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2/2020

시칠리아 여행: 10: 아그리젠토: 신전의 계곡 & 서쪽 구역



[신전의 계곡 디오스쿠리 신전]

[신전의 계곡 지하신들의 신역 풍경]


5번 문을 지나면 왼쪽으로 바로 지하신들의 신역santuario delle divinità ctonie이 펼쳐져 있다. 

여기에서 지하신은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 코레kore라고도 불리는 페르세포네는 제우스와 데메테르 사이에 태어난 딸로서 하데스에 납치되어 지하세계에 살게되었지만 능동적으로 지하세계의 헤게모니를 잡고 활약했다는 여신... 데메테르는 지하세계의 여신이 아닌데 왜? 하는 의문이 드는데, 여기에서 '지하'는 저승이 아니라 말 그대로 땅속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리고 땅속은 죽어서 묻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새로 태어나는 곳으로 여겼단다. 따라서 땅의 생명력, 즉 씨앗을 싹틔우기를 관장하는 곡물의 여신 데메테르가 지하의 신으로 분류된 것. 페르세포네는 지하와 지상을 왔다갔다 하며 지내는데, 생명의 순환을 의미한다나... 뭐...


이곳에 여러 개의 신전과 제단이 있다는데 유적은 대부분 누워있고 터의 흔적만 남았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서있는 유적은 너무 귀하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조금이라도 하늘로 솟아있는 신전은 스파르타의 왕비 레다의 쌍둥이 아들인 카스토르와 폴룩스의 신전tempio di castore e polluce이다. 신전의 왼쪽 모서리 부분 기둥 네 개 위로 엔테블러처와 페디먼트까지 위태롭게 서있다. 미술사 책에 도리스 양식의 구성을 설명하기 위해 일부분만 그린 삽화 모양 같다. 

이 신전은 디오스쿠리 신전tempio dei dioscuri라고도 하는데 디오스쿠리가 제우스의 아들들이라는 뜻이란다. 제우스에게 수많은 아들이 있음에도 디오스쿠리는 이 쌍둥이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처럼 쓰인단다. 별자리 쌍둥이 자리의 쌍둥이도 이들이란다. 그렇지만 현재 보이는 모습이 오리지널 신전도 아니고, 이곳에 이들의 신전이 있었던 적도 없단다. 19세기에 대규모 재건 사업이 있었는데, 당시 여기저기 다른 신전에서 가져온 것들로 재구성하고, 두 신을 위한 제단을 보고 쌍둥이 신이자 항해의 수호신인 이들의 신전이라 이름 붙인 것으로 추정된단다. 이 구역 전체가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를 위한 신역이었으므로, 실제 신전은 그들을 위한 신전이 있었을 거란다. 신전 오른쪽으로 아그리젠토 시가지가 보인다.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나지막한 언덕을 뒤덮고 있다.

P.S. 
그들의 아버지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단다. 둘 다 레다의 남편 스파르타의 왕 틴다레우스tyndareus의 아들이다, 둘 다 제우스의 아들이다, castor는 틴다레우스tyndareus의 아들이고 pollux는 제우스의 아들이다 등의 설이란다. 그런데 이어지는 많은 이야기는 카스토르는 필멸하는 인간의 아들, 폴룩스는 영생하는 신의 아들이라는 설정 하에 전개된다.






[신전의 계곡 콜림베트라 정원. 지금은 작은 계곡 같다.]


지하신들의 신역 북쪽에 콜림베트라 정원이 있다. 콜림베트라는 고대 그리스어로 수영장, 저수지라는 뜻인데, 아그리젠토의 참주 테로네가 이메라himera 전투에서 승리하고 카르타고 포로들을 데려와서 판 인공호수였단다. 이곳에 물을 대기 위해 판 지하 수로ipogei는 아직도 기능하고 있단다. 인공호수는 저수지와 물고기의 공급지로 사용하기 위해서 만들었단다. 그런데 1세기도 못 가서 메워졌는데, 그 이유는 수질 관리를 못해서 수인성 전염병의 근원이 돼서 그랬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P.S. 이메라himera 전투: 이메라himera는 시칠리아 북부 해안에 유일하게 있던 그리스 식민 도시. 이메라 전투는 기원전 480년 카르타고가 시칠리아를 침공했을 때 아그리젠토와 시라쿠자 연합군이 카르타고와 이메라에서 맞붙게 된 전투를 말한다. 연합군은 이 전투에서 카르타고를 격파했고, 카르타고 병사들은 포로가 되어 아그리젠토로 잡혀와 노예생활을 하게 됐다고 한다. 현재 그 지역은 이메라 고고학 박물관parco archeologico di himera이 되었다.]


이후 아랍인들이 이곳에 오렌지를 키우기 시작하며 풍요로운 정원이 되었단다. 지금은 오렌지, 아몬드, 올리브 나무 등이 있는 정원으로 조성되어 있고, 2,500년 전 판 지하 시설을 볼 수가 있다고 하는데, 시간이 없다 싶어 일단 지나쳤다. 한 번 지나치면 인연이 없는 것이다. 관광객이 지나친 곳으로 다시 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 시간이 지나며 잔상처럼 남은 이 공원의 자연을 얼마나 그리워할지 이때는 몰랐다. 정원을 지나 서북쪽 끝에 헤파이스토스 신전이 있지만 그곳도 일단 패스...





[공원 중간 중간 어떻게 신전을 지었는지 보여주는 장치와 설명이 있다. 바위 더미를 앞에 두고 무엇을 보고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하는지 방황하는 영혼을 위한 배려처럼 느껴진다. ^^]





[신전의 계곡 제우스 신전]


5번 문 동쪽에 있는 제우스 신전으로 갔다. 신전은 기단만 남은 완전 돌무더기였다. 기원전 480년 이메라전투에서 데려온 카르타고 포로들을 동원해 짓기 시작했으나 기원전 406년 카르타고의 공격으로 완성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완성됐더라면 도리스 양식 신전으로는 가장 큰 규모였을 것이라고 한다. 가로 52.7미터, 세로 110미터. 돌로 지은 후 그 위에 스투코를 입혔을 것이란다. 신전에 채색을 했다는 말 이후, 신전에 관해 처음 들어보는 새로운 정보이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봤던 디오스쿠리 신전에도, 셀리눈테 신전 기둥에도 희끗희끗한 흔적이 있어 뭔가 했었다. 신전은 지진으로 일부 부서지긴 했어도 형체가 많이 남아 있었는데, 18세기에 신전을 채석장인 양 사용해서 완전히 모습을 잃었단다. 많은 돌이 엠페도클레 항porto empedocle의 방파제를 쌓는데 쓰였단다. 으...
 

[신전의 계곡 제우스 신전의 남상주telamon]


신전 서쪽에 아틀라스 남상주telamon가 땅바닥에 누워있다. 안내판을 보니, 기둥 사이사이 이 텔라몬들이 지붕을 받치고 있는 모양으로 서있다. 신전 기둥이 앞에 7개 옆에 14개, 총 40개였고, 텔라몬은 38개였단다. 이런 모양의 그리스 신전은 처음 보는 것 같다. 파격적인 디자인이다. 텔라몬의 위치에 대해 논란이 많았는데, 지금은 안내판의 그림처럼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고 쓰여있다. 

그리스인들은 이 남상주를 제우스에게 하늘을 어깨로 받치는 벌을 받은 아틀라스라고 불렀단다. 또 누군가는 페르시아 전쟁에서 기원한 페르시아인을 의미한다고 했단다. 그러나 기원전 480년 이메라 전투에서 격파한 카르타고인들을 의미한다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의견이란다. 그들의 치욕을 돌로 새겨 영원히 기억하게 하기 위한 의도... 안내판에 있는 모양으로 볼 때 카르타고인에게 치욕을 상기시키는 용도라는 게 맞는 듯하다. 신전을 지탱하는 기둥의 역할이 아니라, 중세 성벽에 매달아두었다던 시신을 연상시킨다.

팔레르모 포르타 누오바porta nuova의 아랍인 형상의 텔라몬이 2,500년전의 신전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니... 나만 몰랐다가 이렇게 신기해하고 있나 싶다. ^^ 텔라몬은 높이가 8미터이고 12조각의 이 지역에서 나는 석회암으로 되어 있단다. 모두 나체이고, 얼굴은 콧수염과 턱수염이 있는 긴 머리 어른과 수염이 없고 짧은 곱슬머리의 청년 등 두 종류가 있단다. 두 얼굴이 서로 번갈아 서있었단다. 1812년 최초로 텔라몬이 조립되었고, 그것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단다. 이곳에 비교적 온전한 것과, 돌 덩이들을 텔라몬임을 유추할 수 있는 형태로 대충 배열해 놓은 것이 있는데, 온전한 것은 복제품이고, 엉성하게 배열된 것은 실제 발굴된 텔라몬 조각들이란다.



[신전의 계곡 제우스 신전 풍경. 중간 오른쪽은 텔라몬이 장식된 모형 사진] 


곳곳에 서있는 안내판을 읽어보면 상세한 설명이 있는데, 텍스트를 읽으려니 모르는 단어도 많고 시간도 오래 걸리고 고충이 많다. 대충 걸러 읽고, 가끔 사진으로 찍어두기도 하는데 안내판에 쓰인 언어가 모국어인 사람들은 더 빨리 더 많은 정보를 얻겠다 생각하니 왠지 분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