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3/2020

시칠리아 여행: 10: 아그리젠토: 신전의 계곡 & 동쪽 구역



[신전의 계곡 헤라클레스 신전. 신전 북쪽 아그리젠토 풍경과 신전 남쪽 들판과 지중해]

제우스 신전 남쪽으로 동쪽 구역과 이어지는 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가면 공원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도로SP4를 건너는 구름다리가 나온다. 다리를 건너면 동쪽 구역.

바로 오른쪽으로 헤라클레스 신전tempio di ercole이 보인다. 기원전 6세기에 지어진 신전이고 원래는 38개의 기둥이 있다는데, 현재는 8개가 나란히 서있다. 1922년부터 1923년에 걸쳐 세운 것인데, 알렉산더 하드캐슬이라는 영국 사람 덕분이란다. 기둥의 높이는 9.9미터, 지름은 2미터에 달한단다. 지금 볼 수 있는 이곳의 신전들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신전이란다. 신전 남쪽 아래 들판이 펼쳐져 있다. 들판 끝에 바다가 있고, 북쪽으로는 언덕 위 아그리젠토가 보인다. 아까 버스 타고 오며 봤던 신전이 바로 이 신전이었다.


[구글 지도 사진: 위는 알렉산더 하드캐슬이 살았다는 villa aurea, 아래는 프라가파네 동굴grotta fragapane 입구. 저리로 들어가면 카타콤베가 있단다]

P.S. 알렉산더 하드캐슬alexander hardcastle은 1921년 여행자로 이곳에 왔다가 붙잡혀(자발적으로), 헤라클레스 신전 동쪽에 있는 빌라 아우레아villa aurea를 고쳐서 그곳에서 살며 고고학 발굴과 도시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고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런데 마지막은 조금 슬프다. 1929년 월 스트리트 주식시장이 붕괴하며 파산하고, 살던 빌라도 팔 수 없게 되자 정신병을 얻어 정신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단다. 빌라 아우레아 앞에 그의 흉상이 서있다.





[신전의 계곡 콘코르디아 신전]


헤라클레스 신전을 벗어나 동쪽으로 조금 걷다 보니 콘코르디아 신전tempio della concordia이 보인다. 길 왼쪽 담장 너머로 중세 초기 기독교 공동묘지necropoli paleocristiana 유적이 보인다. 콘코르디아 신전을 앞에 두고 공동묘지에 빼앗길 정신은 없다.^^ 콘코르디아 신전이 아그리젠토에 오는 이유다. 

신전은 언덕 위에 위풍당당 서있다. 그리스 밖에 있는 도리스 식 신전으로는 보존 상태가 가장 좋다고 한다. 옛날 항구로 돌아오는 선원들에게는 등대 역할을 했단다. 아그리젠토 오는 버스 안에서 멀리 이 신전이 보였다. 지금도 여전히 먼 길을 떠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에게 드디어 집에 왔다는 안도감을 줄 것 같다. 초행길이어서 오며 가며 보이는 풍경 안에 그리스 신전이 있다는 사실이 마냥 신기했지만, 다시 이곳에 왔을 때 신전이 보이면 목적지에 나 또한 다 왔다 안도하며 지난 여행의 추억을 떠올릴 것 같다. 

그런데 콘코르디아 신전은 콘코르디아 여신에게 바친 신전이 아니란다. 근처에서 ‘아그리젠토 사람들의 조화 concordia degli agrigentini’라고 라틴어로 새겨진 돌이 발견되어 콘코르디아 신전이라고 부르게 되었을 뿐 신전의 주인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단다. 기원전 430년경에 건설되었고, 6세기(중세 초)에는 교회로 개조되어 쓰였다고 한다. 그런데 18세기 들어 고대로 돌아가자는 신고전주의의 열풍이 불자 당시 시칠리아를 통치하던 카를로 3세가 1748년 복구를 명해 지금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단다.


막연히 그리스 신전은 모두 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진 줄 알았었는데 시칠리아 신전의 재료는 대리석이 아니다. 세제스타와 셀리눈테 신전의 재료는 석회암이라 했었는데, 이곳은 사암이란다. 신전이 하얬던 것은 맞았는데, 모두 대리석으로 지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고, 스투코를 입혀 하얬다는 것을 오늘 알았다. 이곳에도 곳곳에 스투코가 입혀져 있던 흔적은 있지만 다 벗겨져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짙은 황토색으로 보인다. 스투코의 흔적이 아직 있다는 것도 신기하다. 스투코가 그렇게 오래 버틸 수 있는 재료였나 보다. 신전은 빛을 받으면 황금색으로 빛난다고도 하던데 오늘은 그런 빛깔을 보기는 영 틀렸다. 계속 비가 오락가락 한다. 우비 입고 벗는 것도 귀찮아 계속 입고 다니고 있고, 사진도 카메라가 비에 젖을까 봐 거의 휴대폰으로 찍으며 돌아다니고 있다. 

아테네에 있는 헤파이스토스 신전 다음으로 보존 상태가 좋단다. 튼튼한 암반 위에 흙이 있고 그 위에 신전이 있는 구조인데, 흙이 지진의 충격을 흡수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란다. 우연일까 계산된 선택이었을까 하는 논쟁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계산된 선택으로 본단다. 무너지지 않은 또 다른 이유로 중세에 교회로 쓰였던 점을 꼽는다. 교회로 사용하기 위해 구조를 보강했던 것이 도움이 되었을 것이란다.


[신전의 계곡 콘코르디아 신전]


유네스코 심볼인 여섯 기둥이 있는 신전의 모습이 이 신전에서 착안한 것이라고 한다. 기둥 사이로 보이는 셀라 벽에 아치가 있다. 교회로 쓰였던 흔적이라고 한다. 교회 네이브의 아치였다고. 동쪽 내부에 원형 계단통도 2개가 있다고 한다. 입구로 사용하려 제실 뒷벽을 헐어냈고, 제단은 이교도 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곳이라고 아예 없앴단다. 동쪽 끝에 성구 보관소crypt를 팠고, 중세 초기 조각들이 그 주변에 있단다. 이교도 신 에베르eber와 랍스raps를 몰아내고 베드로와 바오로에게 봉헌했다고 한다. 그 두 신은 레다의 쌍둥이 디오스쿠리(카스토르와 폴룩스)였다고도 하는 등 두 이교도의 신의 정체에 대해서는 분분한 의견이 있단다.

신전 내부로 이어지는 구름다리를 설치해 놓은 것을 보면 내부를 개방하던 시절도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볼 수 없다. 신전을 빙 둘러 금줄을 쳐 놓아 가까이 내부를 들여다 볼 수도 없다. 점점 유적 관리가 엄하고 까칠해진다. 이걸 보면 good old days라는 말이 떠오른다. 조금은 무식하고 거칠어도 너그럽고 정이 넘치던... 아무튼 지붕은 유색 대리석으로 덮여있었고 사자 머리 모양의 홈통 주둥이가 지붕 끝에 달려있었단다.

신전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시칠리아의 얼굴인 이유가 있다 싶다. 주변 환경으로 볼 때 세제스타 신전이 놓인 자리가 훨씬 더 분위기가 있고 멋있다. 그런데 그 신전은 온전히 남아있어도 미완성이다. 셀리눈테 신전 E도 비교적 온전한 모습이고, 공원으로만 치면 더 고즈넉하고 좋다. 그런데 오랜 시간 버려지고 무너진 것을 다시 쌓아 올려놓은 것이다. 콘코르디아 신전은 큰 변형 없이 어떤 신이든 신을 모시는 신전으로 기능하며 3천 년 가까운 세월을 견뎌낸 것이다.

신전 건축을 연구하는 사람도 아닌데 일주일 안에 세 번째로 보는 신전 자체에 그리 흥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내 눈 앞에 기적이 서 있는 것이다. 이렇게 거대하고 육중한 건축물이 중력을 버티며 지진 등 온갖 자연 재해를 견디며 이 언덕 꼭대기에 그 오랜 시간을 서있다니... 오랜 시간을 버텼다는 그 단순한 사실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싶다.



[신전의 계곡: 콘코르디아 신전 앞 이카루스의 수난]


이미 사진으로 많이 보았던 추락한 이카루스의 동상이 사진으로 봤던 대로 신전 앞에 비스듬히 누워있다. 날개는 멀쩡한데 다리가 부실하다. 그의 아버지 다이달루스가 이 도시를 세웠다는 전설을 염두에 둔 설정인가 싶다. 그 앞에서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데 시끌벅적하다. 가만 보니 사람들이 번갈아 이카루스의 성기를 붙잡고 사진을 찍으며 환호성을 지르고 박장대소 한다. 행운이 온다고 그런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농담이고 장난이겠지만 나는 재미있지도 웃기지도 않다. 이카루스의 그 부분이 사람들의 손을 타서 반들거리는 것을 보니 베로나 줄리엣의 빛나는 가슴이 떠오른다. 행운이 온다며 너도 나도 그곳에 손을 올리고 사진을 찍은 결과였다. 아무리 무생물일지라도 어떤 존재의 치욕이 어떻게 누군가의 행운이 된다는 풍습이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다.


[신전의 계곡: 신전 사진에서 벨기에에 산다는 아저씨 발견. 위 사진 왼쪽 유모차 뒤에 서있다. ]


콘코르디아 신전 근처에 손바닥 선인장이 있다. 어렸을 때 누구나 주택에 살던 시절, 집집마다 화분 하나쯤은 있는 선인장이어서 그런가보다 했었는데, 계속 보다 보니 열매를 둥근 입 끝에 오밀조밀 달고 있는 모습에 푹 빠졌다.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으니 어떤 아저씨가 다가오더니 열매 이름을 알려준다. 피끼디니아라고. (잘 못 알아 들은 것이었다. 제대로 된 이름은 인도의 무화과라는 뜻의 피끼 딘디아fichi d’india) 먹어봤냐고 묻는다. 못 먹어 봤다고 하니, buonissimo(영어로 하면 best)라고 하며 이탈리아 사람 특유의 맛있다는 손동작을 연신 한다. 이탈리아어는 바디 랭귀지라도 반복의 매력이 있지...^^ 열매를 까면 흰색, 노란색, 붉은색 등 세 종류가 있는데 붉은 색이 가장 맛있단다. 여기 많은데 하나 따먹어 볼까 했더니, 가시 때문에 맨 손으로 까기는 어렵다고 말린다. 

시칠리아가 고향인데 아주 오래 전에 일하러 벨기에로 떠나서 지금은 벨기에에 살고 있다고 한다. 돈 벌어서 고향에 집을 마련한 건지, 신전 근처에 집을 마련해 자주 오는데, 그 집에 피끼 딘디아가 있다고 한다. 이번에는 딸과 손녀와 함께 오게 돼서 신전을 보러 왔다고 한다. 그래서 보니 신전 구경하느라 바쁜 딸 대신 유모차에 있는 손녀를 돌보는 중이었다. 

아저씨가 이건 먹어봤냐 저건 먹어봤냐 하며 시칠리아 특산물을 줄줄이 나열한다. 무슨 토마토 종류도 있었는데, 벌써 다 잊어버렸다. [뒤늦게 생각났다. 방울토마토. 시칠리아산 방울토마토가 유명하고 그렇게 맛있단다.^^] 아마도 타향살이 하며 늘 그리워하는 것들이 아닐까 싶다. 거대한 신전을 앞에 두고 사소한 피키 딘디아에 열중하는 허술함...^^ 뭔가 부족할지언정 아저씨의 그리움에 공감할 마음은 있는 사람으로 봐준 것 같아 기분 좋다.






왼쪽으로 난 길 입구에 화살표로 여러 곳의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판에 신전들의 언덕collina dei templi이라 써있고 이 지역 지도가 있다. 이 지역을 언덕이라 한다면 계곡이라는 이름이 왠지 이해될 것 같기도 하다. 아그리젠토 시내가 있는 언덕과 신전들이 있는 언덕(정확히는 능선) 사이 지형을 계곡이라 부를 수도 있지 싶다. 내 머리를 혼란스럽게 한 '계곡'이란 표현을 아직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  표지판이 알려주는 프라가파네 카타콤베catacomba fragapane와 그리스풍 로마구역quartiere ellenistico-romano를 외면하고 헤라 신전으로 향했다.


[신전의 계곡 남쪽 벽 중세 초기 기독교 무덤들]





동쪽으로 난 길을 계속 따라 바위를 아치형으로 파내어 무덤으로 사용했던 유적tomba ad arcosoli이 이어져 있다. 그리스 시대의 요새였는데 기독교도들이 무덤으로 사용한 것이라 한다. 로마시대 말기, 중세 초기에 신전의 언덕과 남쪽 평원에 많은 변화가 있었단다. 콘코르디아 신전은 베드로와 바오로를 위한 교회로 바뀌고 신전 주변에 기독교인을 위한 공동묘지가 많이 생겼단다. 빌라 아우레아villa aurea 정원에, 방어 기능을 상실한 남쪽 벽에, 그리고 프라가파네 동굴grotta fragapane에, 네크로폴리 쟘베르토니necropoli giambertoni 등에 있단다.


[신전의 계곡 헤라 신전에서 본 하늘. 드디어 구름이 조금 걷히고 지중해로 지는 해를 보여준다. 노을이 지고 있는데 푸른 빛이 감도는 것이 신기하다.]

[신전의 계곡: 헤라 신전]


무덤 유적을 보며 남쪽 벽을 따라 걷다 보면 헤라의 신전tempio di giunone이 나온다. 헤라 신전은 5세기에 지어졌다고 한다. 이곳의 기둥들은 지진을 이겨내고 서있는 것들이란다. 이제 서 있었다는 것 만으로도 기특하다.^^ 오리지널 제단도 남아있다는데, 역시 울타리가 있어 실제로 보지는 못하고 있겠거니 한다. 어느새 시간은 해질녘이어서 신전 뒤로 노을이 보인다. 내일은 내륙으로 들어가니, 지중해로 지는 해는 오늘 보는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겠다 싶다. 다음에 만날 바다는 이오니아 해이다. 다른 곳 경치도 다 환상적이지만, 이곳 전망이 특히 좋다.


[사진 속 신랑신부가 너무 예뻐서 주소를 알면 보내주고 싶다.]


신전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신랑신부가 두 커플이나 있다. 마르살라에서 이틀이나 결혼식을 못 봐서 그런지 오랜만인 것 같은 느낌이다. 생각해보니 매일 보다 마르살라에서만 못 봤다. 헐... 아그리젠토 사람들은 결혼식날 콘코르디아 신전을 방문한단다. 그래야 결혼 생활을 갈등 없이 잘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단다. 콘코르디아가 화합의 여신이라 생긴 풍습 같다. 신전을 배경으로 서있는 한 커플의 모습이 예뻐서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으니 포즈까지 취해준다.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 그 말이 뭐였더라 생각하니 기분 좋게 바로 떠오른다. tanti auguri! 그 말을 건네니 많이 기뻐한다. 나도 기분이 좋다.

어느새 시간은 7시가 넘었다. 무엇보다 박물관은 못 본 것이 마음에 걸린다. 콘코르디아 신전에 조명 켜진 모습이 예쁘다고 해서 볼까 했는데, 어둠이 내리니 마음이 확 바뀐다. 너무 늦기 전에 숙소로 돌아가고 싶다.


[신전의 계곡 헤라 신전에서 본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