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2020

시칠리아 여행: 08: 마르살라: 100 euro distress in sicily





오늘은 마르살라 시내를 돌아보고 내일은 셀리눈테selinunte를 다녀올 생각이다. 모찌아mozia 섬에 가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염전 투어 하며 섬이 있는 스타뇨네 라군에서 유람선도 탔고 근처 염전도 봤으니 오늘은 그냥 시내에 머물자 싶다.

우선 은행에 가서 100유로짜리를 작은 단위 지폐로 바꿀 작정이다. 돈을 낼 때마다 꽤 스트레스를 받는다. 줄 때는 서서 주고받을 때는 엎드려 받는 것이 돈이라 했거늘, 100유로 지폐를 내야 할 때는 주면서도 엎드려 받아달라고 사정하는 태세가 된다. 받아주면 감지덕지 고마워하고... 옳지 않다.

워낙 악명 높은 곳이라 이곳 시스템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웬만하면 신용카드를 안 쓰고, 현금 인출도 되도록 자제하겠다는 생각으로 한 달치를 환전했다. 큰돈 쓰기 불편하다며 작은 단위로 달라고 했음에도, 액수가 꽤 되니 부피가 크다며 은행 직원이 거의 100유로짜리 지폐로 줬는데, 어차피 같은 돈인데 굳이 작은 돈으로 다시 바꿔오라고 하기 싫어 그냥 받았었다. 

그런데 도대체 100유로짜리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100유로짜리만 내면 사람들이 경기를 한다. 50유로를 내도 잔돈 없다는 일이 빈번하다. 오래전 미국에 있을 때도 100달러짜리를 달가워하지는 않았지만 형광펜처럼 생긴 펜으로 위폐 여부를 확인하고 받긴 받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아예 받지 않겠다고 하며, 신용카드 없느냐고 묻는다. 낼 때마다 내도 되겠느냐 허락을 받고, 허락하면 대단한 시혜를 받은 듯 감지덕지다. 참나... 밥 먹을 때 쓰는 돈이 제일 크고, 매일 입장료, 교통비, 아이스크림 등 푼돈을 써야 하는데, 아이스크림이야 안 먹으면 그만이지만, 이런 식이면 버스 못 타고 박물관 못 들어가는 일도 생기겠다 싶다. 잔돈 없는 것은 네 사정이니 나는 모르겠다 하는 놈이 있고도 남을 분위기...

이런 실랑이가 귀찮아 미리 잔돈으로 바꿔놓자 싶다. 호텔 프런트에 은행에서 바꿀 수 있겠냐 물어보니 가능하다며 가보라고 한다. 은행이 곧 문을 닫을 시간이니, 서둘러 가라 한다. 은행은 대체로 12시 반에서 1시 사이에 대체로 문을 닫았다.







오는 길에 보았던 unicredit이 가장 가깝다고 해서 그곳으로 갔다. 그런데 30분 넘게 기다렸는데 안 된다는 대답을 듣는 데 1분도 걸리지 않은 것 같다.

일단 은행 안에 발을 들여놓기도 어려웠다. teleport에 쓰일 것 같은 좁은 원통형 회전문을 통해 들어가야 하는데 예사 회전문이 아니다. 거리 쪽으로 열린 굉장히 좁은, 한 명만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공간으로 들어가면 엘리베이터 문처럼 그 공간의 문이 닫힌다. 그러고 나면 그 공간이 회전해서 은행 실내 쪽을 향해 멈추고 엘리베이터처럼 닫혀있던 문이 열린다. 그렇게 은행 실내로 들어가고 나간다. 무장 안전요원은 들어오는 사람을 시선으로 스캔하며 서있다. 문 밖에서 한참을 서성이며 관찰해서 어떻게 들어가는지 알아내고 겨우 들어간 것이었다.

들어가서도 이상했다. 은행 다 거기서 거기지 뭐 라고 생각하면 완전 오산이다. 너무 낯선 공간이었다. 판테온인 줄... 판테온의 뚫린 천정으로 빛이 들어오듯 천정 중앙에 설치된 조명이 공간 중앙의 원형 공간을 환하게 비추었다. 손님은 거기에 앉아서 기다리고, 은행원은 원 밖 가장자리에 듬성듬성 배치된 좌석에서 일을 보며 번호로 손님을 호출했다. 그러고 보니 이탈리아 은행은 처음이었다. 우리나라 은행은 들어가서 두리번거리면 청원경찰이든 직원이든 누군가 와서 무슨 일로 왔냐고 용건을 묻고 안내를 해준다. 많은 시선이 내게 꽂히고 있음이 너무 느껴지는데 이곳에서는 아무도 선뜻 나서주는 사람이 없다. 마땅히 물어볼 사람도 눈에 띄지 않는다. 순수한 현금이 유통되는 곳... 낯선 사람에게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밀 장소가 아니다 싶기는 하다. ^^

한참 서서 분위기를 파악해 보니 이곳에도 두 종류의 번호표가 있었다. 일단 하나를 뽑고, 옆에 서있던 사람에게 내 용무에 이 번호표가 맞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아닌 것 같은데 상관없을 것 같다며 다른 번호표를 또 뽑아준다. 아무 쪽이나 먼저 부르는 쪽으로 가라고 한다. 내 질문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한 반응이다. 동질감 내지는 보편성.^^ 

그렇게 힘들게 은행원 앞까지 가게 된 것인데, 엉덩이를 의자에 제대로 붙이기도 전에, 우리는 돈을 바꿔주지 않는다 한마디 하고는 다른 번호를 부르고 책상에 코를 박고 서류를 넘긴다. 유감의 표현도 없고 설명도 없고 이유를 물을 여지도 원천봉쇄다. 너 사이보그냐? 라고 묻고 싶었다.







호텔 직원이 이런 사실을 모르는 게 이해가 안 된다. 100유로는 나만의 문제인 것? 나만 원시인처럼 현금 들고 다니는 거임? 관광업에 종사한다고 해당 지역을 잘 알고 관광객의 문제에 대한 답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오산인 것을 제대로 깨닫고 있다.





은행을 나와 관광안내소로 갔다. 내일 가려는 셀리눈테의 교통편이 너무 불편해서 혹시 교통편을 제공하는 투어 상품이 있을까 알아보고 싶었고, 100유로 문제도 물어보고 싶었다.

관광 안내소에 들어가니 native english speaker 억양의 여자가 명랑하게 맞는다. 돈을 바꿔주는 곳을 물으며 은행에서 당한 일을 하소연했더니, welcome to sicily 라며 웃는다. 영국사람인데 시칠리아에서 살고 있단다. 그래, 웃을 일 맞다. 불편·부당한 상황은 부정적 감정으로 대응하는 게 공식은 아니라는 것... 시칠리아가 어떠냐고 묻는다. 시칠리아를 흉볼 생각은 없어 그것 말고는 좋다고 공식적 답변을 하니까, 다행이라고...^^ 지난해까지는 은행에서 잔돈으로 바꿔줬는데 올해부터는 바꿔주지 않는다고 들었단다. 은행에는 위폐탐지기도 있을 텐데 자신도 이유를 모르겠단다. 우체국에 한번 가보라고 한다. 그리고 banco di sicilia에서 아직도 바꿔준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다고 한다.

셀리눈테 투어는 유감스럽게 없단다. 그러며 카스텔베트라노castelvetrano까지 가는 기차 시간표를 알려준다. 그리고 지금 시즌에는 카스텔베트라노 기차역에서 셀리눈테 고고학 공원까지 왕복하는 셔틀이 30분마다 출발한다고 한다. [그런데 셔틀은 없었다. 역무원에게 물으니 금시초문이라는 표정... 시칠리아에서 듣는 정보는 복불복이다. 직접 확인해 보기 전까지 맞는지 틀리는지 알 수 없다.] 셔틀은 몰랐지만 기차 시간이야 나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이곳에서도 별 소득이 없다. 마지막으로 맛집이나 알아보자 싶어 물었더니, osteria il gallo e l'innamorata를 추천해 준다. 지역 음식이 조금씩 나오는 전채antipasto 메뉴가 있단다. 딱 원하는 곳 같다. 드디어 방문한 보람을 찾았다.^^


혹시나 하고 우체국을 가보았다. 어디를 봐도 돈을 바꿔줄 분위기도 아니고 사람이 너무 많아, 또 은행에서 당한 꼴을 또 당하겠다 싶어 나왔다.

마지막으로 시칠리아 은행에 가보자 싶었다. 구글 지도로 시칠리아 은행을 찾아서 아무리 주변을 돌아도 은행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밥이나 먹자 하고 가는데, 식당 골목 입구 모서리에 시칠리아 은행이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찾던 banco di sicilia는 unicredit으로 바뀌었는데 구글지도에 업데이트가 안 돼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던 것이었고, 시칠리아 은행이라고 생각하고 들어간 곳은 credito siciliano라는 다른 은행이었다.] 그리고 문 닫는 시간까지 아직 5분의 시간이 있다.

한 명밖에 없는 창구 직원이 누군가와 이야기 중이다. 시간이 없는데 하며 조바심을 내고 있는데, 퇴근길로 보이는 직원 한 명이 사무실에서 나온다. 그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그랬더니 은행에서 더 이상 외국인에게 현금을 현금으로 바꿔 줄 수 없다고 한다. 법이라서 이탈리아 어떤 은행에서도 못 한단다. 바꾸려면 이탈리아 거주 허가증이 있어야 한단다. 그러고 나서 우체국에서는 바꿔줄지도 몰라 하다가 아니야 거기서도 안될 거야 라고 말을 바꾼다. [그러면 아까 unicredit의 그녀는? 내게 서류가 있는지 묻지도 않았었다. 상황을 알게 되니 더욱 괘씸!] 그리고 카드로 뽑으면 잔돈이 나오니 뽑아 쓰라는 등 고민을 함께 해준다. 그들도 아는 것이다, 100유로짜리가 쓰기에 부담스러운 돈이라는 걸. 환전 수수료 내고 환전한 돈을 두고 또 수수료 내고 현금을 뽑아 쓸 수는 없다. 아무튼 은행은 전전했지만 소득은 있었다. 혹시나 하며 또 다른 은행에 가서 기다리고 허탕 치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런데 생각할수록 오늘 내가 보고 들은 것들이 이상하다. 한 사람씩 차례차례 출입할 수밖에 없는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이상한 출입문도, 고객을 중앙에 모여있게 하는 실내 배치도, 액수를 제한하는 것도 아니고 무턱대고 교환이 안 된다는 것도, 소액권을 고액권으로 바꾸는 건 돈세탁 염려 때문일 수도 있다고 어떻게 이해해 보겠는데 고액권을 소액권으로 바꾸는 것조차 금지하는 것도... 모두 다 이상하다. 금융계의 문제인지, 시칠리아의 문제인지, 이탈리아의 문제인지, EU의 문제인지 알 수는 없지만, 참 어렵게 산다 싶다.

그런데 시칠리아 은행에서 들은 설명은 unicredit 직원도 해줄 수 있었다. 뭐가 인간성의 차이를 만드는 걸까? 여행자가 되어 낯선 땅에 홀로 있다 보니 인간성을 감지하는 센서가 예민해졌는지, 아니면 어떤 위협도  안 되고 후한도 없을 것 같은 대상에게 감춰둔 인성을 마음껏 드러내니 쉽게 감지되는 건지... 마냥 vulnerable한 상태가 되고 보니, 적당히 포장된 인간성의 민낯을 보게 되는 것 같다.

아무튼 환전할 때 100유로짜리 쓰기 어렵다고 분명히 소액권으로 달라고 했거늘, 부피가 크다며 내 생각해서 굳이 100유로로 바꿔준 단골 은행 직원이 원망스럽다. 이제 소액권으로 바꾸겠다는 생각은 포기하고 마음가짐을 공격적으로 바꿔보기로 한다. 밥값 내는 상황을 집중 공략하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박물관이야 표 안 팔고 못 들어가게 하면 그만이지만, 식당이야 이미 먹은 걸 어쩌겠어? 거스름돈 없다고 돈을 안 받겠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