란다. 내일 에리체에 가는데 시간이 얼마나 필요하냐고 물으니, 빨리 보면 두세 시간이면 된단다. 잘 보려면 얼마냐고 물으니, 아마도 일주일 이란다. ^^ 묻는 김에 셀리눈테는 어떠냐고 물으니, 셀리눈테에 가면 꼭 가이드를 찾으라고 한다. 박물관에서 진행하는 안내 관광이 있고, 만약에 없으면 개인 가이드를 찾으란다, 그렇게 비싸지 않다고... 가이드 없이 보면 그냥 돌 무더기일 뿐이란다.
어쩌다 고양이 이야기가 나왔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고양이를 키운단다. 고양이가 너무 좋은데 이유를 모르겠단다. 네 마음이 좋아서 그렇다고 해줬다. 사실 그도 모르는 이유를 내가 어찌 알랴. 그런데 진심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느꼈고, 그 마음으로 잘 대해준 오늘의 고마움을 그렇게 표현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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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연coincidence의 날’이라고 하니까, 구글 번역기를 켜서 그 단어를 입력해달라고 핸드폰을 넘긴다. 이탈리아어로는 coincidenza. 도대체 왜 못알아 들은 거야? ^^ 이유를 묻는다. 너를 다시 만난 것도 있고, 그 부부와도 인연이 있더라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랬더니 자신은 그들이 다른 지역 출신이라고 들었단다. 언어가 잘 통한다고 훨씬 더 잘 알 것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은가 보다.^^ 내가 모은 깨알 정보를 풀었다. 여자는 리투아니아 출신이고, 남자는 출신까지는 몰라도 지금 토리노에서 살고 있다고. 볼 때부터 여자가 동유럽 출신인 것 같기는 했는데 어느 나라인지 알듯하며 떠오르지 않아 답답했었단다. 그런데 듣고 보니 알겠단다. 나는 남들 다 알겠다는 집시도 모르겠던데 어떻게 아는지가 궁금하다. 보면 그냥 안단다. 아마도 모국어의 어감 내지는 행간 같은 것이겠지 싶다, 절대 책을 통한 학습으로 습득되지 않는...
늦어서 숙소 앞에 내려줬으면 좋겠다고 하니까 숙소를 물으며 자신도 B&B를 한단다. 그래서 알려달라니 명함을 준다. 언젠가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는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오늘도 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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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로 돌아와 명함, 버스표, 입장권 등 오늘의 전리품을 사진으로 남기며 어제 미처 못 찍은 풍차 장식품 파는 아저씨에게 받았던 명함도 같이 찍어 두었다.
낮에 스시 온다에서 받은 행운의 쿠키를 깼더니 su sentido del humor le permitirá descarmar a un adversario라는 말이 나왔다. 스페인어다, 진짜 다국적 언어 환경. ^^ your sense of humor will permit an adversary to unarm이란 뜻이다. 언제나 유효한 말이지만 여행하는 동안에는 더욱 잊지 말아야 할... 행운의 쿠키까지 나를 염려하다니...^^ 이 땅이 다사다난하긴 해도 참 따뜻하게 느껴진다.
P.S. 나중에 풍차 아저씨에게 받은 명함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알레시오의 명함이었다. 풍차 아저씨에게는 그 명함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상자 속 명함 더미를 뒤적거려 그 명함을 찾아준 거였다. 트라파니에서 택시를 하는 사람이 알레시오만 있는 것이 아닐 텐데... 걸었던 날 소금 박물관이 문을 닫아 그곳에 택시를 부탁할 사람이 없다면 알레시오에게 전화를 했을 테고, 알레시오를 만났을 것을 생각하니 기분이 좀 묘했다. 어차피 만날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두 번이나 만나다니... 시칠리아는 뭔가 좀 이상한 섬이다. 누군가 그를 통해 메시지를 전하려 했던 걸까? 그랬다면 무엇일까? 혹시 인생에 대한 나만의 정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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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발가락의 물집
양말을 벗으니 멀쩡한 발가락이 네 개 밖에 없다. 증거 사진이 있지만 생략... 보고 싶지 않은 것을 할 수 없이 보게 되는 것만큼 언짢은 일이 없다.^^
사소하지만 심각한 일이다. 세제스타 언덕을 뛰어다닌 게 결정적이었던 것 같다. 매일 평균 20km 넘게 걸었던 산티아고 길에서도 최고 서너 개였던 것 같은데, 두 개로 시작해서 점점 늘어 이제 여섯 개 발가락에 제대로 물집이 잡혀있다. 그리고 매일 자라서 커진다. 하지만 더 이상한 일은 아프지 않다는 것. 신발을 신으면 걷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터질 듯 탱탱한데도 아무렇지도 않다. 신기하다. 그래서 별다른 조치도 안하고 조심도 안하고 별일 없겠지 하며 다녔는데 이제 약간 시한폭탄처럼 느껴진다. 혹시 터져 염증이라도 생기면... 잘 못 걷게 되면 여행 다 망한다.
케토톱 젤이라는 것을 잔뜩 발라뒀다. 언젠가 제주도 올레길을 걸으러 간다고 하니 누군가 근육통에 좋다며 알려줬는데, 물집에도 덕을 봐서 이번에도 챙겨왔다. 다 가라앉고 나면 아무리 걸어도 끄떡없을 굳은살이 배긴 천하무적 발이 될 텐데... 제발 착하게 가라앉아 주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