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파니 기차역]
한동안 자주 많이도 탔던 이탈리아 기차를 십여 년 만에 다시 타러 기차역에 도착하니 감회가 새롭다. 트라파니가 그렇게 작은 도시가 아닌데 창구에 표를 파는 사람이 없어 기계로 샀다. 언어를 영어로 바꾸니 별 난관은 없다.
역 이름 표지판, 기차 시간표, 기차 도착을 알리는 전광판, 타임스탬프 찍는 기계... 이곳 철도도 trenitalia가 운영한다는 걸 딱 보면 알겠다. 역 모습도 본토에 있는 여느 역과 다르지 않고, 시칠리아가 이탈리아인 게 맞긴 맞네...^^ 그런데 10년도 더 된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게 신기하다.
이탈리아 기차표에는 날짜와 시간이 찍혀있지 않아서, 기차 타기 전에 역에 설치된 기계로 타임스탬프를 찍어 validate 해야 한다. validate 하지 않은 표를 갖고 기차를 타면 부정 승차가 된다. 그냥 탔다 적발되면 엄청난 벌금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는 봤는데, 실제로 그런 일을 당했다는 사람을 본 적은 없다.
아무튼... 기계에 기차표를 넣었는데 스탬프가 찍히지 않는다. 옆을 보니 ‘a sinistra’라고 쓰여있다. sinistra는 왼쪽... 기계가 파는 표의 크기가 사람이 파는 표보다 훨씬 작아 아무 데나 넣으면 센서가 감지를 못하니, 표를 왼쪽 끝에 붙여 넣어야 하는 눈치다. 다 기억나는 건 아니겠지만 잊은 줄 알았던 이탈리아어가 불쑥불쑥 기억나는 게 재미있다. 해당 번호의 플랫폼이 어딘지 확인하고 아침을 먹으러 갔다.
[트라파니 카페 Caffetteria Maria 77. 밝고 따뜻한 기운이 넘친다]
지난번에 세제스타 행 버스 정류장을 친절히 알려줬던 바였다. 그런데 그 직원만 친절한 게 아니었나 보다. 먹을 것을 고르고 늘 하던 대로 먹기 전에 계산하려고 카운터 앞을 서성이니, 카운터 직원이 mangia, mangia 한다. mangia는 먹다의 명령형. 보통 형용사나 동사를 강조하고 싶으면 부사를 사용하는데, 이탈리아 사람들은 부사 대신 같은 단어를 반복하는 것 같다. mangia를 두 번 했으니 '어서' 먹으라는 말이다. 돈 내는 게 뭐가 급하니, 어서 먹어... 말 한마디지만 마음이 따뜻해진다. 이곳에 감도는 기운은 명랑함과 따뜻함인 것 같다. 방금 숙소에서 겪은 검고 음흉한 기운 탓에 이곳의 기운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세상은 나쁘기도 하고 좋기도 하다. 세상의 나쁜 면을 보고 절망할 것이냐 좋은 면을 보고 희망을 품고 살 것이냐는 내 선택에 달린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차는 예정 시간보다 10분 먼저 도착했다. 그런데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객실이 달랑 한 량이다. 한 량짜리 기차를 본 적이 있었던가??? 마르살라 행이 맞는지 확인하고 기차에 올랐다. 오래된 골동품 같은 기차의 모습이 정겹다. 얼마만이냐, 이탈리아 기차,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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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하루에 만 보를 걷든 이만 보를 걷든 10km를 걷든 20km를 걷든 살이 빠질 틈이 없다. 너무나 즉시즉시 손실을 보충해 주고 있다. 아이스크림도 끝까지 다 먹고 (보통 제일 작은 것도 대부분은 남긴다) 오늘 아침에도 악마의 초코잼 누텔라가 잔뜩 든 크루아상하고 파니니를 먹었다. 우리나라 크림빵의 크림은 보통 한쪽에 몰려 있고, 또 부족하다. 그래서 어떻게 매 입마다 균등하게 크림을 나누어 먹을까 생각하게 만든다. 때로는 크림이 없는 부분을 떼서 한쪽에 몰려있는 크림을 발라가며 먹기도 한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어디를 베어 물어도 첫 입부터 잼이 듬뿍 입안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심지어 너무 많아 베어물 때 압력으로 옆으로 삐져나와 입가에 묻는다. 이렇게 먹다 죽겠다 싶어 덜어내고 먹어야 할까 고민도 하게 된다. 맛있고 좋다는 말이다. 후한 인심이 느껴지기도 하고...
어제 메노 트레디치에서 먹은 스트라챠텔stracciatella라 아이스크림은 인생 최고의 맛이었다. 매번 먹던 맛에 그렇게 감동할 줄이야...^^ 스트라챠텔라는 진한 생크림 맛 아이스크림 위에 잭슨 폴락이 캔버스에 물감 뿌려대듯 녹인 초콜릿을 마구 뿌려 굳힌 듯한 아이스크림이다. 이탈리아 젤라또의 수많은 맛 중에서 클래식으로 꼽히는 것이라고나 할까... 아이스크림의 질감과 달기가 딱 좋았고, 초콜릿의 맛도 예사롭지 않았고, 그렇게 많은 그리고 그렇게 커다란 초콜릿 덩어리가 든 스트라챠텔라는 처음이다. 엉엉... 다시 못 먹는다.
어제 먹은 아이스크림을 시작으로 어제 일이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아마도 에리체 패스의 본전은 결국 못 뽑았을 것 같고, 왕복으로 산 두 장의 표는 모두 돌아오는 표를 날렸다. 난생처음 보는 장소를 2년 전에 출판된 책에 의지해서 여행하는 상황에 뭔가 예상을 벗어나거나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해도 그렇게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러려니 하면 될 일인 것 같은데 마음이 불편하다. 모자라는 것보다 남는 것을 좋아하고, 모든 계획은 백년지대계여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 놓고도 막상 할 때 뭔가 어긋나고 부족하면 화내고 자책하고 자괴감에 빠진다. 사전에 진을 너무 빼서 정작 기운을 써야 할 때 에너지가 없는 경향도 있다. '좀 망하면 어때, 좀 잃으면 어때, 좀 놓치면 어때'가 안 돼서 그러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결국 잃고 놓치고 망했다는 자괴감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 너무 예상하고 염려하고 대비하고 그렇게 사는 게 아니지 않을까? 처음 사는 인생인데, 망하고 잃고 놓쳐도 되는 것 아닐까? 대비할 것은 하되 진을 빼지는 말아야 하지 않을까? 걱정하며 알 수도 없는 미래를 상상하고 철저히 대비하겠다고 생각하며 산 결과는 웬만하면 실패 아닐까? 상상하는 미래는 대부분 오지 않으니... 닥쳐서 해결하고 헤쳐나갈 여지를 남겨두는 태도도 괜찮지 않을까? 내 준비성은 용기가 없거나 나를 믿지 않는다는 뜻일까? 어떤 상황이든 헤쳐나갈 수 있다는 용기, 어차피 완벽하게 살아지지 않는 삶, 조금 망해도 되고, 그럼에도 잘 꾸려나갈 거라는 믿음...
과거를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안다. 그런데 현재가 아닌 미래를 살고 있었구나 싶다. 나는 현재를 살고 싶다. 평생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내 삶이 길 원하지 않는다. 현재를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잘 준비된 미래가 아니라 용기나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어렴풋이 든다.
옆 칸에 앉은 사람들이 내 것과 같은 시칠리아 여행 안내서를 들고 있었다. 그래서 그랬나? 당연히 나와 목적지가 같으리라 단정하고 저들을 따라 내려면 되겠다 생각하고 있었다. 기차가 역에 들어서는데 그들이 그대로 앉아있어 안심하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뭔가 다르다. 심상치 않다 싶어 기차역 표지판을 찾아 두리번거리니, 그들이 여기가 마르살라라고 알려준다. 핸드폰에 코 박고 생각에 빠져 내릴 역을 지나칠 뻔했다니... 너무 풀어졌다.^^ 마르살라가 그렇게 인기 있는 목적지가 아니라는 깨달음이 그제서야 온다. 아마도 그들은 내가 타기 전에 목적지를 확인하는 소리를 들었었나 보다. 누누이 말하지만 사람들의 이목이 불편한 것만은 아니다.^^
P.S. 기차 안에서 찍은 풍경 사진이 하나도 없다. 사색도 좋지만 여행자의 기본은 사진인데, 본분을 완전 망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