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제스타 신전. 그리스 극장 올라가는 비탈길에서 본 풍경]
[세제스타: 매표소 풍경. 뒤로 신전이 살짝 보인다]
버스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보인다. 나 빼고 다들 버스가 아닌 승용차로 오는 것이었다. 적어도 땡볕에 쓰러졌을 때 구해줄 사람이 없어 죽을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여기에도 유칼립투스 나무가 많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나무인가 보다. 네트워크가 좋지 않은지 데이터 통신이 원활하지 않으니 시원치 않은 녀석이 더 말귀를 못 알아 듣는다. 음성 인식 이야기다. ^^ 무선 통신망이 촘촘할 이유가 없는 인적 드문 곳이란 뜻이지 싶다. 매표소 너머로 신전의 꼭대기가 살짝 보인다. 으악... 신나고 설렌다. 누군가 내 눈을 가리고 신전 앞까지 인도해서 짜잔~하고 보여주면 얼마나 신날까 하는 부질없는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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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 고대 세 부족의 정착지 (인터넷 사진)]
지금 이곳은 언덕 위와 산꼭대기에 그리스 신전과 고대 그리스 극장만 덜렁 남아 있는 곳이지만, 청동기 시대(기원전 12세기경)부터 시칠리아 3대 고대 부족 중 하나인 엘리미인(Elimi)들이 거주하며 도시를 형성했던 주요 장소 중 하나라고 한다. 엘리미인은 트로이 전쟁에서 살아남아 시칠리아로 도망쳐 정착한 트로이인의 후손이라는 전설이 있단다.
그들은 항상 인근 그리스 도시 셀리눈테와 갈등했고, 기원전 5세기경에는 이를 해결하려 아테네에 도움을 요청했다고 한다. 이 요청으로 이오니아계 아테네는 시칠리아 원정을 왔으나 시라쿠자 중심의 스파르타계 동맹세력에 크게 패해서 갈등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자 세제스타는 다시 카르타고와 손잡고 세력을 유지했고, 특히 기원전 409년에는 세제스타의 요청으로 카르타고가 시칠리아로 원정을 왔는데 셀리눈테를 완전히 파괴했고 이 지역은 카르타고의 세력권에 들어가게 됐다고 한다.
신전은 셀리눈테와 갈등을 겪던 시절, 즉 기원전 5세기경 주류세력이었던 그리스 세력에게 인정받고 싶은 세제스타의 욕망의 표현이었을 거라는 해석이 있단다. 그런데 아테네가 시칠리아 원정에서 대패하고 카르타고와 손을 잡게 되면서 공사가 중단됐을 거라고...
그리스 극장이 지어진 시기는 이보다 한참 뒤인 기원전 3세기경이라고 한다. 기원전 3세기 중반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 포에니 전쟁이 발발하자 세제스타는 로마와 협력하여 자치권을 인정받아 카르타고에서 벗어나 번성했단다. 하지만 여전히 상류 문화는 그리스의 문화였고, 로마의 비호로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풍요를 누릴 수 있어서 그리스 극장을 지을 수 있었다고...
모두 수천년 전 기원전 이야기이다. ^^
신전과 극장 이외에도 두 개의 아크로폴리스와 아고라, 공동 묘지 등 당시 유적 또는 흔적이 있다고 한다. 이후 5세기 반달족의 침략으로 버려진 것으로 알려졌었지만, 최근에 로마시대 말기 유적 및 아랍 마을, 모스크, 교회, 노르만 성 등 중세 유적이 발굴되어 재 평가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곳곳에 서있는 표지판에 설명이 써있다. 햇빛과 바람에 갈라지고 바래서 읽기 힘든 표지판도 있지만 잘 읽어보면 여행 안내서 보다는 훨씬 더 자세한 정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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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를 사고 기사 아저씨 말을 따라 그리스 극장 입구로 갔다. 극장 입구는 왼쪽에 있고 신전 입구는 오른쪽에 있다. 극장 입구에 작은 초소가 있고 안에 관리인이 있다. 셔틀 버스가 언제 오냐고 물으니, 5분 후 온다는데, 기다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버스가 금방 떠난 눈치다. 곧 온다니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려는데, 아저씨가 한사코 초소 처마 밑 그늘에서 기다리란다. 그러는 이유가 다 있었는데, 그 뜻을 알 리가... 버스는 아저씨 말대로 금방 오긴 했는데 떠날 생각을 안 한다. 아저씨는 알고 있었던 거다, 왔다고 떠나는 건 아니라는 것을... 언제 떠나느냐 물으니 곧 떠난단다. 곧이 언제냐고요??? 완전 땡볕이긴 하다. 땡볕 하면 인생 최고 땡볕을 경험했던 나미비아가 떠오르는데, 그보다 심하지는 않아도 만만치는 않다. 사람들이 점점 버스 정류장으로 모여든다. 그래서 나도 아저씨의 그늘진(?) 울타리에서 벗어나 주변도 돌아보고 사진도 찍으며 기다렸다.
뭔가를 기다리다 중간에 포기하고 떠나기 쉽지 않다. 초반에는 포기하고 가자마자 기다리던 일이 벌어질 것 같아 못 떠나고, 어느 정도 기다리면 기다린 게 아까워 못 떠난다. 그렇게 어영부영 기다린 시간이 30분. 오늘 이곳에서 쓸 수 있는 시간이 2시간인데, 4분의 1을 버스 기다리는데 쓴 것이다. 부글부글. 처음부터 이렇게 오래 기다려야 한다고 했으면 걸어갔지!!! 버스는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기다리는 것 같다. 버스를 꽉 채울 만큼 사람들이 모이니 그제서야 출발한다. 극장까지 가는 길은 몹시 가팔랐다. 걸었어도 기다린 만큼은 걸렸을 것 같아 조금은 위로가 된다. 가이드북에 의하면 걸어서 20분이라 했는데 그렇게 만만해 보이지 않는다. 창 밖 걸어 올라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무거워 보인다. 하지만 느리게 풍경을 즐길 수 있는 그들이 마냥 부럽다. 여행 길에는 시간 많고 체력 좋은 사람이 부자다.^^ 산비탈 아래로 멀리 신전이 보인다. 놓인 위치도 남아있는 모습도 너무 온전해서 모형을 세워놓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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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서 내리니 산 꼭대기라 햇볕이 더 따갑다. 그냥 돌아다니다가는 전기구이 통닭 색깔이 될 것 같아 스카프로 머리부터 손끝까지 덮어 가렸다. 들판과 들판을 에워싼 산, 그리고 그 위 하늘이 시야 가득 들어온다. 들판 너머로 Castellammare del Golfo 앞 바다가 보인다는 말도 있던데 햇빛은 쨍쨍해도 그렇게 청명하지는 않은지 바다는 보이지는 않는다. 바람이 세서 스카프가 가만히 있지를 않는다. 순간 이 바람이 몇 천년 전에도 불었겠지. 그 때도 이 자리에서 누군가 이 바람을 맞았겠지 하는 생각이 스친다. 유적지에서 수천년전 살았던 동료 인류와 처음 느껴보는 유대감이라고 할까... 찰라의 시간여행을 한 듯한 느낌이다. 기분이 묘하다. 시간여행이 꼭 타임머신이라는 기계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라는 걸 느낀다.
[세제스타 그리스 극장]
[세제스타 그리스 극장]
[세제스타 그리스 극장에서 본 풍경]
[세제스타 그리스 극장에서 본 풍경]
극장 주변에는 그리스 유적과 더불어 최근에 발굴된 중세 유적이 있다. 동선이 아고라agora 지역을 지나 극장으로 가게 되어있다. macellum, buleuterio 라는 공간이 있는데 너무 낯선 단어다. 그 단어들을 이해하기에는 아는 게 너무 없다. 아고라 테라스 아래로 남쪽 계곡의 풍경이 펼쳐있다. 매일 집안에만 있는 사람에게 너무 넓은 세상이다.
극장은 기원전 3세기 로마와 동맹이던 시절 지어졌고 4천명을 수용하는 규모라고 한다. 구석구석 돌아보며 분주히 사진을 찍는 사람들 사이에 돌 계단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 모습이 부러워 계단에 앉아 잠시 앉아 풍경을 본다. 경치가 끝내준다. 아무리 많이 들어도 내 것이 되지 않는 표현이 있다. 끝내준다는 게 그 중 하나인데, 이 순간 다른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ㅠㅠ 숨이 저절로 크게 쉬어진다. 들이 쉰 공기 안에 이곳을 기억할 수 있는 작은 입자가 있어 몸 어딘가에 박혔으면 좋겠다. 들판을 유유히 가로지르는 콘크리트 뱀(고가도로)만 없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다. 로마 공병대의 화신이 진격을 위해 건설한 시설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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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아고라. 아래 왼쪽은 노르만 성]
시간이 없다. 일어나서 주변 다른 유적지로 발길을 돌렸다. 아랍 회당, 그리스 광장, 노르만 왕조 시대의 성, 이 지역 양치기와 지주를 위해 지어졌다는 중세 말 교회 등이다. 지도에서 항공사진으로 보면 선명한 유적들이 실제 코 앞에서 보면 돌무더기로 보인다. 고대 유적을 좀 더 흥미롭게 관람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하다 식견을 쌓으라는 마음의 소리를 들었다. 뭐... 노력은 해보겠지만, 그러기에는 좀 늦지 않았을까 라고 물어보고 싶어진다. ^^ 바닥에 발굴 연도가 군데군데 박혀 있다. 최근에 발굴됐다더니 2천년대 초반이다. 20년. 인간의 수명을 생각하면 긴 시간이지만, 이곳의 유구한 역사를 볼 때는 짧디 짧은 시간이니 최근이라 해도 되지 싶다. 길고 짧은 것의 기준을 굳이 인간의 수명으로 삼을 필요는 없을 듯... 신전은 18세기 말, 그리스 극장은 19세기 초에 복원됐다니 그것과 비교해도 최근은 최근이다.
시간이 흐르며 바뀐 시대의 유적이 지층처럼 쌓였다. 이곳이 얼마나 중요한 곳이었는지 조용히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핸드폰 데이터도 잘 터지지 않는 외진 곳이 되었다. 인공위성에서 골목골목을 다 들여다 보는 세상에 산꼭대기 유적지는 그저 관광객에게나 의미가 있는 곳일 뿐, 과거의 전략적 중요성을 되찾을 수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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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 갈 때는 걸어서 내려가야지 하며 서둘러 신전으로 발길을 돌렸다. 길가 선인장에 어제 염전 가는 길에 보았던 달팽이들이 붙어있다. 어제는 소금물이긴 해도 물기가 있는 지역이었는데, 여기는 사막이나 다름없이 황량하고 건조한데 어디에서 나왔는지 신기하다. 어제는 너무 징그러워서 손을 댈 생각을 못했는데, 살아 있는지 너무 궁금해 용기를 내어 한 개를 떼어 보았다. 설마 했는데 진짜 살아 있다. 겉보기에는 손만 닿아도 바삭 하며 부서질 듯한 껍데기로 보이는데... 신비로운 자연이다.
버스 정류장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니 버스가 곧 올 것 같아 마음이 바뀐다. 버스를 타기로... 시간이 부족한 가난한 여행자다 보니 마음이 오락가락 한다. 엉엉... 다행히 이번 버스는 금방 오고 금방 떠난다.
버스에서 내린 이후부터 신전까지 계속 시계를 보며 달리듯 걸었다. 속도를 내는 대로 다리가 따라 움직여 주는 것이 신기하고 기특하고 고맙다. 내가 이렇게 튼튼한 사람이었어? 그런데 신전 가는 길가에 있는 선인장들이 발걸음을 붙잡는다. 손바닥 선인장, 용설란, 바나나 같은 열매가 달린 식물, 그 사이 도마뱀... 이 와중에 너희들은 어찌 이렇게 신기하고 예쁘니? 바쁘다, 바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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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제스타 그리스 신전]
[세제스타 그리스 신전. 미완성의 증거. 아래 오른쪽 사진은 완성된 아그리젠토 콘코르디아 신전. 기둥에 홈이 있다.]
처음 실제로 보는 도리아 양식 그리스 신전. 감개무량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것 같다. 이곳 신전은 기원전 430~420년대 짓기 시작했으나 정치적, 외교적, 재정적 상황의 변화로 상황이 변하면서 건설이 중단된 것으로 추정되고 중단된 상태 그대로 남아있다고 한다. 36개의 기둥과 entablature, 페디먼트 모두 멀쩡해 보이고, 단지 지붕만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신전은 완성된 적이 없단다. 지붕도 사라진 것이 아니라 지붕을 올렸던 적이 없었단다. 현재는 흔적도 없는 신상 안치소cella는 벽이 없었고, 토대stylobate에 징처럼 튀어나온 것들이 그대로 있고, 기둥에 세로 홈flute을 파지 않았던 것이 미완성의 증거라고 한다. 세를 과시하고 그리스 세계에 어필하기 위해 짓기 시작했다가 이유가 사라져 멈춘 그 모습...
멀리서 볼때는 장난감 모델 같더니 가까이에서 보니 엄청난 규모로 압도한다. 언덕 위에 거대한 신전 하나 밖에 없다. 원래 이랬을까 아니면 이것만 남았을까? 주변 골짜기와 산과 하늘. 이처럼 드라마틱한 세팅이 있을까... 하얀, 눈부시게 빛나는 대리석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진작에 들어 알고 있었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돌의 질감이 구멍이 숭숭 뚫려 부슬부슬 부서져 내릴 것 같다. 그런 느낌이 신비감을 더한다. 시칠리아의 그리스 신전은 모두 시칠리아 채석장에서 구한 석회암으로 지어졌다고 하던데, 아무리 돌이어도 2천5백년을 버티고 있자니 어쩔 수 없는 것인지 원래 그런 돌인지... 아이고, 멋있다 하고 말자니 염치가 없고 잘 이해하자니 버겁다. 다음 생이 있다면 총명할 때 모든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는 어리석은 다짐을 해본다. 신전 옆에 무대가 설치돼있고 무대 앞에 의자들이 놓여있다. 지금은 콘서트와 연극 무대로 사용되고, 공연이 있을 때는 특별 버스가 트라파니와 팔레르모에서 운행된다고 한다.
신전에서 내려왔는데, 떠나기 전에 극장 올라가며 산비탈에서 봤던 신전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다. 얼만큼 더 올라가도 되는지 계속 시계를 보며 뛰었다. 갈 수 있는 한 최대한 높은 곳까지 가서 사진을 찍고, 인사를 고한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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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제스타 버스 정류장 풍경]
플라타너스 나무 그늘 밑에서 돌아가는 버스 기다리고 있다. 바람이 불어 너무 좋다. 버스정류장 풍경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풍경이 눈 앞에 있다.
이곳은 유적만큼 공간을 즐겨야 할 곳이었다. 미리 알았더라면 이렇게 빡빡하게 일정을 잡지 않았겠지만 어쩌랴... 주어진 시간 동안 최선을 다했고, 그럼 됐지 싶다. 버스 기사 아저씨가 새삼 고맙다. 아저씨가 동선을 미리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버스 시간을 제대로 못 맞췄을 것 같다.
가는 버스에는 승객이 한 명 더 있다. 아까 극장 돌계단에서 책을 읽던 사람. 8시 버스, 그러니까 나보다 2시간 먼저 와서 그렇게 여유로웠나 보다. 기사 아저씨가 혼자라고 뭐라 했던 것도 아닌데 나 말고 다른 승객이 있으니 좋다. 토요일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원래 이렇게 사람이 없는지. 버스 회사는 어떻게 수지를 맞출까? 언제 또 오겠다고, 버스 없어질까 걱정이다. ^^
[타란톨라 버스 정류장 표시. 저렇게 소박한 모습으로 저 많은 표지판들과 경쟁하고 있다]
그런데 그녀는 버스를 보자마자 뛰기까지 하며 버스에 먼저 오르더니 내 최애 자리에 앉는다. 그래, 그 자리는 아무도 원하는 사람이 없을 때나 내 몫이지... 흑흑...
buon pomeriggio(=good afternoon)를 외치며 버스에 올랐다. 되도록 이탈리아어로 의사소통하려 애쓰고 있다.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현지 언어를 쓰는 게 이방인의 도리 같아서... 그들도 그런 내 마음을 못 본 척하지 않는 것 같다. 손님 대접 해주고, 안녕과 행운을 빌어 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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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제스타를 한참 벗어나니 이제 네트워크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음성 인식이 제법 된다. 음성 메모 시작...
인생 최초 그리스 신전을 보았다. 산꼭대기 극장, 극장 아래 펼쳐진 들판과 하늘, 극장 가는 산비탈에서 내려다 보이는 신전. 호사다.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는 걸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별로 쓰고 싶지 않은 행복이란 단어가 절로 튀어나왔고 가슴에 뭉쳐 있던 정체 모를 응어리가 조금은 풀어지는 느낌이 있었다. 다음엔 신전을 보고 나서 천천히 극장까지 걸어 올라가 책도 읽고 샌드위치도 먹고 한껏 더 호사를 부리겠다며 기약 없는 미래를 기약한다. 그런데 그때까지 이 노선 버스가 계속 운행되려나??? 자나깨나 시칠리아 버스 걱정. ^^
시칠리아 오기를 정말 잘한 것 같다. 아름다운 땅이다. 마피아가 활개치던 공포의 땅이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 지금도 관광객이 그들과 마주할 일은 없지만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도 믿을 수가 없다. 지금까지 평화로웠고 지금도 평화롭고 앞으로도 영원히 평화로울 것 같다. 아니, 그랬으면 좋겠다.
갑자기 졸음이 밀려온다. 어떤 시간인데, 어떤 풍경인데... 결코 잠들지 않겠다는 각오로 눈을 부릅뜨고 앞을 보니 나의 최애 자리에 앉은 그녀의 고개가 꺾여 등받이 밖으로 나와 흔들거린다. 저 와중에도 깨지 않는 건 아주 깊은 잠을 잔다는 것. 저렇게 잘 거면서 최대 시야를 제공하는 그 자리는 왜 그리도 얄밉도록 빠른 동작으로 차지한 걸까 심통이 난다.
트라파니에 다 왔다. 버스가 어제 걸었던 길을 달리고 있다. 갈 때는 이 길을 지나지 않았는데 가는 길과 오는 길이 다른가 보다. 자전거 타는 사람 한 사람 발견. 저 사람도 인터넷 보고 혹했나? 그리고 자전거 타고 염전에 다녀왔다는 글을 올려 또 누군가를 현혹시키려나? 이 길을 걸었다는 게 꿈 같다. 컨테이너 야적장이 있다. 어제 못 봤던 것 같은데 그럼 그 길이 아닌가 했는데 맞다. 정말 누구도 혼자서 걸을 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내가 본 것을 다른 관광객은 아무도 못 봤을 거라고 하자, 당연하지 라고 하며 웃던 알레시오의 표정이 떠오르고 웃음이 난다. 나 지금 행복한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