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파니 염전. 뒤에 보이는 탑이 누비아 탑Torre Nubia. 분홍색은 플랑크톤 때문이라고. 플라멩코는 원래 회색인데 이 플랑크톤을 먹고 이런 색이 되는 거란다]
트라파니에 오고싶었던 첫 번째 이유는 에리체가 아니고 염전이었다. 바닷가에 펼쳐져 있는 염전과 풍차와 하늘이 너무 멋있었다. 시칠리아에 온 이상 그 풍경을 꼭 보고 싶었고, 차없이 여행하며 트라파니를 거치지 않고 염전을 볼 수는 없었다.
안내서에든 여행 사이트에든 그곳으로 가는 대중교통 정보는 없었다. 그런데 트라파니에서 자전거로 염전에 다녀왔는데 무척 좋았다는 이야기를 어떤 외국 여행 사이트에서 보았고, 그 말에 자전거가 너무 좋은 옵션인 것 같았다. 안내서에 의하면 트라파니 항구 근처에서 자전거 대여점도 있었다. 구글 지도로 지형과 길을 확인하니 완전 평평하고 구간별로 다르긴 해도 자전거 타기 좋을 것 같다. 유럽 도시를 자전거로 여행하는 건 오랜 로망. 그런데 평지에서 중심 잡는 정도의 자전거 실력으로 엄두가 나지 않아 그냥 로망으로 남아있는 상태인데, 트라파니 염전이 로망을 실현하기에 좋은 기회로 보였다. 몇 년을 타지 않아 타이어가 삭은 자전거를 수리해 동네에서 타고 다녔다. 연습도 하고 다리 힘도 키울 겸...
세제스타 가려던 계획을 급히 수정해서 염전으로 가기로 한 상황.
안내서에 나온 가까운 자전거 대여점은 문을 닫은 것 같고, 다른 곳 위치를 보니 너무 멀다. 자전거 빌리러 가느니 염전으로 직접 걸어 가는 건 어때 하는 생각이 순간 스친다. 염전까지 멀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염전, 정확히 말하면 소금 박물관까지 8km라고 지도가 알려준다. 자전거로 갈 수 있다면 걸어서도 갈 수 있겠지... 나쁘지 않은 생각인데 싶다. 하루에 20여km씩 한달 넘게 산티아고 길을 걸은 후 걷는 것에 대해 겁이 완전 없어졌다. 10km도 안 되는데, 짐도 없이 그걸 왜 못 걸어? 하는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 항상 조용하고 한적한 길을 한없이 걷는 것에 굶주려 있다. 늘 방해 받지 않고 조용히 걸을 곳을 그리워한다. 마음 한편에서 그래도 택시가 낫지 않을까 하는 소리가 들리지만, 그러면 침 흘리며 봤던 사진 속 염전 풍경을 마음껏 즐기지는 못 할걸 하는 소리도 들린다. 걷고 싶다. 그냥 걷고 싶다. 해가 중천에 떠있는 시간이다. 땡볕에 허허 벌판을 걷는 게 조금 신경이 쓰이지만 몸에 쌓여 있는 것이 지방인데 에너지야 이미 충분하고 물만 넉넉하면 살아 돌아 올 수는 있을 것 같다. 버스표 사러 갔던 담배 가게로 다시 가서 1리터짜리 물 두 병을 사서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지도에 목적지를 소금 박물관museo del sale으로 찍고 출발했다.
염전은 트라파니 남쪽 해안 가에 넓게 펼쳐 있지만, 그 곳까지 가려면 항구 주변 산업 지대를 지나야 한다. 실제 길은 구글 스트리트 뷰로 보는 느낌과는 많이 다르다. 방안에서 모니터를 통해 축지법 쓰듯 성큼성큼 본 스트리트 뷰와 아무리 보폭을 넓혀봐야 종종걸음인 걸음걸이로 걸으며 보며 보는 길의 모습은 많이, 아주 많이 다르다. 실제 길에는 냄새, 소리, 소금기 머금은 바람, 노란 흙먼지, 소금기 머금은 땅에서 자라는 식물, 지평선과 맞닿은 하늘이 있고, 온갖 쓰레기, 굉음과 함께 바람을 일으키며 저돌적으로 달리는 끝없는 트럭의 행렬, 소스라치게 놀라게 하는 도마뱀, 쥐의 사체, 짐승의 배설물, 불쑥 나타나서 의아한 시선을 보내는 정체 불명 동네 형님들이 있다. 모두 낯선 것 뿐... 어떨 때는 낯선 것이 신선해서 좋지만 때로 낯섦은 공포다.
걷다 보니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짓이 아무도 하지 않을 짓이라는 것을 알겠다. 겁이 없어 이런 길을 좀 쫄린다 정도로 걷고 있지, 범죄 영화에서 사건이 벌어지는 곳이 바로 이런 곳이다. 도로 한쪽엔 공장의 높은 담벼락이 이어지고 커다란 트레일러들이 줄지어 달린다. 내가 걷고 있는 인도는 양쪽으로 잡초가 내 키 높이만큼 자라있다. 어떤 짐승의 흔적일까 궁금한 배설물과 쓰레기가 난무한다. 거대한 트레일러가 굉음을 내며 지나간다.
카포 시장에서 산 초콜릿이 온전히 있고 물도 두 병이나 있으니 죽지는 않겠지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드는 것을 보면 많이 긴장했다. 이상한 아저씨가 한 명 앉아 있다. 시선이 와서 꽂힌다. 나름 이유가 있겠지, 쫄지 말자 하며 지나쳤다. 저 아저씨 입장에서 보면 이상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일 거다.
산길도 아니고 평지. 왕복 16km라면 아무것도 아니다. 아니, 충분히 걸을만한 거리다. 낯설고 인적이 없어 긴장될 뿐이다. 죽은 쥐가 있다. 으악~~ 손가락만 한 도마뱀들이 내 앞을 가로질러 다닌다. 엉엉. 무섭다. 쟤들도 난데없는 소란에 무서워서 저러는 거지 싶다. 무서운 생각이 계속 들지만 발걸음을 되돌리기 까지는 않아도 될 것 같다. 흰 구름이 둥실둥실 떠있는 파란 하늘과 저 멀리 보이는 바위산과 들판, 그리고 그 위로 쨍쨍 내리쬐는 태양을 믿는다. 이런 하늘 아래에서 범죄를 저지를 수는 없다. 으슥한 골목에 밝고 맑은 벽화를 그렸더니 범죄율이 떨어졌다는 것과 같은 이치다. 확률도 믿는다. 범죄가 일어날 확률은 일어나지 않을 확률보다 엄청 낮다. 게다가 경찰도 지나가고 카라비니에리(이탈리아 지역 경찰)도 지나가며 아무런 경고를 하지 않는 걸로 보아 내가 하는 짓이 그다지 무모하지는 안은 걸로 결론을 내렸다.
[염전 saline di trapani e paceco. 길가에 소금이 눈처럼 쌓여있다]
산업지대를 빠져 나와 살리나(salina: 염전)로 접어들었다. saline di trapani e paceco가 나온다. 실제 먹는 소금을 생산하는 곳은 아니고 야외 전시장처럼 꾸며놓은 곳이다. [알레시오의 말에 의하면 이곳에서 생산되는 소금은 운동장에 뿌리는 등 식용이 아닌 다른 용도로 사용된단다.] 산업지대를 지날 땐 내 무모한 선택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사실 daredevil의 정신으로 무모했던 것은 아니다. 자전거로 갈 만하다니까 걸을 수도 있을 것 같았고, 좋은 풍경을 보며 걷고 싶었던 것뿐이다. 산업지대를 홀로 걷는 느낌이 어떨지 예상하지 못했던 선택이었을 뿐이다. WWF(world wide fund for nature. 세계자연기금. 세계적 비영리 환경보전 기관이란다.) 표지판이 나타나며 오른쪽으로 살리나가 보이자마자 그 모든 후회가 사라진다. 너무 좋다. 긴장과 두려움을 치를 만한 가치가 있는 풍경이다. 이걸 보고 싶었어. 이걸 보고 싶었다고... 이런 풍경을 실제로 보고 걷다니... 선물 같다.
한 남자가 순례자 복장으로 나와 반대 방향으로 걷는다. 나 말고도 걷는 사람이 있다. 그가 걷는 사연이 궁금하다. 무슨 이유로 어디에서 어디로 걷고 있는 것일까? 그는 내가 궁금하지 않은 것 같다. 내 시선을 외면하며 무심히 지나친다.
소금 박물관까지는 아직 한참 멀었다. 꽤 걸은 것 같은데 2~3 km 밖에 안 걸었다. 그래도 넉넉히 두 시간이면 박물관까지 간다. 풍경도 너무 좋고 아직 해가 중천에 있어 문제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는 않기로 했다. 길 양 옆으로 갈대가 바람에 나부낀다. 햇볕은 쨍쨍하고 온도는 30도 정도 될 것 같은데, 바람이 뒤에서 계속 불어줘서 걷기에 나쁘진 않다. 가다보니 슈퍼마켓도 있고 식료품 점이 보인다. 그렇게 out-of-nowhere은 아닌가 보다 하며 안도한다. 바람이 분다. 흔히 바닷바람에 짠 내가 실렸다고 하는데, 드넓은 염전 가장자리에 부는 이 바람은 얼마나 짤까... 정체 모를 비릿한 냄새가 나는데 바로 이게 짠 내라는 것일까...
신나서 걷고 있었는데 길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도랑을 앞에 두고 갑자기 인도가 끊기며 도로로 내몰렸다. 아무리 봐도 다른 방법이 없다. 갓길도 없는 왕복 2차선 자동차 전용 도로에서 거대한 트럭들과 경쟁하며 걸어야 한다. 다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고 인적도 동네도 없어 택시를 부르기도 곤란하다. 울고 싶다. 차들이 전속력으로 달린다. 설마 날 죽이기야 하겠냐만, 가혹하다. 어떻게 인도가 갑자기 없어져??? 갈 때는 택시를 부르든 히치 하이킹을 하든 버스를 찾아보든 다른 방도를 찾아야지 이 길을 걸어 돌아오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박물관까지 가면 레스토랑도 있고 까페도 있다고 지도에 표시돼 있으니까 방법이 있겠지 하며 걷는다.
얼마를 걸으니 살리나 표지판이 나오고 역시 인도는 따로 없어도 교통량은 많지 않은 시골길로 빠진다. 이런 길을 신작로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안심이 되니 풍경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또 기분이 너무 좋아진다. 금붕어인가? 몇 분 전 생각을 못 한다. ^^
[염전. 곳곳에 WWF에서 붙여둔 표지판. 염전 이름, 역사와 크기, 생산량, 특성 등을 설명한다.]
[택시 명함 주신 아저씨의 좌판]
출발할 때는 걸어서 왕복도 가능할 것 같았고, 편도는 가뿐하지 했는데 긴장 탓인지 날씨 탓인지 점점 지친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을 것 같은 곳인데, 한 아저씨가 조잡한 풍차 장식품을 차로 싣고 나와 좌판을 펼쳐놓고 있다. 세월을 낚는 것? 기회가 있을 때 무조건 도움을 구해보자 싶어 혹시 택시 전화번호가 있냐고 물었다. 잠깐 기다리라며 차 안에 있는 상자를 뒤져 명함을 하나 찾아 주신다. 택시 번호가 수중에 있으니 마음이 든든하다. 그리고 풍경이 훨씬 더 아름답게 보인다. 들판, 하늘, 구름, 파스텔 빛깔 염전, 풍차, 낯선 식물들, 꽃들. 식물 줄기가 뭔가 이상하다 싶어 자세히 봤더니, 작은 달팽이들이 가지를 타고 올라와 다닥다닥 붙어있다. 와... 신기하다. 보아하니 차츰 식물을 고사시키는 것 같다. 징그럽고 동시에 예쁘다.^^
[쿨카지 소금 박물관]
한참을 더 걸어 드디어 소금 박물관과 누비아 탑이 멀리 보인다. 너무 반갑다. 한없이 걷고 싶다 할 때는 언제고, 목적지가 가까워졌다고 이렇게 기쁠 수가... 걸어서 돌아가는 것은 완전 포기다. 여행을 앞두고 체력단련 차원으로 주말마다 산길 15km를 걸었었는데, 평지 10km도 안 되는 거리에 이렇게 기가 꺾이다니... 자존심에 상처. ^^
소금 박물관 입구에서 한 여자를 만났다. 박물관이고 뭐고 일단 트라파니 시내로 돌아갈 방도를 마련하는 것이 먼저다 싶어, 트라파니로 돌아갈 것이냐고 물었다. 그렇단다. 그러면 비용을 낼 테니까 나를 데려다 줄 수 있냐고 물었다. 안 된단다. 내 마음이 간절하니 그 대답이 순간 너무 서운하다. 내가 해칠 사람도 아니고, 돈도 낸다는데 그렇게 단번에 거절하다니... 곧 그녀가 안 되는 이유를 말한다. 남자친구와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태워줄 수 없다는 것이다. 무안... 다 사정이 있는 거다. 괜히 막 삐지고 그러지 말자...^^ 그러더니 가게에 물어보면 될 것 같다고 앞장서서 레스토랑 안에 있는 가게로 가서 직원에게 내 사정을 대변해준다. 그러니 직원이 당장 전화를 걸어 내게 택시 기사를 바꿔준다. 택시 기사가 15분만 기다리란다. 1시간 후에 오면 안되겠냐 묻고 싶었지만 왠지 그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전화를 끊고 모두가 너무 고맙지만, 이 상황은 야속하다. 박물관도 못보고 누비아 탑 주변도 못 걷고... 엉엉… 박물관 안을 들여다 보니 볼 것은 별로 없다. [그런데 여기서 아르키메데스가 고안한 나사를 봤어야 했다. 그랬다면 시라쿠자 아르키메데스 박물관에서 엄청 감동했을 것이다. 모터가 없던 시절 염전에 물을 넣고 뺄 때 아르키메데스의 나사를 이용했고, 지금도 여전히 사용하는 곳이 있단다.] 염전 풍경은 이미 걸어 오면서 실컷 봤으니 안전하게 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지 하며 마음을 위로했다.
잠깐 앉아서 숨을 돌리고 주스를 사려 가게로 가니 문이 닫혔다. 바깥에서 소금 팔던 청년도 사라졌다. 그 잠깐 사이에 모두 문을 닫고 퇴근을 한 것이다. 박물관은 어차피 못 봤구나 싶다. 택시를 부르는 것에 앞장서주었던 여자 커플도 어느새 떠났다. 사람들이 순식간에 사라지자 좀 전까지 아름다운 염전 한 가운데였던 곳이 낯설고 외진 허허 벌판처럼 느껴진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고 관광객 한 가족만 있다. 길에서 얻은 명함이 택시를 보장하는 것이 아닌데, 10분 늦게 도착했다면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었을 것이고, 혹시라도 명함의 택시 기사가 못 온다 하기라도 했다면 어땠을까 상상하니 아찔하다. 박물관 못 봤다고, 이곳을 더 둘러보지 못했다고 서운해할 상황이 아니다. 나를 데려다 줄 택시가 오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할 따름이다.
P.S. 소금 박물관은 쿨카지 염전salina culcasi을 박물관으로 운영하는 것이다. 빨간 지붕의 풍차가 달린 탑도 있고 작은 박물관도 있고, 레스토랑도 있다. 소금도 팔고, 누비아 탑을 방문하며 쿨카지 염전을 돌아볼 수도 있다. 누구에게도 그곳까지 걷기를 추천하지는 않겠지만, 나도 다시 걷는 일은 없겠지만, 나는 그날 무식해서 무모했음이 마냥 감사하다. 걸으며 본 풍경이 너무 소중하다. 공짜로 얻은 추억이 아니지만 지불한 것에 비할 수 없는 큰 댓가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P.S. 좀 더 잘 알아봤으면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도 걷거나 자전거 여행을 할 수 있었다. 걷는 도중에 AST 버스가 지나가길래 혹시나 하고 찾아보니, 트라파니에서 누비아Nubia라는 마을까지 가는 AST 버스가 있다. 누비아에서 소금 박물관까지는 멀지 않고 산업지대를 지나지 않아도 되니 걷기에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걷는 걸 좋아하면 생각해 볼 옵션이다. 트라파니에서 소금박물관까지 택시비(편도 15유로)도 그렇게 부담스럽지는 않다. 다시 계획을 세운다면 마르살라에서 saline della laguna marsala로 가서 페니키아 유적지 모찌아 섬에 (정말 별 볼 것이 없다고는 해도) 다녀오고, 근처 염전 돌아보고, mamma caura에서 밥 먹으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노을을 보는 코스를 고려해볼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