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를 기다리며
버스정류장 바로 옆에 바가 있는데 illy 상표를 커다랗게 붙여놓았다. 굳이 커피를, 게다가 브랜드 커피를 마실 생각은 없지만, illy잖아... ^^
커피 마실 시간은 되겠다 싶어 커피 마시며 버스를 기다리려 했다. 그래서 바로 들어가려니, 입구 테이블에 묶여 있는 개 '새끼'가 지랄지랄이다. 기분 나빠서 '새끼'라는 거지 크기로는 절대 새끼 개는 아니다.^^ 나보다 많이 가볍지 않을 덩치로 테이블을 끌고 다니며 짖는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덩치의 개들이 이곳에서는 흔하다. 주인이 나타나거나 바에서 어떤 조치가 있지 않을까 조금 기다렸는데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 저 덩치의 훈련 안된 개는 맹수 아닌가?
결국 개'새끼'의 기세에 밀려 길 건너편에 있는 식당 겸 바casello birreria di coppola로 왔다. 시칠리아라는 곳이 돌다리도 두드리라는 말을 매우 충실히 실천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직원에게 버스 정류장 위치를 다시 확인하니, 카운터 저쪽에 앉아있던 아저씨들이 어떻게 우리 말을 알아듣고 난리가 났다. 버스 정류장을 가리키며 저기니까 빨리 가서 버스를 타란다. 아직 30분이 남았다고 하니, 아저씨들은 서로서로 확인하고, 바리스타는 버스 시간표를 찾아 본다. 내 말이 맞는 것으로 결론이 나니까 그제서야 모두 진정...^^ 귀엽다. 이탈리아에서는 아저씨도 귀엽고 아줌마도 귀엽고, 할머니도 귀엽고, 할아버지도 귀엽고 모두 귀엽다. 모든 인간은 귀여울 수 있다.
생과일 오렌지 주스spremuta d'arancia를 마시고 싶다고 하니, 그건 없고 병 주스가 있는데 어떤 맛을 원하냐고 묻는다. 그래서 뭐가 있냐고 물었더니, 냉장고에서 있는 것을 종류별로 다 꺼내 두 팔로 껴안고 떨어뜨릴 뻔까지 하면서 가져오더니, 테이블에 늘어놓고 하나하나 설명해 준다. 착하고 밝다. 나쁜 사람일 수가 없다. 행복한 인생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저런 사람이 사는 인생이 행복한 인생일 것 같다. 그 중 하나가 쏙 마음에 들어 마셨는데, 뭐였는지 기억이 안 난다. [나중에 사진을 확인하니, 겨우 오렌지 당근 레몬 혼합. 당근이 뭐니, 당근이... ^^]
버스 정류장 건너편에 햇빛을 피해 앉아있을 만한 벤치가 있다. 버스가 오는 것이 보이면 정류장으로 가도 늦지 않을 것 같아 햇볕을 피하러 왔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생각으로 여기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것 같다.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동네 친구인 것 같은 남·여가 있다. 여자애는 해변에서나 볼 수 있는 옷차림을 하고 있다. 비키니 위에 다 비치는 짧은 숄 걸친 차림. 패션은 자신감이라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본인이 아랑곳하지 않으니 누구도 버스 정류장의 비키니 차림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둘이 쉬지 않고 수다를 떤다. 남자냐 여자냐가 너무 중요하고 이성 관계는 웬만하면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회에서 살다 보니 이성 간의 동등하고 스스럼 없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 나도 매우 스스럼 없는 편이다. 가끔 그런 나를 이상하게 보는 눈치나 수군거림이 느껴진다는 게 문제일뿐. ^^
[카스텔베트라노 기차역]
카스텔베트라노 기차역에서
카스텔베트라노 시내를 돌아보고 싶다는 미련을 못 버리지 못해 역에서 보내는 1시간 10분이 조금 아깝지만, 그냥 그렇게 하기로 했다. 아침 일도 그렇고, 트라파니 염전 다녀오던 날 했던 결심을 지키는 차원으로... 행운은 그날 다 썼으니 더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기로 한 결심.
역 직원들도 다 퇴근하고 기다리는 승객도 또 나 밖에 없다. 자꾸 이러기 있기? 이렇게 황망한 심정으로 스산한 기차역에 있게 될 줄은 몰랐다. 인근에 사람이라고는 역 밖 버스정류장 벤치에 흑인 한 명 밖에 없기에, 그를 피해 역 안으로 들어왔더니, 곧 비슷하게 무서운, 어느 나라 말인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말을 주고 받는 흑인 두 명이 들어 온다. 그러다 한 명은 나가고 다른 한 명은 내 옆에 서서 벽에 붙여놓은 기차 시간표를 열심히 보는 듯하더니 역 주위를 배회한다. 무서워, 무섭다고... 때마침 직원들이 나타났다. 그러니 그가 어디로 간다. 아무도 없을 때는 내내 주위를 배회하다 직원들이 등장하자마자 사라지는 건 뭐냐고? 왜 내 상상이 피해망상으로 끝나게 하지 않고 신빙성을 더해주냐고? 한 명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을 보니 완전히 간 것은 아니다.
직원에게 마르살라 가는데 플랫폼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te lo dico io라고 말한다. 아침에 예쁜 얼굴에 그렇지 못한 행실의 말괄량이 소녀가 오빠에게 호령하며 한 말인데... 소녀의 말은 자신이 원하는 걸 내놓으라며 '내가 말하잖아, 내말 안 들려!'라는 위협이었고, 직원은 이따가 기차 들어오면 말해주겠다는 이방인에 대한 친절함이다. 이탈리아 말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
시칠리아에서 좀 이상하다고 느껴지는 게 있다. 초면에 대뜸 2인칭을 사용하는 현상이다. 이탈리아어 존칭은 우리 존대말과는 좀 다른 개념이다. 친하지 않은 사이에 또는 형식을 갖춰야할 상황에 쓰는 말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내가 이탈리아어를 배웠던 십 수년 전에는 초면에는 존칭인 3인칭 여성 단수를 쓴다고 했다. 그러다 말 놓읍시다diamoci del tu라고 한 후 편한 말투인 2인칭으로 말한다고 배웠다. 그런데 실제 이탈리아에서는 겨우 어버버 하며 말하는 외국인이 아무렇게나 단어만 나열해도 대견해 했었고, 존칭을 사용하면 오히려 서운해 하거나 부담스러워 하며 다들 2인칭으로 편히 말해 라고 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래도 가게에서 대뜸 tu를 놓는 일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냥 무조건 2인칭이다. 당시에는 비교적 젊은 여자들에게 ㅆ는 호칭인 라가짜ragazza나 시뇨리나로 불리던 시절이고, 이제는 누구나 마담 또는 시뇨라 라고 부르는 사람이 되었는데도 말이다. 단지 궁금할 뿐 불쾌하다는 건 아니다. 편한 말투가 좋고, 존대말과 존중이 딱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바람이 분다. 이렇게 바람이 불면 우리나라에서는 태풍이 온다. 바람 소리에, 아니 바람이 내는 소리에 잠시 고개를 든다. 이게 혹시 시로코sirocco라는 바람일까? 북아프리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그렇게 부른다는 소리를 아주 오래 전 폼페이 투어가이드에게 들었는데, 웬일인지 그 상황과 그 단어가 잊혀지지 않는다.
긴장이 사라지니 기차를 기다리는 이 시간이 휴식 같다. 진작 알았다. 이런 시간 말고는 마음 놓고 쉴 여유를 갖지 못하리라는 것을. 기차역 오는 길에 버스에서 잠시 몇 번 졸았다.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 해도 자꾸 잠이 들었다. 경계해야 할 상태다. 정신을 얼마나 똑바로 차리고 다녀야 하는데...
또 다른 흑인이 와서 시간표를 보러 온 것이지 나를 보러 온 것인지, 시간표는 보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나를 힐끗 보고 간다. 왜 다 기차역에 붙은 시간표로 기차시간을 확인해야 하는 거야??? 휴대폰으로 trenitalia를 검색하라고!!! 검색이 얼마나 잘 되는데!!! 우리나라에 휴대폰 없는 사람 없듯이 여기에도 휴대폰 없는 사람 없다. 누가 내 휴대폰 탐낼까 봐 싼 second 휴대폰까지 마련하는 호들갑을 떨었는데, 아무도 내 휴대폰을 거들떠도 안 본다. 데이터? 관광객 용도 한달 25유로에 통화 무제한, 데이터 40기가다. 아마도 그들은 훨씬 더 놀라운 싼 가격으로 휴대폰을 쓰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것들아, 휴대폰을 검색하라고!!!
사무실에 직원이 없었더라면 그의 등장으로 아무도 모르게 나만의 경계 경보가 또 발동됐겠지만, 그들이 있으니 아무런 걱정이 없다. 어떤 인간의 존재는 이렇게 안심이 되고 어떤 인간의 존재는 그렇게 경계가 되는 이 상황이 너무 아이러니하다. 나는 순전히 나의 상상력 때문에 탄생했을 수 있는 이유로 보호본능을 발동시켜 피부색만 보고 그 사람을 경계할 것인가 말 것인가 결정하며 앉아있다. 배우면 뭐하고 알면 뭐하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