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9/2020

시칠리아 여행: 11: 엔나: 엔나 & 엔나 성당



숙소 밖으로 나오니 4시가 훌쩍 넘었다. 이제는 흐린 것으로 부족해 비도 부슬부슬 내린다. 비옷을 꺼내 입고, 에리체에서 얻은 비닐로 카메라를 싸서 가방에 넣었다. 에리체에서 변화무쌍했던 날씨를 생각해보면 높은 지대 탓인지, 오는 날이 장날인 건지 알 수 없다. 어제도 이랬던 것으로 봐서 아침에 맑았다가 오후에 흐려지고 비를 뿌리는 것이 이 시기 이 지역의 날씨 패턴인가 싶기도 하다. 토니 말에 의하면 이 지역 날씨는 8월까지 좋다가 9월에 나빠졌다 10월이 되면 다시 좋아진다고 한다. 안내서에도 가을 여행 적기는 10월이라 했었다. [에리체에서처럼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는 만나지 않았지만 이 날 엔나의 하늘은 끝내 한 순간도 활짝 웃어주지 않았다.]

버스도 지연됐고, 체크인도 이래저래 오래 걸려 생각보다 너무 늦었다. 교통수단이 없어 일요일 이동을 비키려다, 도미노처럼 줄줄이 일정이 꼬였다. 엔나가 크게 볼 것은 없는 도시라지만, 이렇게 찍고 갈 거면 뭐하러 무거운 배낭 매고 낑낑거리며 다니나 싶고, 다 저녁 때 새로운 도시 탐험을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 속상하다.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깨달음이 실천도 되는 날이 내게 있을까?^^ 이렇게 또 시칠리아에 다시 올 이유를 더하는 거지! move, move!!!

성당 보고 롬바르디아 성castello di combardia과 체레레 바위rocca di cerere를 보고, 그리고 시간이 되면 서쪽 페데리코 탑torre ottagonale di Federico II에서 해지는 것을 보자고...







엔나는 시칠리아 한 복판에 있다. 시칠리아 지형이 삼각형인 것을 고려하면 거의 무게중심이나 내심에 가까울 정도로 정 중앙이다. 또한 사방 낭떠러지인 산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다. 해발 931미터, 에리체보다도 200미터가 더 높다.  오면서 본 모습은 더 높은 산에서 꼭대기 뾰족한 부분을 뚝 잘라내고 도시를 만든 것처럼 보였다.  수세기 동안 난공불락의 성이었다고 한다. 성을 어떻게 지켰을지는 군사전략 1도 모르는 사람도 짐작할 수 있다.^^ 이 일대는 과거에도 지금도 곡창지대라고 한다. 이탈리아 파스타 산업에 듀럼밀을 공급하는 주요 공급처란다. 데메테르 숭배가 이곳에서 성행했던 까닭이 있었던 거다. 시칠리아 지방에 9개 현provincia이 있는데, 엔나는 엔나 현provincia di enna의 수도이고, 현의 수도로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서 시칠리아의 전망대belvedere di sicilia라는 별명이 있단다.

엔나는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장소다. 인문학 무식자에게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로만 들리는 그리스 신화의 물리적 공간이 이 일대라는 것이 마냥 신기하다. 지하의 신 하데스가 데메테르의 딸 페르세포네를 납치했다는 신화 속 이야기가 벌어진 장소라는 것이다. 시칠리아에 산다는 곡물과 수확의 그리스 여신 데메테르 숭배 의식의 중심지였기도 했단다. 인류 역사 최초의 흔적으로는 기원전 7세기 시카니sicani 부족의,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주요 정착지 헨나henna가 이곳에 있었단다. 이후 그리스, 로마, 아랍, 노르만 세력이 이곳을 지나갔다고 한다. 그들이 조용히 지나갔을 리는 없다. 알면 끔찍하고 가슴 아픈 게 이 땅의 역사 같다. 1087년 노르만세력이 이곳을 점령하고 카스트로죠반니castrogiovanni라고 명명했고, 이 이름이 계속 사용됐는데, 1927년 무솔리니가 들어와서 enna로 바꾸고 이 지역의 수도로 지정했단다. 무솔리니... 파쇼 같은 놈이 아니라 진짜 원조 파쇼... ^^








엔나 성당 duomo maria santissima della visitazione


엔나 성당이 특별히 예쁘다는 소리는 못 들어본 것 같은데, 엔나에서 가장 예쁜 것을 꼽으라면 성당을 꼽고 싶다. 1307년에 지어졌으나 1446년 화재로 소실되어 많은 부분이 재건축 되었고, 종탑은 17세기에 추가되었다고 한다. 서쪽 파사드facade에 비계를 세우고 공사를 하고 있어 남쪽으로 들어 갔다. 아무런 기대가 없었는데 너무 예쁘다. 현재 내부는 16세기에 바로크 스타일로 장식된 것이라고 한다.


[엔나 성당.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마리아를 위한 예배당cappella della vergine della visitazione]


이 교회는 사촌이자 사도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을 방문한 마리아에게 봉헌되었단다.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마리아를 위한 예배당이 무척 예쁘다. 당시 둘 다 태중이었다고 하는데 예배당 제단 위에 태중인 두 성인의 그림이 걸려있다.
 



회색 현무암 기둥과 나무 천정, 붉은색과 흰색 대리석의 기하학적 바닥이 분위기의 중심을 잡는다. 기둥은 육중하게 굵어도 길이가 길지 않아 기둥 옆에 서도 압도적인 느낌은 들지 않는다. 색상, 재질, 디자인 등 모든 요소에서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이 적절히 균형을 맞추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가볍지만 너무 가볍지 않고, 밝지만 너무 밝지 않다. 기둥 머리는 코린트 양식인데, 기둥 밑단 부분도 각기 다른 조각이 있다. 어느 벽도 빈틈이 없다. 천정에 매달려 있는 등도 너무 예쁘다. 그런데 어떤 장식도 돈이나 권세를 자랑하려 하지 않는 느낌이다. 그냥 예쁜 것 좋아하는 사람이 예쁘게 만들려고 정성껏 최선을 다한 것 같다. 품위 있게 명랑하고 귀엽다. 보석같은 성당이다.


[엔나 성당. 왼쪽은 예수 탄생 예배당cappella della natività. 동방박사의 경배 그림이 있다. 오른쪽 철문 뒤에 세례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