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살라 레푸블리카 광장. 정면 건물은 시청, 오른쪽은 성당]
성당을 나왔는데 아직도 훤한 대낮이다. 근처 빠빠라르도 형제들Fratelli Pappalardo bar이라는 이름의 바가 있다. 라르도? 돼지비계 절임인데... 말만 들으면 끔찍한 음식일 것 같지만, 맛있는 라르도는 버터보다 맛있다. 아무튼... [나중에 알아보니 '라르도 먹보'라는 뜻이란다.^^ 이탈리아어에서 동사와 명사를 결합해 그 동작을 하는 사람 또는 도구를 뜻하는 명사를 만드는데, 게걸스럽게 먹다+라르도의 조합... ^^]
금방 짠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싶은데 단어가 생각이 안 난다. 수모, 수고, 나랑하, 오렌지 주스, 아란쵸, 아란챠 등등 떠오르는 모든 단어를 아는 모든 언어를 동원해 말하고 나서야 생과일 주스를 뜻하는 스프레무따spremuta가 생각났다. 나도 나지만 그도 눈치가 밥통이다. 관광객이 자기한테 원하는 것이야 뻔할 텐데 그 와중에 눈만 멀뚱멀뚱하고 있었다. [이름 따라간다는 말이 있는데, 이름의 뜻을 알고 나니 센스가 없는 게 어울림... ^^]
보통 주스는 수코succo라 하고 바로 짜서 주는 생과일주스는 스프레무따라고 한다. 그리고 기야쵸가 있냐고 물었더니, 없다고 한다. 기아쵸ghiaccio는 얼음이다. 시칠리아에 와서 아직까지 들어보지 못한 기아쵸가 순간적으로 생각난 것이 신기하다.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1도 못 알아듣는 놈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뇌가 생존본능을 발휘한 건가? 어떻게 이런 날씨에 음료수 파는 집에 얼음이 없을까? 주스에 얼음도 넣지 않고 마시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없다. 날은 더워 죽을 것 같은데 얼린 것이라고는 다디단 그라니따와 젤라또 밖에 없는 것 같다. 광장 테이블에 앉아 쉬다가 물 두 병 사 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P.S.
이탈리아 말은 ‘프크트스’라 발음하는 일이 거의 없다. 모두 쁘끄뜨쓰에 가깝다. 우리말 외래어 표기법은 경음을 쓰지 못해서 표기법 대로 음독하면 현지 발음과 멀어진다. 게다가 영어 쓰는 사람들의 아전인수 격 발음에 가까워져, 내 모국어가 영어가 아닌데 이런 식으로 써야 하나 싶다. 모든 소리를 소리와 최대한 가깝게 표기할 수 있는 위대한 문자를 가지고 왜 그런 원칙이 있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심지어 그 표기법은 외래어는 최대한 현지 발음에 가깝게 표기한다는 자신들이 세운 또 다른 원칙에 배치된다. 어쩌라는 건지... 그렇다 보니 내 표기법도 상반되는 두 원칙 사이에서 오락가락한다.
숙소
[숙소 밖 풍경: 마르살라 두오모]
6개의 물집이 나의 폭주를 막는구나 싶다. 해가 이렇게 밝은데 숙소에 들어온 건 처음 같다. 여행을 건강하게 마친다면 물집의 공이 있겠다 싶기도 하다. 침대에 누워 뒹굴 거리며 월요일이라 할 게 없다는 핑계가 있는 것이 은근히 좋기도 하다. 내 안에서 나를 끊임없이 채근하는 에너자이저가 나는 아니다. 누군가 내 안에 심어 놓은 것이라고 본다. 그 존재는 절대 지치지도 멈추지도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 존재와 합의점을 찾는 것. 합의를 본 날, 나는 평화롭다. 그 존재가 나를 휘어잡고 날뛰는 날, 나는 불안하다. 그 존재는 나를 성찰하게 하고 성숙하게 하지만 내 모든 부정적 상태의 근원이기도 하다.
주말마다 스페인어 회화 수업을 들으러 다니는데, 매번 한 주 동안 있었던 일을 묻는다. 무슨 일이 있었나 생각을 해야 한 일이 떠오르고, 어떤 때는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지난 월요일 집을 떠났으니까, 그런 일상을 벗어난 지 딱 일주일이 지났다. 평소 한 달을 보낸 것보다 더 많은 일이 며칠 사이에 있었다. 어쩌면 하루를 한 달의 밀도로 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많은 것을 하고 보고 느끼고 많은 생각을 한다. 하루에 대해 이렇게 할 말이 많다니... 알고 보니 내가 주어진 시간을 꼭꼭 채워 살 수 있는 정신적 신체적 에너지가 있는 사람이었나? 어쩌면 내 안의 에너자이저의 속도에 맞춰 살 수도 있겠다 싶다.
트라파니 숙소를 평가해 달라는 메일이 왔다. 웬만하면 안 하는데 알베르고 마꼬따는 안 할 수 없지.^^ 핸드폰의 불편함을 견디며 매우 구체적으로 그들의 만행을 써서 올렸다. 그들도 읽을 수 있도록 영어로... 심지어 너무 길게 써서 글이 중간에 잘렸다.^^ 도중에 으악... 이 귀한 시간에 이 짓을 해야 해 하며 역정이 났지만, 더러운 것을 피하지 않고 치운다는 생각으로 꾹꾹 참으며 끝까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