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8/2020

시칠리아 여행: 05: 트라파니: 도착& 숙소 유감 1탄



[트라파니 항구 porto di trapani]


길이 트라파니와 에리체로 갈라지는 표지판이 보이고 어느새 도시 외곽으로 접어든다. 허름한 골목길을 지나며 몇 개의 정류장에서 승객을 내려놓고 전형적인 관광지 항구 앞에 도착했다. 트라파니 항구porto di trapani. 종점이다. 관광객이 몰리는 항구 주변의 어수선함과 사회 기반 시설이 주는 전형적 삭막함이 느껴진다.

숙소에 짐을 먼저 내려놓는 것이 우선이다. 시칠리아 두 번째 숙소지만, 혼자 찾아가는 건 처음... 분위기가 어떨지 전혀 감이 없는데... 그런 곳에서 누가 봐도 관광객인 사람이 휴대폰으로 지도 들여다보며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보이기 싫다. 버스 안에서 숙소 가는 길을 시험 공부하듯 익혔다. 첫 인상이 중요하니 내리자마자 어느 방향으로 걸어야 하는지 시뮬레이션도 해가며... 그래서 그런지 숙소 찾기가 훨씬 수월하다. 관광객임을 숨길 수는 없어도 알 것은 아는 관광객인 척하고 싶었다.^^





숙소 Albergo Maccotta


[트라파니: 숙소 가는 길 풍경]

버스 정류장에서 호텔까지 가는 골목길 풍경이 과거에 지금보다 빛나던 시절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행인 것은 치안에 대한 염려는 내려놓아도 좋을 분위기다. 괜한 긴장이 머쓱할 정도다.

호텔은 버스 정류장에서 5분이나 걸리려나, 아무튼 매우 가깝다. 냄새, 색조, 실내 장식 등 로비에서부터 이 지역에 터를 잡은 지 오래이나 변화에 적응을 못하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적응을 거부(?)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분위기가 흠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호텔 카운터를 지키는 아저씨를 보니 좋은 의미의 부적응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손님으로서 good morning, 아니 buon giorno, how may i can help you? 정도의 인사는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는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인사도 내가 먼저 하고 용건도 먼저 말하고... 내가 다 했다. 기회를 안 줬나??? 내가 그러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 그래도 그렇지...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마지못해 나를 응대하는 듯한 태도다. 머리, 얼굴, 눈에 붉은 기가 돈다. 늙은 여우라는 말이 떠오른다.

이른 시간이다. 나도 상식이 있는데... 방을 내놓으라는 게 아니고, 체크인하고 배낭만 내려놓고 나가겠다는데, 못마땅한지 곤란한지 이상한 표정을 짓더니, 선심 쓰듯 15분을 기다리면 방을 주겠단다. 됐다고요, 빨리 나가고 싶으니 짐만 맡아달라고요 라고 말하고 싶지만, 15분이라잖아, 기다려줘 하는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코 앞에 서서 기다리는 나를 못 견디겠는지 5분쯤 지나서 카운터에서 열쇠를 꺼내 준다. 그 사이 누구와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미 준비된 방이 있었는데 그냥 기다리라고 한 것??? 총 3박 중 2박은 비싼 방이었고, 추가한 1박은 저렴한 1인실이었는데, 또 선심 쓰듯 방을 바꿀 필요 없이 계속 있으라고 한다. 그래서 고맙다 했다. 보통 이런 경우는 비싼 쪽으로 계속 있으라는 것이니까... 그런데 웬걸...

복잡하게 꺾인 복도 끝에 있는 방. 방문을 열고 기절할 뻔 했다. 일단 퀴퀴한 냄새가 훅 끼쳤다. 침대는 꼬질꼬질해 보이는 침구가 덮인 푹 꺼진 벙커베드. 싸구려 가구며 집기들은 도대체 언제부터 있던 건지... 폐기물로 내놓은 것들을 연상시키는 모습... 그리고 최악은 창이 하나도 없다는 것. 이건 수용시설이지 호텔방이 아니다.

upgrade의 호의를 베푼 것이 아니라 downgrade의 수작을 부린 것이다. 아무리 서둘러 나가고 싶어도, 수용할 상황이 아니다. 다시 짐을 들고 내려가서 창문이 있는 다른 방을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너무나 순순히 30분 있으면 준비되니까 기다리란다. 실랑이를 예상했는데 이건 또 뭔가 싶다. 호구로 보고 골탕 한번 먹여보려 한 것일까? 귀한 오전 시간을 이렇게 보내는 게 언짢지만 기다려야 할 것 같다. 기다리는 동안 밥이나 먹자 싶어 30분 후에 오겠다 하고 나갔다.





근처 바에서 아란치노와 카푸치노를 시켰다. 시칠리아에서 먹는 첫 아란치노다. 그런데 과거 경험에서 나온 예상처럼 기름이 줄줄 배어 나온다. 커피가 느끼한 짠 것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오렌지 주스를 시켜 마저 먹으며 생각하니 5분의 실마리가 풀리는 것 같다. 내가 예약한 방은 기다려야 하는 게 맞는데, 마침 비어있는 감옥 같은 방을 주고 어쩌나 두고 본 것... 멍청히 그대로 있으면 좋고, 아니면 다른 방을 주면 되지 했던 것... 그럼 30분은? 그건 골탕이지... 원래 15분에서 10분 지났으니 5분 후면 된다고 이실직고를 하겠냐고...

마저 먹고 돌아왔더니 예상처럼 방이 준비됐단다. 역시 30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이번에는 내가 예약한 제대로 된 방을 주려나 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복도에서부터 잘 쓰지 않는 구석방이라는 느낌이 온다. 역시... 아무튼 창문이 있기는 있다. 그런데 열어보니 코앞에 벽이 있어서 굴속 같기는 마찬가지다. 

열이 확 오른다. 교활한 늙은 여우가 맞았다. 이것도 내가 예약한 가격의 방은 아니라는 신호가 온다. 감옥 같은 분위기는 마찬가지지만 방이 조금 더 컸고, 침대가 벙커베드는 아니다. 햇빛은 안 들어도 환기는 될 테니까, 어차피 밤에 들어와 잠만 잘 거니까, 귀한 시간을 실랑이로 쓰며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으니까 이쯤 하자 싶다. 그들과 맞붙어 싸우며 에너지를 낭비하기 보다 감정을 자제하며 그들의 비열함의 목격자 또는 관찰자가 되기로 했다, 내 즐거운 여행을 위해...

P.S. 
숙소는 두 곳 빼고 모두 booking.com에서 예약했는데, 예약할 때 특정 방을 예약하게 되어있다. 이곳을 빼고는 예약한 방을 정직하게 줬다. 이곳은 예약과 상관없이 사람 봐가며 아무 방이나 빈방을 적당히 배정하는 것 같다. 시스템 또한 변화에 적응을 못하는 듯. 이곳에서 불쾌한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희한하게 하루에 한번씩 꼭꼭 있었다.^^ 그리고 다행히 이렇게 무례한 인간들은 두 번 다시 없었다. 이번 여행에서 머문 숙소 중 유일하게 론리플래닛에서 추천한 곳이었는데... 론리플래닛 시칠리아 편도 이 숙소마냥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다. 객관성이 의심되는 정보가 종종 있었는데, 이 숙소가 그 예 중 하나다. 올해 개정판이 새로 나온다 해서 기대했는데, 나오고 보니 저자가 그대로다. 개선의 기대를 접었다.