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그리젠토 신전의 계곡. 콘코르디아 신전]
신전 E가 셀리눈테selinunte의 얼굴이라면, 아그리젠토agrigento 신전의 계곡valle dei templi에 있는 콘코르디아 신전tempio della concordia은 아그리젠토의 얼굴을 넘어 시칠리아의 얼굴이다. 심지어 유네스코 심볼의 얼굴이기까지 하다.
일생에 단 한 번일지도 모르는 시칠리아를 여행하며 웬만하면 콘코르디아 신전을 보러 가지 않을 수는 없다. 남들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신전의 계곡이 시칠리아에서 단일 관광지로 방문객 수가 가장 많은 곳이라고 한다.
평생 사진이나 화면으로 보아왔던 그리스 신전을 며칠 안에 도대체 얼마나 목격하는 건지... 심지어 연속 이틀... too much of greek이란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어느 하나도 놓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리고 시칠리아 그리스 유적지 중에 아그리젠토 유적지만 archaeological area of agrigento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됐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신전의 계곡이라고 부르지만 공식 이름은 parco archeologico e paesaggistico della valle dei templi di agrigento. 해석을 해보면 아그리젠토의 신전들의 계곡의 유적 및 풍경 공원 이라는 뜻... 유적 보러가서 풍경은 덤으로 보고 오지만, '풍경'이 유적과 더불어 공동 주연인 공원이라는 것... 이름이 이렇게 풍경을 외치고 있는데, 풍경 또한 주인공임을 가서 보고야 알았다. 사실 이곳 뿐만아니라, 세제스타도 셀리눈테도 그랬다.
또한 신전의 계곡이라는 이름이 오해를 부르는데, 실제로는 계곡이 아니라 절벽 능선이다. 신전 남쪽으로 가파른 절벽이 있는 지형... 아그리젠토가 접한 지중해에서 보면 절벽 꼭대기에 신전들이 나란히 우뚝 서 있는 모양... 당시 역사에서 지중해가 어떤 의미였는지 생각해보면 신전을 이곳에 세운 이유가 짐작이 된다.
[아그리젠토 realmonte. 터키인의 계단]
일정이 촉박해서 신전의 계곡만 꼭 보고 나머지 터키인의 계단과 아그리젠토 구시가지는 옵션으로 두었다. 특히 구시가지는 낙후됐고, 관광객을 상대로 찌질한 속임수를 쓰는 장사꾼이 많다고도 해서 아무런 기대가 없었는데, 택시로 터키인의 계단을 다녀와서 시간을 조금 벌어 시간 있는 만큼만 달리다시피 훑었는데 반전 매력이 있었다.
처음에는 아그리젠토에서 이틀을 머물고 엔나enna, 피아짜 아르메리나piazza armerina, 칼타지로네caltagirone에서 하루씩 머물며 시라쿠자siracusa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지도 상으로 예쁘게 그려는 경로이기도 하지만, 대중교통 연결성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한 결과였다. 그런데 세 산간 마을을 이동할 때 일요일이 끼어서 교통편에 문제가 생겼다. 결국 남들이 하는 콘코르디아 신전 말고는 별로 볼 것 없다는 말에 아그리젠토를 하루로 줄여 일요일을 피했다. 원래 계획대로 하고 일요일에는 택시로 이동했으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였는데, 왜 죽어라 대중교통을 고집했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래서 전체 여행에서 가장 아쉬움이 많이 남는 구간이 되었다.
아그리젠토에는 신전 말고 볼 것이 없다고들 한다. 그 말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렇다 쳐도, 신전의 계곡 자체도 너무 넓고 볼 것이 많아 몇 시간에 볼 수 있는 곳이 아닐 뿐더러, 2500년의 역사가 있는 도시인데, 적어도 24시간만에 아쉬움 없이 떠날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아그리젠토: 성당 종탑에서 본 아그리젠토]
고대 로마인들이 이탈리아 남부에 있던 그리스 식민 도시들을 통틀어 마냐 그래챠magna graecia(라틴어식 발음은 마그나 그레키아)라고 했다. 다이달루스가 세운 도시라는 전설도 있지만, 기원전 580년경에 그리스 식민 도시 젤라gela의 식민 도시로 세워졌다는 것이 정설이란다. [젤라는 여행자들의 목적지에서 소외당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시라쿠스를 능가하는 그리스 식민 도시였다.]
아그리젠토는 마냐 그래챠의 대표적 도시였다. 당시 서양세계에서는 아테네, 시라쿠자에 이은 세 번째로 큰 도시국가였고, 인구가 2만에서 8만에 달했단다. 10만 이상이었다는 설도 있단다. 시칠리아의 그리스 식민 도시국가들이 그리스 본토의 도시들보다 더 부유하고 선진 문화를 자랑했다고 한다.
아그리젠토의 그리스 식 옛 이름은 아크라가스akragas였다. 현재 도시가 형성되어 있는 언덕의 꼭대기 부분은 아크라가스의 아크로폴리스였고, 현재 고고학 공원으로 조성된 신전의 계곡valle dei templi은 계곡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지만 남쪽 절벽 능선이다. 아크로폴리스와 신전의 계곡 사이에 주거지와 아고라가 있었다고 하니, 아크라가스는 셀리눈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도시였던 거다. 신전의 계곡 남쪽 끝부터 지금 성당이 있는 아크로폴리스 끝 산꼭대기까지 천연 요새 역할을 하는 절벽을 제외하고 성벽으로 에워싸여있다고 한다. 지금도 산꼭대기에 있는 성당 가는 길에 당시 성벽의 흔적이 보인다.
현재 산 레온san leon이 위치한 곳에 엠포리온emporion이라는 무역항을 건설하여 지중해 전역과 활발히 교역했고, 도시와 바다 사이 평원이 매우 비옥해 농업 생산도 많아서 고대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유한 도시였다고 한다. 세상만물이 물, 공기, 불, 흙 등 4원소에서 태어났다는 주장을 해서 (외워서 시험 보느라) 머리를 아프게 했던 그리스 철학자 엠페도클레스의 고향이 아그리젠토다.
시칠리아에 그리스 신전이 있다는 건 알았으면서도 시칠리아가 고대 그리스라고 말하는 지역에 포함되있었다는 건 몰랐다는 무식함.^^ 그리스 철학자라는 사람들은 모두 지금 그리스 땅 어딘가 출신이지 시칠리아 출신이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암기식 교육으로 얻은 지식의 한계.^^ 이제서 그걸 알고 그 옛날 이야기속 장소에 내가 있다는 것이 마냥 신기하다.
이후 카르타고의 지배, 로마의 지배, 아랍의 지배를 거쳤고, 노르만 왕국의 무자비한 포위작전에 굴복해 시칠리아 왕국으로 편입되었다고 한다. 당시 식량을 봉쇄해 인육을 먹으며 버텼다는 기록이 있지만 정설은 그냥 식량 부족으로 항복했다고 한다. 노르만은 정복에 성공한 후 도시를 재건해서 이름을 girgenti라고 바꾸었고 주교좌(대성당)를 세웠단다.
이후 시칠리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스페인 지배를 거쳤고, 이탈리아에 편입됐단다. girgenti라는 이름은 계속 사용되고 있었는데 고대 로마제국의 영광의 재현을 꿈꾸던 무솔리니가 1927년 하루아침에 라틴어 식 이름 아그리젠토로 바꾸었단다. 그러다 2016년 공식적 행정구역 명은 그대로 두고 아그리젠토 구시가지centro storico 구역에 한해 girgenti로 부르기로 했단다. 표지판을 보면 girgenti라 표시가 보인다.
[아그리젠토 성당 가는 길.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떠있는 구름]
[아그리젠토 성당 천정]
시칠리아는 이탈리아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지역으로 꼽히는데, 아그리젠토는 시칠리아에서도 빈곤한 편이라고 한다. 잠깐 돌아보는 중에도 그렇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곳 역시 2차대전 때 폭격을 많이 당했다는데, 그 흔적이 그대로 있는 곳도 있었다. 이곳 출신 노벨 문학상 수장 작가 루이지 피란델로luigi pirandello를 사랑과 자부심 넘치는 도시지만, 관광객에게 위험한 곳은 아니라도 찌질하게 슬쩍 바가지를 씌우는 관행이 횡행한단다. 이곳 사람들에게 3천 년 전 그리스 세계에서 위세를 떨치며 부귀와 영화를 누리던 시절이 있었다는 역사가 어떻게 느껴질까? 광개토대왕 이야기처럼 허망하게 들리지 않을까 하다가 그것보다는 실체적으로 느끼겠다 싶었다. 이 동네사람들은, 평생 신전에 한 번 가볼까 말까 한다지만, 그래도 3천년을 버티고 서있는 영광의 증거를 오가며 매일 목격할 수 있으니까...
신전이 언덕 꼭대기에 있어 지나가다 그냥 보인다. 김영하의 시칠리아 기행문 제목에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라는 문구가 있었던 것 같은데,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기억도 안 나는 그 말이 계속 떠오르며 시칠리아의 안타까운 현실을 목격할 때마다 그 말을 해주고 싶다. 이곳 구시가지에서도 저 신전을 보며 잃어버린 것들을 기억하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여행을 정리하며 어느새 희미해진 기억을 되살려보는데 그립거나 아쉽지 않은 곳이 없다. 두 번째 여행 계획을 세운다고 생각하면 빼고 싶은 곳이 있을 법도 한데 모두 다시 가야 할 곳이다. 특히 아그리젠토는 일정이 너무 빠듯해서 아쉬움이 많이 남았고, 꼭 다시 가겠다는 다짐을 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