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체. 앞에 미니어처 같은 건물은 페폴리 탑, 뒤 왼쪽은 비너스 성, 오른쪽은 발리오 성]
[에리체 스페인 구역quartiere spagnolo에서 본 풍경]
에리체erice
에리체는 트라파니에서 동북쪽으로 약 10km 떨어진 곳에 있고, 관광객들이 에리체라고 하는 에리체 구시가지는 에리체산monte erice 꼭대기, 해발 750미터에 있다. 이 산은 오랫동안 루제로 2세가 지어준 monte san giuliano라는 기독교식 이름으로 불리다 최근에 원래 이름을 되찾았단다. 트라파니 풍경 속에 너른 들판에 홀로 우뚝 솟은 산이 등장한다면 아마도 그 산은 에리체산일 것이다.
[최최근(1934년^^)에 옛 이름으로 되돌린 사람은 다름 아닌 무솔리니라고. 중세 노르만 지도자 루제로 1세는 쥴리아노 성인의 도움으로 아랍 세력을 물리치고 에리체를 정복했다고 믿고 산 쥴리아노 교회를 건설했다. 이후 그의 아들 루제로 1세가 시칠리아 왕국을 세우고 왕위에 올라 산 이름도 성인의 이름으로 바꾸었고, 파시스트 무솔리니는 중세 이전 로마시대의 영광을 회복하겠다고 옛 이름을 가져왔다고... 옛 이름은 에릭스eryx였는데, 그걸 현대 이탈리아식 철자법과 발음으로 적당히 변형해 에리체로...]
한때는 만 명 넘게 살았는데 지금 상주인구는 3백 명 정도밖에 안 된단다. 아파트 우리 동에 만도 그 정도는 살 텐데... 여름이면 인근 도시에서 더위를 피해 이곳으로 온다고 한다. 섬이다 보니 피서는 무조건 바다로 가나 했는데 산으로 가는 청개구리도 있다니 흐뭇하다. 동질감... ^^
아주 오랜 역사가 있는 마을이다. 그리스인들과 페니키아(카르타고)인들이 시칠리아로 들어오기 전, 시칠리아에는 세 부족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엘리미, 시카니, 시쿨리. 이곳은 그중 엘리미인들elimi이 자리를 잡고 에릭스eryx라는 도시를 형성하고 살던 곳이란다. 그들이 벼랑 끝에 지어 다산의 여신에게 바친 신전은 지중해 일대에서 유명했다고 한다. 지금은 그 신전 자리에 노르만 왕조가 세운 비너스 성이 서(?) 있다. 지금도 에리체에서는 가장 유명하고, 시칠리아에서도 손꼽히는 유적이지 않을까 싶다.
만화영화 천공의 성 라퓨타가 이곳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 감독의 작품을 몇 편 보긴 했는데 그중에 있었는지 없었는지 기억이 없지만, 에리체를 보고 나니 그의 그림체로 표현된 에리체가 보이는 듯하고 봤든 안 봤든 영화 분위기를 알 것 같다.
산꼭대기 온통 돌로 뒤덮인 마을. 돌담장, 돌 건물, 성벽, 반들반들 윤이 나는 돌바닥.
그리고 돌 틈 사이로 자라는 풀.
어디로 이어졌는지 알 수 없는 좁은 골목.
골목을 돌아 만나는 교회.
마을 한쪽을 에워싼 2천 년이 넘은 성벽.
수직 절벽 끝, 신전 터에 자리 잡은 성과
그곳에서 성행했다는 은밀한 의식.
발아래 펼쳐진 들판과 바다, 그 위를 가득 채운 하늘과 구름.
순식간에 마을을 휘감았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안개.
그 모든 것에 서려있는 오랜 역사....
[에리체]
아주 멀리서 에리체를 내려다본다면 마을 전체가 성이나 바위 덩어리로 보일 것 같다. 온통 돌로 지어진 집들은 주로 14세기부터 17세기 사이에 지어졌단다. 마을 한쪽에는 은밀한 의식이 행해졌다는 신전이 있고, 골목골목 건물 사이사이 교회가 박혀있다. 날씨와 주변 풍경은 신령한 분위기를 더한다. 한 때 백 개 교회의 도시città delle cento chiese라는 별명이 있기도 했단다. 도대체 교회가 얼마나 많았으면... 신령한 기운 때문에 초자연적 존재에 의지하는 전통이 생겼는지,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그런 전통을 창조했는지를 따져보면 이곳은 땅에 서린 기운 때문이었지 않을까 싶다.
에리체 도착
드디어 에리체.
여기저기에서 에리체, 에리체 하던 그 에리체에 드디어 도착했다. 케이블카 정류장을 나오니 높은 지형 탓인지 핸드폰 데이터 신호가 잘 안 잡힌다. 따라서 나도 정지...^^
어디로 가야 하나 서성이다 보니 관광안내소가 보인다. 관광안내소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지만 안내서의 정보가 너무 빈약해서 혹시나 하고 가봤더니 에리체 패스erice pass라는 것이 있다. 20유로인데, 교회, 박물관, 성 등 거의 모든 곳을 들어갈 수 있다. 하루 종일 에리체에서 보낼 예정이고, 안내소가 추천하는 경로를 따라다니면 좋겠다 싶은데, 그러려면 패스를 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P.S.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편하긴 했지만, 본전은 뽑아야 한다는 강박이 생겨 숙제하듯 에리체 골목을 뛰어다녔다. 버스와 케이블카도 왕복표를 사뒀었는데 그것도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과거에 대비해 둔 미래가 현재가 됐을 때, 예상했던 미래가 현재의 짐이 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백년대계가 천성이라 비교적 안전하게 살고 있지만, 늘 미래를 예상해 대비하는 것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과거에 연연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관광안내소 추천 경로 안내판. 빨간 경로는 길고 파란 경로는 짧다]
[에리체 포르타 트라파니. 구글 스트리트 뷰 캡쳐. 사진처럼 날씨가 좋았더라면...]
에리체의 입구 포르타 트라파니porta trapani에 들어서니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비가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한다. 하늘이 심상치 않았지만 계속 내리는 시늉만 하던 비가 설마 올까 했는데, 제법 쏟아진다. 에리체 패스 살 때 준 지도가 성 입구에도 붙어 있다. 지도 위에는 긴 빨간 경로와 짧은 파란 경로가 표시되어 있다. 늘 aim high 모드라 빨간 경로로 가자 했는데, 그 생각은 시작부터 틀어졌다. 비가 오니 2번을 건너뛰고 가까운 chiesa madre로 먼저 가는 게 좋을 것 같다. 비도 피하고, 또 교회도 보고... 교회에 도착하니 미사 중이라고 관광객을 막는다. 30분 후에 다시 오란다. 생각대로 될 날은 아닌가 보다.^^
장기 여행이라 온갖 날씨를 대비해 큰맘 먹고 고어텍스 우비를 장만했건만, 매일 비 예보에 내내 챙겨 다녔건만, 하필 오늘 아침에 나오기 직전에 가방에서 뺐다. 여태 온다 온다 하며 안 온 비가 오늘이라고 오겠어 하며... 너무 속상한데, 단지 폭우 중 우비가 없어서는 아니다. 잔머리 쓰다 당한 듯한 자괴감... 우비가 무거우면 얼마나 무겁다고... 어제저녁 스타뇨네 라군 유람선에서 짙은 구름 때문에 손톱만큼도 노을을 못 본 것을 생각했다면 우비를 뺄 수는 없었다. ㅠ.ㅠ 다행히 우산은 있지만 우산으로 잘 피할 수 있는 비가 아니다.
비너스 성castello di venere
교회 처마 밑에서 30분을 기다릴 수는 없다. 추천 경로를 따라가겠다는 생각은 이미 망했고, 오늘 날씨가 어떨지 알 수 없으니 꼭 봐야 하는 것을 먼저 보는 것으로 전략 수정.^^ 비너스 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에리체의 상징 같은 곳이다. 수직 절벽 끝에 서있는 성의 모습과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에리체 관광의 절반은 하지 않을까...
이 성의 원조는 엘리미인들의 에릭스 시절에 다산의 여신에게 바친 신전으로, 지중해 일대에서 유명했단다. 이후 페니키아, 그리스, 로마, 노르만 등의 세력이 에리체의 역사에 등장하며, 그리스의 아프로디테, 페니키아의 여신 아스타르테astarte, 로마의 비너스 등 그때그때 시류(?)에 맞는 여신으로 신을 바꿔가며 숭배의식을 계속 행했다고 한다. 그녀들은 이름만 다르지 성격에는 별반 차이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다 포에니 전쟁 때 파괴된 후 다시 신전으로 복구되지 않았고, 12세기 노르만 왕조는 이곳에 성을 세웠단다. 지금 남아있는 게 그 성의 유적이다.
조금 걸으니 비가 그친다. 다행이다. 그런데 안개가 안개가... 그렇게 짙은 안개는 인천공항 가는 길에서나 봤지 싶다. 오른쪽이 낭떠러지인 길을 따라 걷는데 낭떠러지 풍경이 한치가 안 보인다. 몇 미터 앞이 안 보이는데, 산 아래로 펼쳐진 풍경이 보일 리 없다. 이곳은 그 풍경이 다하는 곳인데...
[에리체 비너스 성 가는 길. 낭떠러지 아래가 순식간에 보이다 말다...]
[에리체 발리오 성Castello del Balio의 탑들]
차로 온 사람들이 길가에 주차할 곳을 못 찾아 우왕좌왕이다. 이곳도 버스로 오는 곳은 아니었나 보다. 날씨가 정말 변화무쌍하다. 안개가 순식간에 시야를 가렸다 걷혔다 한다. 따라서 내 마음에도 안개가 끼었다 걷혔다 한다. 눈앞에 안개에 휩싸인 성채가 우뚝 서있다. 발리오 성castello del balio이다. 비너스 성은 거의 터만 남은 상태라 그렇게 위풍당당하게 보이지 않는다.
[안개 속 비너스 성Castello di Venere]
비너스성 성문 위에 독수리 문장이 떡 붙어 있다. charles v의 문장이라고 한다. 에리체 패스를 보여주고 들어갔다.
비너스 숭배 의식에 사용됐다고 추정되는 우물, 은밀한 의식이 치러졌을 것으로 추측되는 방들, 페니키아 인들이 쌓은 성벽, 다이달로스가 쌓았다는 전설의 벽, 로마시대 목욕탕, Santa Maria della Neve에게 봉헌된 중세 교회 등을 발굴 복원해 놓았다. 원래 형태로가 아니라 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로... 교회는 노르만 왕조가 성을 건설하며 함께 지었다는데, 기독교를 못 받아들이고 이곳에서 계속 이교도 신을 숭배하던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려는 목적이었다고 한다. 복원작업의 방향은 신전의 모습을 복원하는 것이어서 중세 이후 사용하며 세운 벽들은 모두 철거됐단다.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 하지, 식견 없는 눈으로 기능을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은 없다.
[안개 낀 비너스 성. 가운데는 우물. 비너스의 베일il velo di venere이라고 불릴 만큼 이곳의 안개는 유명하단다]
[비너스 성 다이달로스 벽에서 본 절벽 낭떠러지. 개기일식이라도 있는 듯...]
산꼭대기에 화석처럼 남아있는 마을 자체가 가치가 있지만, 그래도 가장 보고 싶었던 것은 절벽 아래로 펼쳐진 풍경이었다. 에가디 제도와 잘하면 아프리카 튀니지까지도 보인다는 그 풍경.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진심 서운하다. 비너스에게 따지고 싶었다. 네가 내 사정을 알면 이럴 수는 없는 거라고... 예쁜 것들은 도통 남을 헤아릴 줄 모른다더니 너도 예쁜 유세를 하는 거냐고... ^^
나가다 검표원 청년에게 혹시 날씨가 좋아지면 다시 와도 되겠냐고 물었다. 그러라고 한다. 내친김에 속상함을 하소연했더니, 이곳 날씨가 워낙 변덕이 심하다며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괜한 심통이 나서 누구든 걸려봐라의 기세가 읽혔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을에 대한 기대를 산산조각 냈던 어젯밤에 이어 오늘도 이럴 수는 없다. 내일 아침 일찍 다시 보고 마르살라로 가도 되겠다 싶어 내일 날씨는 어떻겠느냐고 물으니, 앞으로 며칠 동안은 계속 좋지 않을 것이란다. 아까 쏟아지던 비를 생각하면 비가 그친 것만도 다행이다 생각하기로 한다. [지금 생각하면 뭘 그렇게 속상해했을까 싶은데, 그때는 엄청 속상했다.]
P.S.
워낙 안개가 잦아 비너스의 베일il velo di venere이라고 안개를 지칭하는 말이 있을 정도란다. 이 날은 안개를 엄청 원망했는데, 에리체의 또 다른 모습을 제대로 봤다 싶기도 하다. 비너스 숭배 의식은 일반적으로 동물 잡아서 바치고 하는 의식이 아니었던 것 같다. 어디는 sacred prostitute라 표현했던데... 이런 식의 비너스 숭배의식은 지중해 일대에서 횡행했는데, 이곳이 특히 명성이 있었단다. 로마인들은 이곳의 비너스 여신을 venus erycina라 부르며 이 여신을 위한 신전을 로마에 짓고 모셨단다. 요즘말로 치면 venus erycina는 비너스의 부·캐이고, 에리체는 문화적 포맷을 로마에 수출한 것이다. 작은 지역 문화가 대국에 수출될 정도의 명성이 있었다는 것... 글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