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전의 계곡 헤라 신전에서 본 풍경]
[신전의 계곡 동쪽 헤라 신전 입구. 뒤로 헤라 신전이 보인다.]
헤라 신전에서 가까운 동쪽 문으로 나왔다. 이곳에도 버스가 있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버스 정류장도 보이지 않고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택시들만 왔다 갔다 한다.
숙소 호스트에게 물어보려했는데 홀연히 사라져 물어보지 못했던 터키인의 계단scala dei turchi에 가는 방법... 근처에 대기 중인 기사들에게 물어보자 싶어 한 기사를 잡고 물었더니, 원래 80유로인데 70유로로 해줄 테니 지금 가잔다. 당장 가자고 그야말로 난리다. 왜 저러나 싶을 정도로... 얼마나 걸리냐고 했더니, 40분이 걸린단다. 시간을 확인하진 않았지만 ambience로 봐서는 이미 일몰 시간이 지났다. 지금 가도 뭐가 보이냐, 너무 늦은 것 아니냐 몇 번을 물어도 괜찮다고 한다.
슬슬 감이 왔다. 진실이 없는 사람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가 괜찮다는 건 내 입장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리라... 너야 당연히 괜찮겠지... 순간 이 인간을 뼛속까지 알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돼 가지 않겠다 했더니, 그럼 시내라도 가자고 또 난리다. 버스가 오긴 오는데 돌아서 가기 때문에 한 시간이나 걸린다며 거의 생떼를 부린다. 여러 상황으로 봐서 그 말은 맞는 것 같은데, 어리숙한 관광객 등쳐먹을 속셈을 다 드러낸 사람의 택시를 타고 싶지 않다. 그래도 버스를 타겠다고 거절하니, 성질을 내며 가버린다. 참나... 내 얼굴에서 살아온 세월이 안 보이나... 머리를 좀 써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날은 더 어두워지고, 버스는 안 오고... 그러던 차에 여자가 기사인 택시가 왔다. 가격을 물어보고 바로 탔다. [시칠리아에서 미터기로 가는 택시를 본적이 없다. 항상 미리 택시비를 흥정을 하고 타야 뒤탈이 없다고 한다.] 나는 숙소를 차로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1도 모르겠다. 그래서 거리 이름과 숙소 이름을 대며 아느냐고 물었더니, 잘 아는 듯 대답을 한다. 버스가 돌아서 간 건지 버스로는 꽤 걸렸는데, 택시로 오니 신전에서 시내까지는 엄청 가깝다.
기사는 이 근처라며 혼잣말로 몇 마디 꿍얼거리더니 그곳을 지나쳐 슬그머니 역 앞에 차를 세운다. 그러고는 가타부타 아무 말이 없다. 그녀도 그 주소지로 어떻게 접근하는지 모르는 거다. 저 침묵은 웬만하면 다 거기서 거기니, 알아서 가라는 뜻이리라. 이럴 때는 왜 그렇게 상대의 뜻이 잘 이해되는 걸까... 이해가 안 돼야 묻기라도 하고, 따지기라도 하지...
침묵에 담긴 그녀의 뜻을 따라 10유로 주고 알아서 조용히 내렸다. 목적지가 아니라고 돈 안 내고 그냥 내려볼 걸 그랬나? 그랬으면 무슨 말이라도 한 마디 했었을까? 할머니가 의뭉스러운 사람을 가리켜 쓰시던 표현이 생각났다. 소 죽은 귀신. 영혼이 없는 사람인 것 같다. 와... 살다살다 별 사람을 다 본다 하며 어두워진 길을 걸으며 이런 걸 두고 아그리젠토의 마피아 식 영업방식이라 한 건가? 하다 뒤늦게 소름이 끼친다. 어쩌면 좀비일 수도 있어, 조용히 눈치껏 내리길 잘 했어 라고 마음이 말한다.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숙소에 호스트는 결국 없었다. 호스트를 믿었다면 터키인의 계단은 못 갈 뻔했다. 씻고, 빨래하고, 비용 정리하고, 사진 백업하고... 내일 묵을 엔나enna 숙소에 전화해서 예약도 확인하고, 짐도 챙길 수 있는 것은 다 챙겨두었다. 내일 엔나로 이동도 해야 하고 일찍 터키인의 계단도 다녀와야 하고 기차시간 전까지 시내도 돌아볼 생각이라 바쁘다.
하루 만에 이동하기는 이곳이 처음이다. 그런데 이건 아니다 싶다. 맨몸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즐길만하지만 짐을 다 풀었다 다시 싸 들고 하루 만에 이동하는 것은 여행보다 노동에 가까운 것 같다. 시간 절약을 기대했는데, 목적지에 도착해서 숙소 찾아가서 체크인하고 다시 나오는데 시간이 꽤 걸려, 시간 절약 효과도 없다. 다음 3일은 어쩔 수 없어 매일 이동해야 하지만 노토와 모디카는 시라쿠자에서 당일치기로 다녀오는 편이 낫겠다 싶다. 예약 사이트를 검색하니 변경이 가능하다. 미련 없이 노토와 모디카 예약을 취소하고 시리쿠자 예약을 이틀 추가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오늘...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이틀로 잡았던 일정을 어쩔 수 없이 하루로 줄이다보니 빡빡한 일정이었는데, 버스도 너무 오래 기다렸고... 점심을 먹지 말았어야 했나 싶다. 안내서에 꼭 보라고 되어 있던 박물관도 못 봤다. 가이드 손잡고 뛰어다녔으면 모를까 혼자 찾아 다니며 안내판 읽으며 보기에는 시간이 턱도 없었다. 유적뿐만 아니라도 언덕, 들판, 하늘, 바다 등 풍경이 너무 예뻤다. 바삐 지나쳤던 선인장들, 아름드리 올리브 나무들, 이름 모를 나무들과 식물들... 오락가락하는 비 때문에 사진을 마음껏 못 찍은 것도 속상하다. 이렇게 다시 올 이유를 만들어주는 건가 싶다.
이번 여행에서 그리스 신전은 오늘로 끝. 언제 한번 보려나 했던 그리스 신전을 일주일에 세 개나 봤다. 아마도 지나서 생각하면 찰라의 꿈처럼 느껴질 거다. 아무튼... 실체를 봤고, 모르던 사실을 많이 알았고, 고대 그리스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는 실마리가 될 것 같다. too much of greek이라는 생각이 스치기도 했지만, 그랬다고 떠나는 마음에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다. 다시 올 땐 좀 더 밝은 눈을 가지고 올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