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체 al convento bistrot ristorante의 트라파니 식 쿠스쿠스]
오는 길에 봐둔 porta del carmine 근처 레스토랑al convento bistrot ristorante으로 들어갔다. 이름에서부터 옛 수도원을 개조한 곳이라는 게 명백하지만 분위기로 봐도 마찬가지다. 실내가 아무런 장식 없이 정갈하다. 장식 없이 공간 자체로 충분하다 싶다. 벽돌로 된 barrel vault 천정이 유일한 장식 같다. 서빙 하는 직원조차 단정하게 빗어 올린 머리와 흰색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어 수도사의 분위기를 풍긴다.
여행 중 식단이 평소에 비해 채소가 부족해 채소를 섭취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구운 채소와 트라파니 식 쿠스쿠스couscous alla trapanese를 시켰다. 이런 분위기에서 나오는 해물이 들어간 음식은 끝까지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틀에 넣어 모양을 잡은 쿠스쿠스가 넓은 접시 가운데에 떡 올려져서 나왔고, 색으로 보나 냄새로 보나 딱 랍스터 비스크 같은 것이 작은 종지에 담겨 따로 나왔다. 수프인가 하고 맛을 보니 걸쭉하고 슴슴하고 고소하고 갑각류 특유의 향과 맛이 있다. 역시 간이 세지 않다. 시칠리아 간은 유럽 음식은 짜다는 생각에 반론을 제기한다. 쿠스쿠스는 찐 차조 같은 느낌으로, 한 숟가락 뜨자 모양도 모래성 같은 것이 모래성 무너지듯 푸슬푸슬 무너져 내린다.
쿠스쿠스가 처음은 아니다. 아주 옛날에 포트럭 파티에서 모로코 출신 친구가 가져와서 먹어봤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맛은 기억나지 않는데, 적어도 이런 맛은 아니었던 것 같다. 식감도 생김새처럼 푸슬푸슬 거친 모래알 같다. 음, 이게 트라파니 식 쿠스쿠스인가 보네 하며 밥 한 숟갈 먹고 국 한번 떠먹는 식으로 먹다가, 이게 아닌가 하는 신호가 온다. 이 질감이라면 종지에 담긴 것을 부어 먹어야 할 것 같다. 직원을 불러 물어보니, 그렇단다. 수프인줄 알고 따로따로 먹었다 했더니 그래도 된다며 웃는다. 처음부터 부었으면 촉촉한 쿠스쿠스를 먹었을 것 같은데, 이미 늦었다. 소스를 너무 많이 먹었다.^^ 그래도 보물찾기 하듯 모래 속에 숨겨진 새우도 간간이 발견하고 나쁘지는 않았다. 약간 강원도 음식 같은 맛, 자극적인 것에 익숙한 입맛으로는 알 수 없는... 여러 delicate한 향과 맛이 있지만 한 번에 그 맛을 이해하기는 좀 어렵지 싶다. 오랫동안 내려온 음식이니 계속 먹다 보면 길이 들고 맛을 알게 되겠지...
쿠스쿠스를 증기로 쪄서 익힌다던데 리조토 만드는 방식으로 조리하면 더 맛있지 않을까 하다, 파스타 알 덴테가 생각났다. 맛을 알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맛.^^ 시간이 지나 푸슬푸슬한 게 더 맛있게 느껴지는 날이 올 수도... 가치나 신념에 태클 걸지 않는 전통은 닥치고 존중하는 걸로...
P.S. 얼마 전 온 세상 음식을 다 알고 다 먹고 다니는 것 같은 사람이 시칠리아 음식 소개하는 TV 프로그램에서 트라파니 식 쿠스쿠스를 파스타를 작은 알갱이로 만들어 찌는 음식이라고 소개한다. 뜨악... 뭘 먹었는지 모르겠지만, 한 입만 먹어봐도 단순히 파스타를 잘게 만든 식감이 아닌데... 내 기억에 수수 알갱이처럼 만든 파스타를 부르는 이름이 따로 있었다. 이름이 기억은 안 나지만 생선 육수에 아스파라거스를 넣고 리조토처럼 만들었었던, 그리고 뭐가 이렇게 맛있지 하며 먹었던... ^^
[옛 사진을 뒤져 그때 먹었던 음식을 찾았다. 파스타를 곡식 모양으로 만든 건 fregola 또는 fregula. 사르데냐 전통음식. 쿠스쿠스는 세몰리나를 작은 알갱이 모양으로 엉겨붙게 한 것. 즉, 쿠스쿠스는 반죽 상태를 거치지 않음. 쿠스쿠스는 맛도 식감도 프레골라와는 많이 다름.]
[에리체. 빗물이 시내처럼 흐른다]
밥을 먹고 나오려는데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다. 우산으로 버티기는 힘들 것 같다. 다시 들어가서 조금 기다리기로 했다. 꽤 기다렸는데, 기세가 좀 꺾이긴 했어도 멈출 것 같지 않다.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데 어찌해야 하나 싶다. 카메라만 잘 단속하면 좀 젖어도 괜찮긴 하다. 여행길에 습기로 카메라가 멈추었던 적이 있어서, 이번에는 비가 조금만 떨어져도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고 카메라는 배낭에 넣어두곤 했었다. 그런데 이 비는 배낭도 안전하지 않을 것 같다. 다시 들어가서 비가 좀 긋기를 기다렸다. 직원에게 비닐 봉지를 하나 얻을 수 있냐고 물으니, 크고 튼튼한 비닐 봉지를 가져다 준다. 카메라를 비닐에 담아 배낭에 넣고 식당을 나왔다.
평평한 길은 없으니 골목마다 빗물이 시내처럼 흐른다. 다행히 비가 곧 그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