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파니 마지막 저녁
트라파니로 돌아와 항구 근처에서 이른 시간에 저녁 먹을 곳을 찾았다. 관광객을 겨냥한 식당이 하나 보이는데 어떤 맛의 어떤 음식을 팔지 너무 알 것 같고, 피하고 싶다. 버스 정류장 근처에 중국집 겸 초밥집이 문을 열었다. 이름은 북경 레스토랑ristorante pechino^^. 어제 먹은 초밥을 또 먹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잠깐 고민했다. 노을 맛집 트라파니에서의 마지막 밤인데 노을을 꼭 보고 싶고, 밥 먹고 아이스크림 먹으며 노을을 보러 가려면 빨리 먹어야 하고... 옵션이 둘밖에 없다면 중국집 초밥이 낫지 싶다.
오늘도 all you can eat 뷔페... 중국집에서 초밥만 시키기 미안해서 산라탕을 시켰는데, 남기기 미안해서 겨우 먹었다. 지저분한 것은 아닌데 실내를 장식한 어둡고 탁한 색이 거슬렸고 테이블보와 냅킨은 색도 색이지만 천인지 비닐인지 모를 재질에 왠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성격도 입맛도 점점 까탈스러워지나 보다.
상한 비위를 애써 가라앉히며 대충 먹고 일어섰다. 카운터에 주인으로 보이는 중국여자가 앉아 있다. 아까 중앙 테이블에 앉으려니 안내하는 현지 직원에게 눈치를 주며 나를 벽 쪽 2인 테이블로 몰았던 여자다. 처음 앉으려던 중앙 테이블은 독립적인 2인 테이블을 나란히 붙여놓은 형태라, 손님이 없는 시간이라면 2인 테이블과 다를 바가 없었는데, 괜한 심통을 부린 거다. 뭔가 꺼림칙하게 느껴지는 벽에 붙어 앉아야 해서 비위가 상했을 수도...
관광객이고 현지인이고 온갖 인종이 보이지만 유난히 동양인을 보기 어렵다. 어쩌다 보이면 중국인이고, 그 여행 좋아한다는 일본인도 공항에서 본 두 명이 전부다. 동양인이라는 지연으로 연대의식을 가져야 할 이유는 없지만 그렇다고 경계할 이유도 없는데, 우선 나부터 경계하고, 그들도 마찬가지로 경계한다는 느낌이 든다. 원인이라 할 만한 이야기야 구구절절 많지만, 개인끼리 불편해할 것까지는 없다 싶은데 왠지 껄끄럽다. 점점 더 그렇게 되는 것 같다. 최근 들어 더...
내 편견에 대해 생각해 보면 대체로 몇 번의 경험에서 비롯했다. 하나 그렇고, 둘 그렇고, 셋 그러면, 재네는 좀 그런가 봐 가 된 것. 그렇게 쉽게 편견이 생기는 거다. 수학에 일반화의 오류의 논리적 근거로 악용될 수 있는 법칙이 있다. 얼핏 보기에 섣부른 일반화와 비슷해 보이지만 엄청 다른 이야기다.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첫 번째 그렇고, '임의의' 'n' 번째 그렇고, ‘n+1’ 번째 그러면 다 그래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수학에서도 그런 식으로 일반화해 라고 촌놈 겁주기 식으로 우기며 일반화의 오류를 합리화하는데 쓰일 수 있는 위험한 논리다. 그렇지만 이 논증법을 일상사에 적용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임의의' 'n'에 대해 증명할 도리가 없기 때문에...
인간들의 일상에서 어떤 집단에 대한 일반화는 무조건 잘못된 편견이다. 그 편견을 바탕으로 집단의 일원을 평가하는 건 그야말로 어리석은 짓이다. 그런데 많이들 그러고 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 뇌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진다. 편견이 옳지 않은 걸 알아도, 편견은 발생하고, 편견이 생기면 그 집단의 일원에 대해선 의심이 앞선다. 그런데 편견이 생성되는 과정을 생각해 보면, 형성된 편견을 깨는 과정이 편견 형성 과정과 다를 게 없을 것 같다. 첫 번째 틀렸고, 두 번째 틀렸고, 세 번째 틀리면, 편견을 거둘 수 있는 게 아닐까...
그 여자는 소극적이지만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 정체야 알 수 없지만 어떤 편견이 작용했으리라. 그런 사람에게 나도 마냥 마음이 편하지는 않지만 눈에는 눈의 방식으로 대하고 싶지 않다. 계산을 하며 나는 한국사람이다, 맛있게 먹었다 라고 말을 건넸다(사실 그냥 겨우 먹었다^^). 어제 역 근처 파도 초밥집에 갔었는데 거기 주인도 중국인이더라고 말해주었다. 그랬더니 그 집이 어땠냐 물으며 표정이 풀린다. 그리고 커피 마시고 가라고 붙잡는다, 역시 숨겨뒀던(?) 행운의 쿠키를 꺼내주며... 이렇게 쉽게 풀 마음이었다고? 그런데 행운의 쿠키는 진심으로 행운을 기원하고 싶은 사람에게만 주는 건가?^^ 시간이 없어 커피는 못 마셨지만, 아무튼 말 건네길 잘했다 싶다. 서로 편견을 깰 수 있는 데이터 한 개는 모았으니...
P.S.
그녀가 준 행운의 쿠키를 쪼개고 흠칫... 너도 날 알아??? 쿠키 안에서 나온 글귀는 이탈리아어, 영어, 독일어, 스페인어로 쓰인 'look in the right places and you will find good fortune'이었다. right places, right people... 요즘 내 화두인데...
운명으로 묶인 인연이 있다. 장소든 사람이든... 그런데 다 운명이 아니거늘, 모든 인연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살아왔구나 하는 걸, 쓴 맛을 제대로 보고 뒤늦게 깨달았다. 인생의 진정한 쓴 맛은 원래 살만큼 살아야 볼 수 있는 거니까, 이제 나도 쓴 맛을 볼 때가 됐구나 싶기도... 결국 따지고 보면 자초한 거라고 뼈아프게 자각하고 나서 right place와 right person이 있는 거라고, 인연이 운명은 아닌 거라고 스스로를 세뇌시키는 중인데... 내 생각이 줄줄 새고 있다. ^^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젤라또
페폴리 탑에서 알려준 젤라또 집은 메노 트레디치meno tredici와 츄리츄리Ciuri Ciuri였다. 둘 다 항구 근처에 있는데, 딱 봤을 때 메노 트레디치가 더 당겼다. 마이너스 13이란 뜻이다. 특별한 의미가 있는지 궁금해지는 이름이다. 혹시 맛있는 젤라또가 만들어지는 온도?
이름의 뜻을 물을 분위기는 아니다. 사람이 너무 많다. 맛집이라니 견디어 보기로... 분위기 파악하며 서성이는데, 직원이 번호를 부른다. 번호표가 있는 것이다. 번호표 기계를 찾으려 두리번거리니, 어떤 사람이 재빨리 번호표를 뽑아서 준다. 다들 주시하고 있다니까... ^^ 아무튼, 감사.
그런데 내 번호가 되기 전에 직원이 나를 가리키며 주문을 하라고 한다. 나는 아직 번호가 안 됐는데 왜 하며 어리둥절하고, 해당 번호의 사람은 자기 차례라며 직원에게 항의를 한다. 직원은 항의하는 사람에게 내가 더 먼저 왔다고 하고 내게 주문을 받는다. 해가 떨어지고 있어 마음이 급한데, 이런 감동이... 늘 하는 말이지만 살다 보니 뭘 하느냐보다 어떻게 하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 그녀는 이 정신없는 와중에 누가 들고 나는지 파악하고 있고, 원칙이 있다. 멋지다. 돈 빌려달라면 빌려줄 것 같다.^^
그런데 이 또한 상식적으로 자연스러운 상황 아닌가... 물정 몰라서 제 차례 제대로 못 찾아먹는 외국인에게, 나라도 당연히 차례를 찾아 줬겠지... 난 어떤 세상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살길래 이런 당연한 일에 이렇게 감동하는 걸까?
그런데 더 감동적인 것은 맛이다. 인생 최고 스트라챠텔라. 지금까지 먹어 본 최고의 젤라또였다. OO이 맛있어 봐야 OO이지 뭐...라는 말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맛.^^ 다시 트라파니에 간다면 그 이유 중 하나는 메노 트레디치의 젤라또다. 이 맛있는 집을 마지막 날 밤에 알게 되었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 미리 알았다면 적어도 하루에 한 번, 어쩌면 두 번은 먹었을 거다.
석양 산책
[트라파니 남쪽 해변 풍경]
[트라파니 노을. 위 사진은 museo civico torre di ligny; 가운데 사진에 보이는 섬이 에가디 제도; 아래 사진 속 산 꼭대기에 에리체가 있다. 불빛은 케이블카 불빛]
밥 든든히 먹고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노을을 바라보며 남쪽 해안을 따라 걸었다. 남쪽 해안길이 살풍경하다 했는데 항구를 지나니 풍경이 좋다. 이미 일몰이 시작됐다. 오늘도 구름이 많아 환상적인 노을은 아닌 것 같지만 어제에 비하면 환상적이다.
서쪽 해안 끝에 있는 museo civico torre di ligny에서 일몰을 보며 멍을 때릴 생각이었는데 늦었다. 리니 탑에 도착하니 일몰 시간 이 조금 지났다. 아직 황혼이 있지만 날이 급히 어둑어둑해진다. 주변에서 노을을 보던 사람들이 에리체 산 아래에서 꼭대기까지 이어진 불빛을 가리키며 뭐냐고 하는 소리가 들린다. 냉큼 끼어들어 에리체 가는 케이블카라고 말해주고 오늘 저기에 다녀왔다는 자랑을 덧붙였다. 나 왜 이러는 걸까요?^^
[트라파니 성당 내부]
비토리오 엠마뉴엘레 거리를 따라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보니 대성당 문이 열려있다. 오늘도 결혼식이 있었는데, 식은 끝이 났고 하객들도 대부분 빠져나갔지만 몇 명이 남아 못다 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드디어 성당이 날 허락하네 싶어 들어가서 휙 둘러보고 나오니 비가 내린다.
아침에 비너스 성에서 날씨에 그렇게 화를 냈는데 오히려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중요한 타이밍에는 비를 멈춰줬다. 문득 알레시오의 말이 떠오른다. 지금이 소금 수확 철이라 비가 오면 염전 사람들이 무지 슬퍼할 거라던... 어쩌나... 그러자 마음이 뭐라 한다. 소금장사 엄마도 아니고, 트라파니 소금장사 걱정할 처지는 아니라는 거다. ^^
성당 옆에 있는 예수회 교회chiesa del collegio dei gesuiti는 끝내 문을 열지 않았다. 바로크 스타일 facade가 예뻐서 내부가 궁금했고, 예수회 교회는 대체로 예뻤던 기억이 있어서 보고 싶었는데, 뭐...
[트라파니 비오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거리. 왼쪽은 예수회 교회]
숙소 유감 3탄
숙소에 돌아오니 출입구가 잠겨 있다. 문을 두드리니 잠금장치 풀리는 소리가 딸깍하고 들린다. 안으로 들어가니 카운터 지기가 통화 중이다. 오늘 있는 사람은 특정 동물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의 손에 잡혀있는 개가 피우는 소란에 정신이 팔려서 그런지도...^^
그는 한 손으로는 컹컹 짖어대며 나를 향해 날뛰는 내 몸집만 한 개를 온 힘으로 붙잡고 있고, 다른 손으로는 유선 전화기 수화기를 들고 통화를 하고 있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통화를 잠깐 멈추고 용건을 묻지 않나? 본척만척 통화를 계속한다. 짧게 마무리할 통화라면 뭐...
들어보니 별 이야기도 아니다. 우연히 걸려온 호텔 방 알아보는 전화다. 그런데 수다까지 늘어진다. 개가 계속 미친 듯이 짖어대는 소리는 내게만 들리겠어? 통화 상대도 이유를 물었는지 개xx의 ㅈㄹ까지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사람을 좋아하는데 나랑 놀고 싶어서 그러는 거란다. 헐... 나와 놀자는 거라고? 달려들어 덮칠 기세인데? 물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내가 개를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라 이 상황에 평정심을 유지하는 거지, 다른 사람 같았으면 기겁을 하고 밖으로 나갔을 거다.
열쇠를 받아야 한다. 통화를 멈추고 열쇠를 내놓으라고 할 수도 있지만 너 어디까지 하나 두고 보자 싶었다. 10분은 기다렸던 것 같다. 수다가 참 건강한 활동이라고 생각하고, 이탈리아 사람들이 남녀노소, 빈부귀천 가리지 않고 처음 보는 사람과도 막역한 친구사이처럼 나누는 격의 없는 수다가 개인과 사회의 건강을 지키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은 하지만 과하다 싶을 때가 있는데, 지금이 딱 그 순간이다. 알베르게 마꼬따... 끝까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트라파니에 다시 올 수는 있지만 이 숙소에 다시 묵는 일은 없을 것 같다.^^
팔레르모를 떠날 땐 다시 돌아올 곳이라 아쉬움이 떠날 수 있었는데, 트라파니와는 기약 없는 이별이다. 숙소 동물들^^ 때문에 하루에 한 번씩 언짢았지만, 그렇다고 여행을 망치지는 않았다. 불구경하는 마음으로 나쁜 놈들 구경했다.^^ 트라파니, 네게는 아무런 유감이 없단다. 다시 시칠리아에 오게 되면 다시 올게. 그때까지 안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